2024. 7. 17. 17:30ㆍ카테고리 없음
목차
예레미야 33:1-13
찬송가 363장 내가 깊은 곳에서
두 번째로 임하니라
하나님께서 첫 번째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은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라는 것이었습니다(32:7). 아나돗은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약 4km정도에 있는 성읍입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곧 점령하는 시점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사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32:16).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고(32:27-35) 이어서 포로 귀환과 회복을 말씀하셨습니다(32:36-44). 이 말씀 다음에 두 번째로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 내용이 1절부터 나옵니다.
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가 아직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했습니다(1절). 예레미야는 비록 갇혀있는 처지였지만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고(32:6) 하나님께 여쭈어 기도하고(32:16)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습니다(32:26). 하나님의 사람은 가장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비록 그가 매여있을지라도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55쪽).
하나님의 사람은 옥중에 있고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나 하나님은 그를 찾아오신다. 시 69:33에 말하기를,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라고 하였고, 시 79:11에는 말하기를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하였고, 시 102:20에는 말하기를,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라고 하였다.
신자는 갇혀 있을 때에나 자유로울 때에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는 주의 영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고후 3:17).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예레미야는 지금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일을 행하시고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이름이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약속하시고 이루시는 분, 모든 존재가 의존하시는 분, 영원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을 원어의 느낌을 살려서 뜻을 번역하면 "나는 나로 있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 안에는 존재와 의지와 능력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여호와께 의존합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미래에 어떤 일에 대해 뜻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뜻을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런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이시고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예레미야는 갇혀 있으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지만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효력이 있고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분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말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55쪽).
여기서는 유대인을 바벨론의 손으로 징계하여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참된 구원자가 여호와라는 의미에서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어 성취하시는 여호와"라고 한다. 특별히 여기 "여호와"라는 이름이 세 번 나오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이름의 뜻을 생각하게 한다. ... 이 성호는 영원 자존자(自存者)로 번역되었는데, 그 의미는 "나는 나대로 있고 나대로 간다"라는 영원 불변자요, 절대 자주자(自主者)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은 구속(救贖) 사업의 임의적(任意的) 종국적(終局的) 완필자(完畢者)라는 의미이다.
크고 은밀한 일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는 이미 하나님께 여쭈어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32:16). 예레미야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32:26).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친히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사용하십니다.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을 기쁘게 사용하십니다. 신자는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상황을 초월해서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3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56-457쪽).
이때에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혀서 기도하는 중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권장하는 의미에서 말씀하시기를, "부르짖으라"(קְרָ֥א/케라)고 하셨다. "부르짖음"은 특별히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의문을 풀어 주시기 위하여 벌써 길게 말씀하신 바 있으나(32:26-34), 이제 또다시 기도 응답의 형식으로 그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계속하신다. 신자가 신령한 진리를 연구에 의하여 깨달을 수도 있으나 그런 때에는 교만해지기 쉽다. 그러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 응답에 의하여 받는 깨달음은, 그로 하여금 비교적 겸손하게까지 만들어 준다. 기도 중에 얻은 깨달음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 명백하니만큼 그것을 받은 자로서 교만할 수 없다.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גְּדֹל֥וֹת וּבְצֻר֖וֹת לֹ֥א יְדַעְתָּֽם).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이 아래 말씀이 보여 주는 것과 같이, 유다 민족이 바벨론 군대로 말미암아 패배를 당한 후에 장차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복된 재건이 있을 것을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일은 벌써 예레미야에게 여러 차례 계시된 바 있고 그가 이미 예언한 바도 있는데, 왜 이것을 예레미야로서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는가? 예레미야로서도 이것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는, 그도 아직 그 사실을 실제로 완전히 체험하지는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특별히 "은밀한 일"(בְצֻר֖וֹת/베추로트)이라는 히브리 원어의 뜻이 잘 나타내고 있다. 히브리 원어 베추로트는 "단절된" 것 또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데, 곧 사람이 자기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은밀한 일에 당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해주셔야만 하는 일입니다. 문맥상 여기에 나오는 은밀한 일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일입니다(7-9절). 이 일은 사람으로서는 알 수도 없고 그것을 초래할 수도 없고 그 일을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이룰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우신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원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누리게 하신 일입니다.
이 말씀은 신약 시대에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각 사람에게 믿음을 주심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신자들은 자유롭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하나님을 기뻐하게 되었습니다(10-11절).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
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참호와 칼을 대항하여
5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여움과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시체로 이 성을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당시 유다 민족도 바벨론에 대항해서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항전했습니다. 즉 성읍의 가옥을 헐고 심지어 왕궁까지 헐어서 갈대아인의 참호와 칼에 대항했습니다(4절). 그들은 끝까지 싸우려고 했습니다(5절).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노여움과 분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죽은 것은 자기들의 악행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에게 은총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얼굴을 가리시고 그 성을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5절).
이처럼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자기 죄악에서 자기 스스로를 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영원히 고통을 당하게 합니다. 아무도 그 죄에서 스스로를 건져낼 사람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헛된 일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보내셔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27:11).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에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물으실 때에 신자는 겸손하게 주시는 징계를 달게 받아야 합니다.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징계를 달게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시면서도 무한한 고통으로 내려지는 죄의 형벌을 달게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6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하심은 부활하게 하셔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치신 것은 그들을 치료하고 고쳐서 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6절). 하나님께서는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7절).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치시는 이유는 고쳐서 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치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58쪽).
이 말씀을 보면, 위에 벌써 진술한 것과 같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유다 민족의 재앙이 결코 영원히 망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재건되기 위한 것이다. 이 부분에 기록된 말씀은 인간의 어두운 마음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때로 말하면 바벨론의 무서운 군대의 세력이 유대 땅을 점령하였고, 유다 민족의 부패상은 더할 나위 없는 것이었으니만큼 그 민족의 장래는 여망(餘望)이 없을 것으로만 보인 것이다. 이런 캄캄한 가운데서 어떻게 장래의 소망을 확언할 수 있으랴? 그러나 우리 본문 6-26절까지는 유다 민족의 광복에 대하여 5, 6차례나 역설체(力說體)로 확언하였다. 이것은 사람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다.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란 말씀은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을 징계하신 것이 그들을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사랑하는 자에 대한 그의 파괴 행위는 언제나 새로운 건설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욥 5:17-19은 말하기를,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라고 하였다. 사람이 곤란을 받되 하나님의 수중에서 징계를 받는 의미의 것이라면 아무리 할 수 없는 처지에 바졌을지라도 소망이 있다. "인간이 할 수 없이 된 후로부터는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신다"(Veldkamp).
"진실"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에메트(אֱמֶֽת)니, 견고함(사회적 또는 국가적으로 견고)을 의미한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놓여나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이룬 사회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으나, 특별히 장차 신약 시대에 있을 영적 생활의 견고함을 비유한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죄에 빠져 고통을 당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시고 의로우신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죄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발버둥쳐봤지만 소용없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가 얼마나 무한히 크신 것인지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이 얼마나 무한한 고통인지 우리는 그것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8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9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
10-1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를 돌려보내어 지난 날처럼 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죄사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징계를 받아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거기에서 모든 죄악이 정결하게 됩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죄악은 죽음으로만 그 값을 치를 수 있습니다(롬 6:23). 이들에게 바벨론 유수는 죽음과도 같은 일입니다(겔 37:12).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모든 택하신 백성의 죄에 대한 값을 십자가에서 치르셨습니다. 무한한 고통의 죽음을 맞이하심으로 그 모든 죄를 씻으시고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회복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모든 이는 이 부활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새 생명을 얻은 이는 9절 이하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의 기쁜 이름이 되고 찬송과 영광이 됩니다. 세계 열방은 하나님의 구원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게 됩니다(9절). 이 일은 신약 시대에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에베소서 1:12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59쪽).
곧, 예루살렘(택한 백성의 상징)이 하나님에게 기쁨의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 자신들도 기쁨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기쁨)을 그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게 된 것을 이름이다. 여기서는 두 가지 중요한 은혜의 사실이 진술된다. 곧,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죄를 사해 주심이 그 하나이고(8절), 그 결과로 그들에게 임한 기쁨과 찬송이 또 하나이다(9-11절). 캄벨 몰간(Campbell Morgan)은 이 두 가지가 서로 원인 결과의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결국 그들로 하여금 기쁨을 보게 하려는 것을 최후 목표로 가진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들에게 눈물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성경의 최후적 진리는 기쁨이다. 그것은 계 7:17이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영적 즐거움에 도달케 하기 위하여 먼저 그들의 생활을 정화시키신다. 사람은 죄악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기쁨이 없다."
성도는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성도에게는 구원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기쁨은 죄악을 범할 때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앞에 매일 회개로 나아갑니다. 회개하고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의 기쁨을 회복합니다. 8절에 죄 사함이 나오고 9절에 기쁨이 나오는 것은 성도의 삶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알려줍니다.
죄 사함을 얻고 기쁨을 회복한 성도는 즐거운 소리를 발합니다(10-11절). 그 소리는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입니다. 또한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입니다. 즉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감사제사를 드리는 소리입니다. 죽음은 적막을 초래하지만 부활은 온 세상을 즐거운 소리로 가득하게 합니다. 이 즐거운 소리는 구원 얻은 자들이 내는 소리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설교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61쪽).
뉴턴(John Newton) 목사는, 화재로 재산을 다 잃어버린 신자의 가정을 심방하며 하는 말이 "기뻐하라"고 하였다. 그때에 그 집 주인이 묻기를, "재산을 다 잃어버렸는데 무엇을 기뻐하라는 것입니까?" 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당신은 화재가 다칠 수 없는 재산(하늘 기업)을 가지고 있으니 기뻐해야 됩니다"라고 하였다. 버마에서 일한 선교사 져드슨(Adoniram Judson)은 언제나 기뻐했기 때문에 천사라는 별호를 받았다. 한번은 그가 뉴잉글랜드(New England)의 어느 거리를 걸어 갈 때에 어떤 소년이 그의 얼굴 빛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는데 그가 자라서 유명한 목사가 되었다. 그가 바로 트럼블(H. C. Trumbull) 목사이다.
그의 양떼를 눕게 할 것이라
1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던 이 곳과 그 모든 성읍에 다시 목자가 살 곳이 있으리니 그의 양 떼를 눕게 할 것이라
13 산지 성읍들과 평지 성읍들과 네겝의 성읍들과 베냐민 땅과 예루살렘 사면과 유다 성읍들에서 양 떼가 다시 계수하는 자의 손 아래로 지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부활 생명은 풍성한 생명입니다. 12-13절은 그것을 알려줍니다. 목자가 양 떼를 눕게 하고(12절) 양떼가 다시 계수하는 자의 손 아래로 지나가게 됩니다(13절). 즉 유다 백성들의 재산이 회복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61쪽).
여기서는, 죄 사함 받아 기쁨을 얻는 신자들의 사회에 물질적 축복도 많을 것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셨다(마 6:33). 사람들은 영적 축복보다 물질적 축복을 우선적으로 구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시작하시지 않는다. 죄를 깨끗케 함이 없이 소유된 물질적 부요는 실상 오래 가지 못한다. 유명한 웰링턴(Wellington) 공은 교육 문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말하기를, "만일 당신들의 종교를 떠나서 아이들을 교육시키면, 그들은 민첩한 마귀들이 된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먼저 영적 축복을 받아야만 건전한 물질적 축복도 받는다.
물질적 축복에 선행해야 할 것은 죄 사함과 그로 인해서 얻는 새 생명입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물질적 축복은 저주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 죄 사함을 받아 기쁨을 얻은 사람은 상황을 초월한 기쁨 가운데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기쁨에 물질적인 축복까지 더해주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와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 마음이 물질에 더 기우는 것은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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