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3. 07:00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디모데후서
목차
디모데후서 1:9-18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복음을 위한 고난
바울은 디모데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1:4). 디모데를 보고 자기의 기쁨이 가득하게 함(1:4하)과 동시에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1:6).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가 당한 고난, 즉 복음을 위한 고난으로 초청합니다(1:8). 복음을 위한 고난은 약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었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1:8).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과 우리 주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은 자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 하나님게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둘째,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소명으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그렇게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일에 의한 것(οὐ κατὰ τὰ ἔργα ἡμῶν)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이 은혜는 영원 전부터 예수님 안에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굉장히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12쪽).
이것은 우리를 불러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인과율(因果律)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대주재(大主宰)의 창조의지대로 아무도 저항할 수 없게 역사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런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 의지로 나타난 능력의 활동을 막을 힘은 세상에 도무지 없다. 그러므로 더러운 죄인도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이 능력의 도움을 바라볼 수 있다.
"우리의 행위로 하심이 아니요" 구원의 능력이 우리 인간의 연약한 행위에 따라서 운용(運用)된다면, 그것은 약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행위대로 운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나기도 전에 "그의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운용되고 있다. 곧, 그것은 1) 하나님의 뜻(목적)대로 역사하고 있으니 누구든지 그것을 변경시킬 수 없고, 2) 그것은 벌써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기로 결정된 대로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영원 전부터 예수님 안에서 주시기로 결정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영원 전부터 주신 것입니다. 주시기로 결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뜻하신 바를 변개(變改)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부름 받은 것에 대해서 큰 감사와 기쁨과 자부심을 갖고 교역에 임해야 합니다. 다 은혜로 된 것임을 알고 더욱 힘있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인해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영생의 은혜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은혜는 사망으로 망하지 않는 은혜이고 생명의 은혜이고 썩음, 즉 무덤에 갇히지 않고 부활할 은혜입니다.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바울은 자기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 복음은 영생의 복음, 부활의 복음, 사망을 이기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 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13쪽).
"선포자"는 복음 전파와 관련된 것을 가리키고, "사도"는 교회 설립에 기초 사역을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직분이고, "교사"는 계시되어 있는 진리(성경)를 해석하여 가르치는 자이다. 바울은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다방면의 사역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세우심을 입었노라" 그가 복음을 위한 자기의 사명을 세 가지로 언급한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사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한 것이다. 마귀는 복음을 듣는 자들의 믿음을 약화시키려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의 권위를 떨어뜨리려고 한다(Calvin).
박윤선 목사님의 말씀대로 마귀는 교역자의 권위를 떨어뜨리려고 발악합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복음을 위하여 세우심 받았음을 믿고 세우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굳게 의지해야 합니다. 복음 전도의 권위가 나에게 있지 않음을 항상 자각하여 아상(我象)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바울은 복음을 위한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습니다(11절).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 갇혀있는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은 부끄러운 고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기가 믿는 자를 알았기 때문입니다(οἶδα 완료시제). 바울은 우리 주님을 알았습니다. 우리 주님도 고난을 받으시되 부끄러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과 열정에 사로잡히심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바울은 이런 주님을 알았기 때문에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14쪽).
바울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주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주님을 잘 아는 것이 필요하다. 혹시 잘 알지 못하고 믿어진 것도 귀한 신앙이지만, 알아야 할 것을 알고서 믿는 믿음은 더욱 확신을 가지며 유력하다.
바울은 주 예수님께서 자기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의탁한 것은 바울의 생명, 또는 영혼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날"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14쪽). 바울의 생명은 영원히 보전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 생명을 지키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생명은 완벽하게 안전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역자들과 모든 신자들이 가지는 믿음입니다. 원수 마귀가 아무리 우리의 생명을 노리고 해치려고 한다 하더라도 그 모든 시도는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여 있기 때문입니다(삼상 25:29).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바울은 자기 생명을 그리스도께서 지키실 것을 확신하면서 디모데에게 바른 말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지키라"는 말(ἔχε)은 잘 가지고 있으라, 온전히 소유하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또한 "바른 말"은 건강한 말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전한 건전한 교훈을 뜻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디모데전서 6장 3절에서 설명해 놓았습니다. 이 교훈을 지킬 때에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 안에서 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14-615쪽).
우리가 이 점에 대하여 주의할 것은, 건전한 교훈을 보수하는 방법이 단순히 이론이나 논쟁에 있지 않고, "믿음과 사랑"을 소유함에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친히 복음을 옳게 믿고 또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면, 말을 적게 하여도 복음은 옳게 전파되며 변증된다.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전도자나 교역자는 이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첫째, 교역자 자신이 그 복음을 정말 바르게 믿고 있는가, 둘째, 복음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 이 두 가지를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사도 바울은 한 가지를 더 지키라고 합니다. 여기서 지키라는 말(φύλαξον)은 "간수하다, 보호하다, 준수하다, 잘 지켜보다(φυλάσσω)"라는 뜻입니다. 13절과 14절 모두 우리말로는 "지키라"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두 단어는 다른 단어입니다. 13절은 "가지다, 소유하다"라는 뜻이고 14절은 "지키다, 간수하다"라는 뜻입니다. 13절은 바른 말을 소유하고 있다는 측면이 강조되고 14절은 지키고 준수하는 측면이 강조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바울이 부탁한(위임한) 아름다운 것(τὴν καλὴν παραθήκην)을 "디모데가 받은 능력의 은사를 가리킨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15쪽).
방종하게 행하는 자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는 이 은사를 상실하기 쉽다. 그것은 지키기 어려우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키라고 부탁한다.
바울은 지키라고 합니다. 간수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빼앗기지 말고 잘 지키고 그것을 준수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박윤선 목사님은 은사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교역자로서 교회 안에서 어떻게 행할지를 가르쳐준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딤전 3:15). 즉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에서 어떻게 아름답게 교역을 해 나가야 할지를 가르치면서 디모데에게 교회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은사로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교회에서 아름답게 교역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님의 도우심과 은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역자는 주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사역이 아름다운 것임을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고생스럽기만한 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것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즉 바른 말을 잘 가지고 있어야 하고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버린 이 일을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앞에서 지키라고 한 두 가지, 즉 바른 말(13절)과 아름다운 것(14절)을 지키지 못한 사람의 예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과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듭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15쪽).
"아시아"라는 것은 소아시아를 말한다. "부겔로"와 "허모게네" 이 두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 내력을 알기 어렵다. 그들은 바울을 따르다가 중도에 배반하였다. 친교의 중도 파상은 처음부터 친교가 없었던 것만 못하다.
오네시보로의 집에
16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18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16절). 특별히 오네시보로와 그의 "집"에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하면서 그의 온 가족을 축복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말씀은 한 의인(義人)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축복받는 원칙을 보여준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15쪽).
오네시보로는 로마에 갇힌 바울을 부지런히 찾아와서 만났습니다(17절). 이것은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섬긴 것은 인간적인 정으로 섬긴 것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를 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네시보로의 선행에 대한 축복은 바울 개인을 섬긴 것에 대한 축복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것에 대한 축복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15-616쪽).
사도의 축복은 현세 본위(現世本位)가 아니고 내세 본위(來世本位)이다. 땅 위의 복은 잠깐 동안 있을 뿐이나 성도는 그것을 탐내지 않아야 된다.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음은 심판날에 주님의 사랑을 받음이니, 그것은 큰 복이다.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여기서 바울이 자기 개인의 사리(私利)를 본위하여 오네시보로의 봉사를 평가함이 아니다. 이것은 그의 봉사가 주님을 위한 사도의 복음적 사역에 유조(有助)했던 것을 귀하게 여긴 것뿐이다.
교역자는 사도 바울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교역자는 사적인 이익을 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교역자 개인에게 잘하는 것에 대해서 아상(我象)을 가지면 안 됩니다. 내가 뭔가 대단하고 특별해서 저 사람이 나에게 잘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교역자인 내가 말씀을 맡았기 때문에 저가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저가 나에게 잘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거기에 "개인으로서의 나"를 없애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공적인 나", 즉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나로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를 축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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