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4. 07:00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디모데후서
목차
디모데후서 2:1-13
찬송가 324장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은혜 가운데서 강하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바른 말을 잘 소유하고(1:13) 그에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준수하라(1:14)고 합니다. 바른 말을 소유할 때에는 다툼이나 논쟁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소유해야 합니다. 또한 아름다운 것을 준수할 때에는 성령님을 힘 입어서 준수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두 가지에서 떠난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1:15). 그러므로 이것은 교역자로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힘써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나의 아들아"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권위로 그리고 친근하게 부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버지로서 명령하는 것은 "강하라"는 것입니다. 강하라는 말(ἐνδυναμοῦ)은 헬라어 문법으로 중간태, 또는 수동태 명령형으로 쓰였습니다. 직역하자면 "강해져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자기가 자기를 강하게 하라는 의미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강하게 하시는 이를 힘 입으라는 의미입니다. 강하게 하시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언제든지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요 15:5).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강하게 하십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혈기로 강해져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17쪽).
기독신자는 신앙으로 강해야 된다. 그러나 그것은 혈기로 강함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혈기로 좇아 강한 자는 진리를 위하여 참되이 서지 않는다. 신자가 영적으로 강해야 죄와 마귀를 이길 수 있으며(엡 6:10-17), 또 주님을 위하여 고난도 받을 수 있다.
여기에 바울은 "너는"이라는 말(Σὺ)을 씁니다. 헬라어는 동사 안에 인칭대명사가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에 특별히 인칭대명사를 쓴 것은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앞에서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지키지 못하고 버리고 떠났다고 했는데(1:15) 디모데 "너는" 강해져서 그것을 굳게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세우는 교역자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많은 증인 앞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디모데에게 그것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위임하라고 합니다. 이런 위임은 시대를 거듭해서 일어나야 합니다(παράθου 부정과거 명령). 위임을 받은 충성된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이렇게 해서 복음이 계속 전해집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18쪽).
본절은 진리 곧, 복음을 계대 전승(繼代傳承)해야 될 것을 말한다. 진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기 때문에 새시대를 당하여도 부끄러워할 것 없고, 계속 그대로 전해진다.
"많은 증인 앞에서" 이것은 디모데의 전도내용이 확실히 바울에게 의존된 것임을 말해준다. 그가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은 사실은 "많은 증인"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다.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공적 사역이고 사적 영업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공중 앞에 인정된 인물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교역자는 복음의 공적인 성격을 잘 알아야 합니다. 잘 알고 사람을 세우는 것에도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복음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자꾸 세워서 복음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능력 있게 전파되게 해야 합니다. 여기에 "나"는 그저 하나님의 일꾼 중 하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 가짐은 교역자가 시기나 질투라는 악에 빠지지 않게 해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
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바울은 복음 전하는 교역자를 군인에 비유합니다. 군인은 쉬운 직업이 아닙니다. 고된 직업입니다. 고난이 바탕에 깔린 직업입니다. 바울은 교역자를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예수님을 위한 군인입니다. 그러므로 군인이 당하는 고난은 예수님의 뜻을 수행하느라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22쪽).
본절부터 6절까지는 교역자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그는 군인처럼 사사(私事)에 매이지 않고 고난을 감수해야 된다. 군인은 공익을 위하여 수난(κακοπαθέω)한다. 수난이란 것은 피동적으로 피해를 입음이다. 이것은 주로 대적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치명적인 고난에 빠짐이다. 참된 교역자는 진리를 위하여 굳게 서기 때문에 대적들을 만나며 고난을 받는다. 타협주의, 회피주의, 대세주의는 예수의 제자의 길이 아니다.
고난이 공로는 아니지만, 1) 인간은 고난을 받아야 겸손해진다. 사람은 우선 겸손해야 진리를 깨닫는다. 무디는 말하기를, 천국은 높지만 내려가면서야 배운다고 하였다. 2) 고난을 받아야 그의 신앙 인격이 연단을 받는다. 연단이 없는 자는 믿을 수 없고 소망도 없다. 연단이 소망을 낳는다(롬 5:4). 3) 교역자가 고난을 받지 않고는 교회를 보호하지 못한다. 교회는 계속 대적하는 자들의 침해를 받는다. 군인이 국방을 담당하고 있음과 같이, 교역자는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위험을 앞장서서 막아야 한다.
고난에 대한 가르침 중 세 번째는 특별히 교역자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군인이 국방을 위해서 고난을 감수하듯이 교역자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고난을 받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고난입니다.
병사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음
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군인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만약 군인이 자기 생활에 얽매인다면 그는 군인이 아닙니다. 군인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데 심지어 자기 생명도 아끼지 않습니다. 군인에게는 임무가 개인의 생명보다 우선합니다. 이처럼 교역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자기 생명을 우선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교역자는 자기를 교역자로 부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을 가장 우선에 둡니다. 이런에서 교역자는 군인에 비유됩니다.
법대로 경기하는 자
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바울은 교역자를 경기하는 자에 비유합니다. 경기하는 자는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각자의 트랙을 달려야 하는 달리기 선수는 트랙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레슬링 선수는 상대를 주먹이나 무릎이나 팔꿈치로 타격하는 기술을 써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경기마다 규칙이 있습니다. 그 규칙을 어기면 실격처리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규칙을 어기면서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교역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역자도 규칙을 준수해야 합니다. 교역자가 준수해야 하는 규칙은 1-2절에 나오는 말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교역자는 먼저 은혜 안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강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힘입어야 합니다.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또한 교역자는 공적인 사역을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자기 본위로 사역하지 말고 예수님 중심으로 사역을 감당하면서 자꾸 복음 사역을 위임해서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교역자는 면류관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는 농부
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바울은 마지막으로 교역자를 수고하는 농부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수고하다라는 말(κοπιάω)은 온 힘을 다 해서 일한다는 뜻입니다. 아주 고생스러운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농부는 작물을 기르느라 밤낮 쉬지 않고 수고합니다. 새벽부터 나가서 해가 질 때까지 밭에서 일합니다. 이 일은 아주 고생스러운 일이지만 추수할 때에 농부는 큰 보람을 느낍니다. 아주 잘 익은 곡식을 거둘 때에 농부는 자기의 고생을 잊어버립니다. 자기의 수고가 고스란히 잘 익은 곡식이라는 열매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역자는 복음 사역을 감당하면서 수고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듯이 복음을 선포하고 작물을 돌보듯이 성도들을 보살핍니다. 그렇게 해서 거두는 열매는 교역자의 눈에 가장 먼저 보입니다. 그로 인해서 교역자는 고생한 보람을 느낍니다. 이 보람과 기쁨은 마치 세례 요한이 말했던 신랑의 친구의 기쁨과 같습니다(요 3:29).
생각해 보라
7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역자에 대해서 세 가지 비유로 가르쳤습니다. 첫째는 병사이고 둘째는 경기하는 자이고 셋째는 수고하는 농부입니다. 이러한 비유는 그 의미가 깊어서 바로 그것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가해 보라"라고 합니다.
교역자가 성경 말씀을 대할 때에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교역자는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지고 생각하고 선배들이 남겨 놓은 여러 해석을 가지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는 우리 주님, 예수님께 총명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총명을 주셔서 깨닫게 하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리델보스를 인용하면서 바울이 생각하라고 한 것은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로 제자들을 가르치신 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9)라고 하신 것과 같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25쪽).
내가 전한 복음
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바울은 생각하라고 한 다음 "기억하라"라고 합니다. 여기 기억하라는 말(Μνημόνευε)은 현재시제로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는 것을 계속하라는 의미입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 비유한 것을 깨닫기 위해서 생각해야 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할 때에는 복음대로 기억해야 합니다. 참된 복음은 성경 전체와 조화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반대로 다른 복음은 성경을 무시합니다.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도의 권위로 전한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이 복음은 구약 성경을 잘 알고 바르게 해석한 사람으로서 전한 복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다윗의 씨"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그 분,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너의 씨가 나의 집을 세울 것이라고 하셨던 그 씨라는 것입니다(삼하 7:12-13).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하실 성전을 건축하신 놀라운 일입니다(요 2:19-22). 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영원한 복과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한 구절에 바울은 복음의 깊은 의미를 다 담아서 전하고 있습니다. 교역자는 이 복음을 깊이 알되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기억하면서 성경 전체를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맏았으나
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복음은 복된 소식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울은 복음 때문에 죄인과 같이 매였습니다. 죄인과 같이 매였지만 바울은 복음의 내용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빌 4:4). 또한 바울은 자기 몸은 매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경험했습니다(빌 1:18).
모든 것을 참음은
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매인 것까지도 참는 이유는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즉 믿지 않던 이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받게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위해서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병사로 복무하는 자의 태도요, 경기하는 자의 태도요, 수고하는 농부의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역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는 항상 미쁘시니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11절은 "미쁘다 이 말이여"라고 시작합니다. 그 다음 나오는 말이 전적으로 믿을만 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라는 말은 미쁜 말입니다. 믿을만 한 말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사느냐?" 라고 누가 묻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고난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들어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웁니다. 그리고 실제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심에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들의 죽음에 당신님의 죽음을 묶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든 신자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믿는 자들의 죽음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신자는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 연합 안에서 신자는 참습니다(12절).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참으신 것처럼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참습니다. 때때로 다가오는 고난을 참습니다. 믿음의 시험도 참습니다. 참으면 소망이 생기는데 그 소망은 우리 주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 하리라는 소망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시험이 올 때 주님을 부인한다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신다고 합니다(12절 하). 이 말씀은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두렵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신자들이 핍박을 두려워해서 주님을 아주 떠나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울의 마음이 13절에 나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습니다. 즉,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면 그것은 우리가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항상 미쁘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핍박이 와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붙드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언제나 미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믿을 수 없지만 주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와 연합해 계신 주님,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고 사랑하면 됩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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