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5. 07:00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디모데후서
목차
디모데후서 2:14-26
찬송가 546장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 서
교역자에 대한 권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강하라고 권면합니다(2:1). 문법을 감안해서 해석하자면 이 강하라는 명령은 스스로 강하게 하라는 명령이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으라는 명령입니다. 교역자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강해야 예수님의 좋은 병사로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2:3). 또한 경기하는 자로서 법대로 경기할 수 있습니다(2:5). 마지막으로 수고하는 농부로서 곡식을 먼저 받을 수 있습니다(2:6). 교역자는 또한 성경 전체를 잘 알고 구원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2:8). 그렇게 해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줄 믿기 때문입니다(2:11).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는데 이르지 않을 것은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기 때문입니다(2:12-13). 이렇게 권면한 바울은 다음 권면을 이어갑니다.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14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14절에는 "그들"이 나옵니다. 여기서 그들은 2절에 나오는 "충성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디모데가 바울에게서 들은 복음을 위임하여 세울 사람들입니다. 디모데는 복음 사역자를 세우는 일도 감당해야 합니다. 복음 사역자를 세울 때에는 "이 일"을 기억하게 해야 합니다. 여기서 "이 일"은 11-13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즉 주님과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과 참으면 함께 왕 노릇 할 것입니다(11-12절).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님은 항상 미쁘시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여 어떤 핍박도 두려워하지 말 것(13절)입니다. 교역자는 이 세 가지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엄히 명하라
또한 디모데는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해야 합니다. 여기서 엄히 명한다는 말(διαμαρτύρομαι)은 엄숙하게 증언한다는 뜻입니다. 또는 어떤 이에게 진리와 명령을 부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엄히 명해야 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진리를 전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엄히 명해야 할 것은 "말다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역자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말과 행동 메시지로 전해지는데 특별히 말에 담긴 메시지로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말이 많을 수 있기 때문에 말로 다투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항상 말다툼을 피하려는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교역자가 말다툼을 피해야 하는 이유는 말다툼에는 그 어떤 유익도 없기 때문입니다. 유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말다툼은 그것을 듣는 사람들을 망하게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칼빈을 인용하면서 "곧, 언쟁은 약한 신자들의 마음으로 하여금 뒤숭숭하게 하고 믿음을 잃게 한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30쪽).
말다툼의 시대적 배경
그리스-로마는 수사학이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수사학이나 변증이나 논쟁 기술을 크게 가치있게 여겼습니다. 당시에는 공공장소에서 각종 철학 사상이나 신학을 가지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육의 한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논점 없는 논쟁을 배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파를 조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다툼은 복음의 분명한 메시지로부터 멀어지게 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말싸움을 해서 이기는 것이 지적인 우위를 나타내는 것이었고 잘 교육 받았다는 증거가 되었지만 교회는 신앙 고백의 일치와 일치된 믿음을 전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유익한 논쟁과 무익한 논쟁
논쟁은 논점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교리를 날카롭게 합니다. 바른 교훈과 다른 교훈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도 바울이 금하는 것은 모든 논쟁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사람을 드러내는 논쟁을 금하는 것입니다. 복음 진리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서신 여러 곳에서 그것을 잘 드러내면서 다른 교훈을 배격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논쟁은 유익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님보다 자기 자신에게 향하게 하는 논쟁은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합니다. 교역자는 어떤 교리를 잘 드러낼 때 그것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사람에게 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교역자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해야 합니다. 이 말(ὀρθοτομέω)은 정확하게 자르라는 뜻입니다. 당시 이 말은 석공이 돌을 들어갈 자리에 딱 맞게 자른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진리와 비진리를 정확하게 분별한다는 뜻임과 동시에 말씀을 전할 때 상황에 딱 맞게 복음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꾼은 그가 맡은 일의 성과로 인정을 받습니다. 만약에 어떤 일꾼이 일을 엉망으로 해 놓는다면 그것은 그 일꾼의 명예를 실추시킵니다. 그 일꾼을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역자에게도 해당됩니다. 교역자가 진리의 말씀을 정확하게 그리고 딱 맞게 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인정된 자로
인정된 자에서 인정되다라는 말(δόκιμος)은 시험을 거쳐서 합격했다는 뜻입니다. 일꾼에게 일을 맡겨 보고 나서 너는 그 일에 적합하구나, 이렇게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교역자는 교역하는 일에 딱 맞는 사람으로 인정이 되어야 합니다. 맞지 않으면서 그 일을 계속해 나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만약 교역자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는 그 일에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한 일의 열매는 그 사람을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교역자는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별하고 그 진리를 딱 맞게 전해서 교역의 일에 적합하다는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인정을 받은 다음에는 그런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를 힘써야 합니다. 교역자는 하나님 앞에서 일하며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31쪽).
교역자의 소행은 하나님 앞에까지 도달해야 한다. 그것이 교역자의 모든 하는 일의 목적이다. 교역자가 아무리 교회 앞에서는 환영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의 덕행이 사람 세계에서 그리고 하나님께 상달되기까지 진실하지 못하고 신령하지 못하다면 그는 교역자로서 부족하다. 하나님께 상달되는 선한 생활은 신령해야 된다. 즉, 그것은 보이지 않는 방면에서 진실하며 힘써 기도하는 생활을 통하여 헌신되어야 한다.
참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항상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를 힘써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자기만의 은밀한 만남, 즉 기도 생활로 이루어집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바울은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망령되다는 말(βέβηλος)의 뜻은 "하나님을 배제한"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말,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말을 가리킵니다. 헛된 말(κενοφωνία)은 "속이 빈 소리"라는 뜻입니다. 아기가 옹알이를 할 때 특별히 어떤 뜻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리는 나는데 그 안에 어떤 특별한 뜻이 담겨있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이가 말을 하는데 겉보기에 굉장히 화려합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면 그 내용이 없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나 진리가 담겨있지 않습니다. 그런 말이 바로 헛된 말입니다. 교역자는 이런 말들, 즉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려야 합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하는 사람은 경건하지 아니함(ἀσεβείας)에 점점 나아갑니다. 즉, 하나님을 점점 무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경건의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자기의 의만 점점 자라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 속에 온통 자기만 꽉 차 있습니다. 반면 진리의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욱 간절해지게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식하면서 살게 합니다.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
17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망령되고 헛된 말이 마치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다고 합니다. 악성 종양으로 번역된 말(γάγγραινα)은 원래 의학 용어입니다. 이것은 외상으로 인한 상처나 감염에 의해서 걸리는 것인데 이것에 걸리면 조직이 괴사합니다. 즉 그 조직이 감당했던 기능과 생명을 잃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망령되고 헛된 말은 생명을 괴사시킵니다. 잘 돌아가던 조직을 멈추게 하고 썩게 합니다. 바울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으로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듭니다. 후메내오는 디모데전서 1장 20절에 등장한 바 있습니다.
교역자는 이들이 하는 말의 특징을 잘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망령된 말입니다. 즉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배제하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은 헛된 말입니다.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진리가 그 속에 담겨 있지 않은 말입니다. 셋째, 이 말의 결과는 생명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잘 돌아가던 조직을 괴사시킵니다. 교역자는 스스로를 돌아보아 자기가 맺는 열매가 이와 같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망령되고 헛된 말은 진리가 아닌 것, 즉 틀린 것을 가르칩니다.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가르침입니다.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리게 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가르침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35쪽).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라고 하는 이단설은 신자의 소망인 몸의 부활을 부인하고 다만 부활을 영적으로 설명해 버림이었다. 곧, 그들은 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되는 것을 부활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Dr. C. Bouma). 그 의미에서 그들은 부활은 벌써 지나간 것이고 앞에 바라볼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이단에 대하여 사도 직후의 교부 저스틴도 반박한 일이 있고(Apol. 26, 4), 이레네오도 비평하였다(Adv. Haer., I, 23, 5).
이 가르침은 현대 그리스도인들과 교역자들이 유념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현대 교회는 말로는 부활을 전하지만 실제로는 부활에 대해서 등한시 합니다. 부활을 열렬하게 소망하지 않습니다. 중생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부활을 중생처럼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믿음을 점점 식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
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린다고 하여 하나님의 견고한 터까지 부실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이미 서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35쪽).
이 말은 하나님의 교회가 그의 선택의 은혜로 확립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단으로 인하여 멸망하는 자들이 많으나, 진정한 성도들, 곧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에 들어 있는 자들은 언제나 견고히 구원에 참여되어 떨어지지 않는다.
바울은 이것을 "인침이 있어"라고 합니다. 인쳤다는 것은 소유를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소유를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아십니다. 아신다는 것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35쪽).
"아신다"라고 함은 그가 택하신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그의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여 주신 사실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라고 부탁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백성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안에 있는 백성입니다. 즉 택하시고 소유로 삼으신 백성인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은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격적인 관계 안에 있는 백성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백성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백성입니다. 그런 백성은 순종하기 마련입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라고 말씀하실 때에 떠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안에 들지 않은 백성은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막상 하나님의 뜻은 행하지 않습니다(마 7:21). 이들은 여전히 불의 안에 거하면서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합니다.
그릇 비유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바울은 교회를 집에 비유합니다. 특별히 큰 집이라고 합니다. 큰 집, 즉 식구가 많은 집에는 그릇이 많습니다. 그 그릇들 중에는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36쪽).
"금 그릇과 은 그릇"은 많은 재능을 받은 신자들을 가리키고, "나무 그릇과 질그릇"은 받은 재능이 빈약한 신자들을 가리킨다. "귀하게 쓰는 것"은 성결한 인격으로 봉사하는 자이다. 그리고 "천하게 쓰는 것"이란 말은 개역하면 "부끄럽게 쓰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거짓 스승을 가리킨다.
교역자는 혹시 내가 천하게 쓰는 그릇은 아닌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천하게 쓰이는 것은 부끄럽게 쓰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도 맞고 쓰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선을 이루시는 것도 맞지만 그것이 당사자에게는 부끄러운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부끄럽게 쓰이는 그릇은 자기가 그렇게 쓰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안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교역자는 항상 자기를 돌아보아 부끄럽게 쓰이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하는데, 그 점검이라는 것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여기서 "이런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문맥상 "말다툼(14절)"이 될 수도 있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15절). 또한 망령되고 헛된 말일 수도 있습니다(16절).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이단적인 가르침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18절).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말이 다른 교훈, 또는 다른 복음입니다. 교역자는 성경 말씀을 잘 알고 진리만을 전해야 합니다. 참된 복음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자기를 죄에서 정결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ἑαυτὸν)를 자기 죄에서 정결하게 할 수 없습니다. 죄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권적으로 속량해 주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죄를 정결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주의 이름을 진실되게 부른다는 의미(19절)입니다. 주님을 힘입는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복음은 예수님 말고 다른 것도 의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전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고 합니다. 귀히 쓰는 그릇은 거룩합니다. 즉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히 속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자기의 소속을 확실하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언제든지 주님께서 쓰시기 좋게 잘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쓰심에 합당하여"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그것은 "모든 선한 일에 준비"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데 하자가 많으면 그런 그릇은 선한 일에는 쓸 수 없습니다. 하자가 많으면 많은 대로 쓰이는 곳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 쓰이는 곳은 바로 부끄러운 곳입니다. 선한 일에는 하자가 없는 그릇이 쓰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자가 없다는 것은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온전히 속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즉각 실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합니다. 청년의 정욕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36쪽).
"청년의 정욕"이란 말은 청년의 마음에 일어나기 쉬운 감정적 충동과 지나치게 따거운 열정 같은 것을 가리키고, 색욕(色慾)을 말함이 아니라는 해석이 있다. 이 해석이 타당한 듯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곧, 바울이 그 아래에 "깨끗한 마음"이란 말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21절 상반절에 나온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란 말과 관련된 것이다.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이단에 감염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문맥에서 청년 디모데의 "정욕"이란 것은 이단과 싸우느라고 그의 마음에 일어날 수 있는 혈기나 말다툼의 감정적 충동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전에도 디모데에게 성도덕(性道德) 관련으로 말한 바 있으니(딤전 5:2 하반), 여기서 그것이 아주 제외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옳은 말씀입니다. 교역자는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이단에 넘어가는 사람들 중에서 청년이 많다는 것을 생각할 때 박윤선 목사님의 해석은 탁월합니다. 그렇다면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른다는 것은 주를 부를 때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벗어나지 않은 마음으로 부른다는 뜻입니다. 또한 자기의 정욕을 위하는 마음이 아니고 오직 주님께 순종하려고 준비되어 있는 마음으로 부른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합니다. 이것들은 거짓 복음, 다른 복음, 다른 교훈과 정반대되는 것들입니다. 또한 말다툼이나 망령되고 헛된 말과도 정반대의 것들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뜻에 정확하게 합하다는 것이고 믿음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고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화평은 하나님과 화목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과의 관계안에 있어야 하는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이 파생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
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박윤선 목사님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이단자들이 사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37쪽).
이런 변론은 이단자들이 사용하는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아는 듯이 교만하게 언쟁을 일삼는다. 그러나 그들이 유일한 진리인 복음에서 탈선한 것인 만큼, 무지한 자임을 면치 못한다.
참된 교역자는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변론을 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버립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자기 자신을 변호하거나 높이는 변론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변론입니다.
주의 종은
24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않습니다. "마땅히"라는 말(δεῖ)은 필연을 나타냅니다. 즉 필연적으로 다툼을 피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종은 주님을 따라갑니다. 주님은 다투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또한 주의 종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주의 종은 자기의 힘으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信賴)함으로 모든 일에 대처하기 때문에 그는 무언 중에 주님을 바라보며 온유하게 처신한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37쪽).
가르치기를 잘하며
또한 주의 종은 "가르치기를" 잘합니다. 이것과 "참으며"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37쪽).
"가르치기를 잘하며" 복음을 맡은 교역자는 혀로써 많은 일을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교수(敎授)의 재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재능은 자연 은총(自然恩寵)으로 재능을 받은 자로서 성경 지식의 풍부와 성령 감화의 은혜로 말미암아 소유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재능을 소유한 자도 덕을 세우는 인격이 있어야 그 재능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다. "참으며"라는 말(ἀνεξίκακον)은 악인에 대하여 잘 참아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다음 귀절에 있는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으로 나온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주의 종은 거역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훈계합니다(25절). 여기서 거역하는 자는 주의 종 개인이라는 사람의 뜻을 반대하는 자가 아닙니다. 주의 종 개인의 뜻은 반대할 수도 있고 찬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의 종"이라는 기관, 즉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때, 그의 뜻을 거역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주의 종이라고 할 때 교역자가 자기를 무조건 주님 편에 속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역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의 종"이라는 신분은 주님을 온전히 따르고 순종한다는 합당한 위치에 있을 때에만 작동합니다. 자기 의견을 거역한다고 해서 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음
주의 종은 온유함으로 훈계할 따름이고 그가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여기 진리를 알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이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안심합니다. 조급히 덤비거나 분노하지 않습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38쪽). 그러므로 혈기를 내는 교역자는 자격이 미달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회개의 열매
하나님께서 진리를 알게 하시면 깨어나게 됩니다(26절). 어둡던 심령이 깨어서 눈을 뜨고 밝히 보게 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26절을 주석하면서 회개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38-639쪽).
이 귀절은 윗절의 계속으로서 회개의 열매 중 다른 세 가지를 진술한다. 1)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남. 2)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됨. 3)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고 힘씀이다.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남"은 진리를 거역하던 자들이 이제부터 그 잘못을 깨닫고 어두움에서 벗어져 나옴을 가리킨다. 인간이 회개하여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여(요 3:19), 그 가운데서 살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마귀의 올무에 걸려 저놈의 종이 된 불행이다. 그러나 이제 그가 회개하면, 진리를 아는 동시에 그 불행에서 떠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다. 그 때에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행복에 이른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깨어납니다. 깨어나서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납니다. 이전에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사로잡힙니다. 놀라운 반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뜻을 따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둠에 빠졌던 사람에게 회개함을 주셨을 때에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누구를 훈계하든지 온유함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이 혹시 거짓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면서 시시때때로 하나님께서 회개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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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 디모데후서 3장 1-9절 | 고통하는 때에 성행하는 19가지 악덕들 (4) | 2024.11.16 |
매일성경 | 디모데후서 2장 1-13절 |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 병사와 경기하는 자와 농부 (5) | 2024.11.14 |
매일성경 | 디모데후서 1장 9-18절 |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2) | 2024.11.13 |
매일성경 | 디모데후서 1장 1-8절 |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 (4) | 2024.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