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디모데후서 1장 1-8절 |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

2024. 11. 12. 07:00성서유니온 매일성경/디모데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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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디모데후서 1:1-8

    찬송가 196장 성령의 은사를


    디모데후서 기록연대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두 번째 편지입니다. 이 두 번째 편지는 주후 66-67년 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때는 바울이 네로 황제 치하에 다시 체포되었던 때입니다. 당시 바울은 순교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바울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바울 사도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바울 사도

    1절은 바울(Παῦλος)로 시작합니다. 바울 다음에 나오는 단어는 사도(ἀπόστολος)입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사도인가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입니다. 바울을 보내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여기서는 예수라는 이름 앞에 그리스도를 썼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 직분을 나타내는 호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즉 왕이자, 제사장이자, 선지자로서 바울을 보내신 분이십니다. 바울을 보내신 목적은 "예수" 즉 구원하시려고 보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사도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에 순종하시는데 그 순종은 예수님께서 원하셔서 하시는 순종입니다. 즉 예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가 일치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화되면서 점점 삼위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원해서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인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십니다(요 14:6). 즉 예수님은 그 생명, 즉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생명이십니다. 사도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서 이 생명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직분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04쪽). 

    주님을 위해 옥중에서 수난(受難)하면서 영광의 죽음을 내다보는 바울은 여기서도 사후(死後)의 생명을 사모한다. 그리고 "생명의 약속"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영생을 주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의미한다(갈 3:14, 16). 이제 신약시대에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전파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세우셨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2절의 시작 단어는 디모데에게(Τιμοθέῳ)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합니다. 디모데는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여기서 아들이라는 것은 믿음으로 낳았다는 의미에서의 아들이기도 하고 바울의 복음 사역을 물려 받아 감당하는 사람으로서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이 편지는 디모데 개인에게 보낸 것이지만, 실상 목회에 관한 교훈이므로 교회를 위한 공적서신(公的書信)이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604쪽).

     

    바울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기원합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은헤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참된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다, 긍휼에 풍성하시다"라고 할 때 이것은 우리 주 예수님 안에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평강은 세상에서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과 아드님이신 예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감사와 기도

    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리는 사람은 감사합니다. 바울은 "감사를 내가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Χάριν ἔχω τῷ Θεῷ)"로 3절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시냐면 바울이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섬기다라는 말(λατρεύω)은 예배의 맥락에서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조상적부터 하나님을 예배한 대로 자기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구약 전통을 계승하여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는 청결한 양심으로 예배한다고 하여 거짓이 없이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와 같이(ὡς) 쉬지 않고 디모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ἔχω τὴν περὶ σοῦ μνείαν 현재시제). 언제, 어떻게 생각을 하냐면 밤낮 기도하는 가운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기도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주석, 605쪽). 

    바울의 서신들은 거의 다 기도하는 문구로 시작하였으니, 그것을 보아서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음이 알려진다. 그가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다고 한 것은, 규례를 따라 일정한 시간에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겸하여 심령으로도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너 보기를 원함은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은 디모데 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디모데의 눈물을 떠올립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05쪽). 

    "네 눈물"은 디모데가 바울을 작별할 때 흘린 눈물을 말한다. 행 20:37 참조. 그가 바울을 사랑하며 사모한 이유는 바울의 위대한 신앙 인격 때문이었겠다. 그러므로 그의 눈물은 육정(肉情)보다 영적 간절성에서 흘린 것이다. 

     

    디모데가 가지고 있던 이런 영적 간절성을 바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간절함으로 바울은 디모데를 보기 원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친구끼리도 헤어졌다고 만나면 기쁜 법인데 영적으로 사모하던 사람이 만나면 얼마나 더 기쁠 것인가라는 취지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06쪽). 

    친구끼리 헤어졌다가 만나면 기쁨이 있는 법이다. 공자(孔子)도 말하기를 "친구가 멀리서 오면 기쁘지 않으라!"(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하였다. 그보다도, 두 사람이 영적 인연으로 서로 사모하던 차에 만나면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성도가 영적 희열(靈的喜悅)을 원함은, 자기의 직분적 유쾌를 위함보다 주님을 향한 그의 생활을, 1) 활기 있게 또는 힘 있게 하려 함과, 2) 주님께 감사함이 더하여지게 하려 함이다(약 5:13). 

     

    우리는 이런 영적인 희열을 교회에서 맛봅니다. 매주 보는 얼굴들이지만 그 얼굴을 보면서 영적인 교제를 나눔으로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의미에서도 성도들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속에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바울은 디모데의 속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을 기억하면서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여기 "속에"라는 말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06쪽).

    여기 "속에"(ἐν)란 말이 세 번 나왔는데 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믿음은 외식과 형식으로 유지될 수 없고 내실주의(內實主義)에 의하여 참으로 존속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거짓이 없는"과 신앙교육

    여기서 "거짓이 없는"이란 말(ἀνυποκρίτου)은 "외식이 없는, 연기하지 않는"이라는 뜻입니다. 디모데의 믿음은 꾸미고 가장하는 믿음이 아니고 진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디모데의 외할머니와 어머니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여인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06쪽). 

    이 두 여자에 대한 저자의 자세한 지식은 그가 확실히 사도 바울인 사실을 입증한다(H. Ridderbos). 행 16:1-3; 딤후 3:15 참조. 그리고 이 귀절은, 자손에게 신앙을 전함에 있어서 가정교육이 얼마나 큰 효과가 있는가를 암시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자녀에게 감화를 끼칠 수 있는 성격과 기회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디모데의 외조모와 모친은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실시함에 있어서 모본이었다. 본절도 역시 신앙의 역사적 또는 전통적 성격을 보여준다.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과 위기 신학은 일정한 전통을 반대하니 잘못이고 그것이 바울 신학과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6절의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원어를 직역하면 "이런 이유로 인해서"입니다. 어떤 이유냐면 디모데에게 있는 믿음이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는 이유입니다. 그 거짓이 없는 믿음은 어머니와 외할머니에게서 전수 받은 전통이 있는 믿음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생각나게 하고 있다(ἀναμιμνῄσκω)고 합니다. 디모데가 다시 기억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디모데에게 진정한 신앙이 있으므로 바울은 그를 권면할 용기를 가진다. 소망 없는 인물에겐 권면이 거의 불필요하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08쪽). 맞는 말씀입니다. 권면은 진정한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해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다시 기억하도록 하려는 목적은 디모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09쪽).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란 것은 영력(靈力)을 가리킨다. 곧, 그것은 디모데가 노회에서 안수를 받을 때(딤전 4:14)에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받은 은혜(성직을 이행할 수 있게 하는 영력)이다. "불일듯하게"라는 것은 이미 받은 은사를 힘써 사용함으로 그것이 장성하고 또 유력해짐을 가리킨다. 딤전 3:13 하반 참조. 교역자는 직무를 행하지 않는 때에 그 영력도 쇠퇴한다. 그 영력의 장성 여부는 남들을 위하여 힘써 바르게 일하는 여부에 달려 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를 하여 디모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려는 이유는 디모데로 하여금 교역의 일에 더욱 힘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안수한다는 것은 은혜를 전달한다는 의미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칼빈을 인용하면서 "사도시대에는 사도들이 행한 이런 의식(儀式)을 통하여 성령의 기적적인 은혜가 임하였으나 사도 이후에도 그런 기적적인 은혜가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Calvin,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IV, 19:6)"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09쪽).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요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교역자는 사역을 감당할 때 두려운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두려운 마음은 하나님의 은사가 다시 불일듯 일어나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사가 불일듯 일어나야 합니다. 즉 영력이 장성하고 유력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운 마음이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교역자가 두려워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신 것이 아니고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이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영이라는 뜻의 단어(πνεῦμα)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11쪽). 

    "영"은 성령의 은혜를 가리키는데, 디모데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받은 것이라고(H. Ridderbos) 한다(롬 8:15).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일꾼이 받은 특별한 은사라고 해야 된다(Calvin). 이 "영"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영"이라고 한다. 공포심은 무식이나 겁약한 기질(氣質)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을 아는 자는 적어도 지식적으로라도 인생문제의 근본을 안다.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죽음 문제도 그는 해결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도 능력을 받기 전에는 고난을 당할 때에 당황한다. 그러나 그가 능력을 받으면 문제는 달라진다. 설혹 그가 기질상으로 겁약하다 할지라도 진리지식과 성령님의 도우심에 의하여 그것을 이길 수 있다. 요 16:33 참조. 

     

    하나님께서는 교역자에게 "영"을 주십니다. 영을 주셔서 사역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교역자는 이것을 알고 하나님께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영을 받기를 구해야 합니다.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영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11쪽). 

    "능력과 사랑과 절제" 이 세 가지 덕(德)은 신자들(특히 교역자들)로 하여금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은사이다. "능력"은 성령님이 주시는 담대하고 또 견고한 힘이다. 그리고 "사랑"은 성령님의 열매이니, 이것이 있어서 희생할 마음이 있고, 겁약해지지도 않는다(요일 4:18). "절제"(σωφρονισμοῦ)는 마음 속의 생각을 조절하여 흥분하지 않고 놀라지 않고 욕심에 끌리지도 않는 영적 절제력(節制力)이다. 

     

    이 세 가지는 두려워하는 영과 정반대의 것입니다. 교역자는 두려운 마음이 들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영인 줄을 믿고 다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

    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두려워하는 영을 받은 것이 아님을 깨달은 교역자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영으로 고난을 마다하지 않게 됩니다. 이 고난은 복음을 위하여(τῷ εὐαγγελίῳ) 받는 고난입니다. 고난을 받는다고 할 때 보통은 "약하니까 고난을 받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반대입니다.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서 받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δύναμιν)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능력이라는 말(δύναμις)은 물리적인 힘, 파워, 능력, 기량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이너마이트가 이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폭발적인 권능을 힘입어야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고난을 받는 사람은 약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고난을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이런 명령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서, 특별히 깊은 영적인 교제 가운데 있는 관계에서만 할 수 있는 명령입니다. 바울이 고난을 받으라고 명령할 수 있는 이유는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은 것을 디모데가 보았고 함께 고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받으라는 명령 앞에는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권면이 먼저 나옵니다. 디모데가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이 주를 증언하였다는 것과 주를 위하여 갇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증언하는 일 안에는 주님의 길, 즉 고난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포함됩니다. 이것은 수치와 고통의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그러나 교역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길을 가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끄러운 길이 아니고 영광의 길임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구하여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길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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