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9. 07:00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디모데후서
목차
디모데후서 4:9-22
찬송가 447장 이 세상 끝날 까지
바울의 개인적인 이야기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딤전 1:18; 6:12). 디모데전서 1장 18절에서는 이단자들과의 싸움을 가리키고 6장 12절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 즉 믿음의 경주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믿음의 경주에 분투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이유는 바울이 그러한 선한 싸움을 싸웠기 때문입니다(4:9).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 마지막 결승점을 통과하면서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4:8). 이 면류관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예비된 것입니다(4:8 하).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는 것은 디모데에게 정말 좋은 것이 예비되어 있다는 의미로 그렇게 명령한 것입니다. 교회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디모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디모데에게 권면한 바울은 자기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58쪽).
이 부분에서는 여러 가지 인물 평가와 부탁과 전망을 말한다. 바울의 인물 평가는 주님을 중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독자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그리고 부탁과 전망도 모두 뜻 깊은 영적 교훈을 준다.
어서 속히 오라 내게로 오라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서 속히" 자기에게로 오라고 합니다. "어서 속히"라는 말에서 바울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느껴집니다. 바울은 지금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직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 안에서 느끼는 감각입니다. 그는 이제 순교를 앞두고 있는데 언제 순교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에게 "어서 속히"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58쪽).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그 있는 곳에서 급히 "오라"라고 부탁한다. 그것은 자기 개인의 사욕을 위한 명령이 아니고, 주로 교회를 위한 유익한 상담(相談) 때문이었겠다. 또한 디모데의 내방(來訪)은 바울의 옥고(獄苦)에 대한 위안으로서도 필요하였겠다. 우리가 이 점에서도 기억할 것은, 바울이 사도(使徒)로서 받는 위안이 역시 교회의 유익 때문이라는 것이다(고후 1:3, 6).
이렇게 교역자들의 만남은 교회의 유익이 됩니다. 특별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도를 위로하고 돌보는 것은 교회 전체에 유익이 된다고 합니다. 교역자가 사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교역자가 사역 현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어떤 돌파구를 찾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 다른 교역자와 대화하는 중에 지혜가 생기고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들의 정기적 만남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권장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노회는 이런 순기능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데마는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0절 서두에는 그러므로(γάρ)가 나옵니다. 즉, 10절은 9절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한 이유는 바울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거의 다 떠났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서 1장 24절에서 바울은 데마를 "나의 동역자"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씁니다.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이 말은 이들이 바울과 함께 빌레몬에게 문안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바울의 동역자로 바울과 함께 있었던 데마는 바울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칼빈을 인용하면서 데마가 바울을 떠난 것이 그의 배교를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주석합니다. 그러므로 데마가 바울을 떠난 것은 배교는 아니었지만 바울을 낙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여
특별히 바울은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씁니다.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세상이라고 번역된 말(αἰών)은 문자적으로는 시대, 또는 세대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데마가 현세, 즉 지금 이 시대를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에 나오는 세상, 즉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할 때의 세상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요한일서의 세상(κόσμον)은 하나님을 배제하는 세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이라는 의미이지만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라고 할 때 "이 세상"은 지금 시대(νῦν αἰῶνα)를 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죽음을 염두에 두고 순교로 나아가면서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세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데마는 아직 이 세상, 즉 지금 살고 있는 현세를 사랑하고 붙들고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데마는 바울을 버리고 떠나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이 말한 대로 이것을 배교라고까지 할 수는 없습니다. 2세기 후반에 기록된 "바울 행적"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데마를 바울의 원수라고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그것을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58-659쪽).
그리스게와 디도
그리스게는 갈라디아로 가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는데 왜 갔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도 데마처럼 바울을 "버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10절은 동사가 하나 나옵니다. 즉, "버리다" 하나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동사는 데마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게와 디도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여기 버리다라는 말(ἐγκαταλείπω)은 부정적인 뉘앙스의 말입니다. 이 말은 신뢰 관계에 있는 사람, 특별히 어떤 책임 관계에 있는 사람을 져버린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뉘앙스로 볼 때, 데마와 그리스게와 디도가 바울을 두고 다른 곳으로 간 것에 대해서 바울은 버림 받은 것 같은 심적 고통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 주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누가
그렇다고 바울이 혼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누가는 끝까지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11절). 누가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59쪽).
골 4:14; 몬 1:24 참조. "누가"라는 사람은 바울과 깊은 인연이 있다. 그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에 동반하였고(행 16:10), 그 뒤에 바울과 함께 아시아에 갔고(행 20:6), 또한 예루살렘에도 같이 갔다(행 21:15). 그 후에 바울이 가이사랴 옥에 갇혔을 때에와 로마옥에 갇혔을 때에 그도 함께 있었다(행 24:23; 28:16)(Ellicott).
마가
바울은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했는데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어쩌면 디모데는 마가와 근거리에 있거나 동역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마가와 함께 와도 속히 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마가도 데리고 오라고 하면서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라고 씁니다. 마가는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에 동행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중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행 13:13). 바울과 바나바는 제1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와서 다시 전도여행을 계획하면서 마가를 데려가는 일로 심히 다투어 갈라섰습니다(행 15:37-40). 이때 바울은 마가 데려가기를 심하게 반대했었습니다. 그랬던 바울이 마가에 대해서 다르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사람에 대한 평가는 바뀔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마가를 전도여행에 동행하지 못할 정도로 박하게 평가했었지만 최후의 순간에 바울은 마가를 자기의 일에 유익하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다만 끝까지 주님께 붙어있으면서 충성하고 있으면 언제든지 사람의 평가는 달라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기고
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바울은 두기고를 에베소로 보내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이 나올까요?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칼빈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59쪽).
행 20:4; 엡 6:21; 골 4:7; 딛 3:12을 보면, "두기고"는 바울이 사랑한 또 하나의 조사였다. 이번에 그를 에베소에 보낸 이유는, 디모데가 로마로 오기로 되었으니만큼(9, 21절), 그로 하여금 교회를 대리 시무케 하려는 까닭인 듯하다(Calvin).
이 말이 맞다면 바울은 마지막 순간에도 공교회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사정이 정말 딱했지만 그는 에베소 교회에 디모데의 공백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은 것입니다.
겉옷과 책
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13절에 대한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은 다음과 같습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59쪽).
여기 "겉옷"이란 말(φαιλόνην)을 책함(冊函)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Calvin, Sizoo). "가죽 종이에 쓴 것"은 구약을 베낀 사본(寫本)이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하나님 말씀과의 접촉을 끊지 않았다.
가죽 종이(μεμβράνα)는 원어로 양피지(parchment)를 뜻합니다. 양피지에 쓴 구약 성경은 굉장히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중요한 함에 보관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해석은 일리 있는 해석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말씀대로 바울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교역자들은 바울과 같이 "그 책"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곧, 성경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
14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15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알렉산더는 디모데전서 1장 20절에도 등장합니다. 그는 후메내오와 함께 양심을 버렸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사람입니다(딤전 1:19). 여기서는 그가 구리 세공업자라고 하는데 박윤선 목사님은 이 사람이 사도행전 19장 33절에 나오는 인물과 동일한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60쪽). 사도행전 19장에는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드는 사람이 소요를 일으킨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만약 그가 유대인이었다면 바울에게 해를 많이 입혔다는 것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알렉산더는 바울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그가 유대인이었다면 그는 바울의 교리를 반박하면서 거짓 교훈을 널리 퍼뜨림으로 해를 입혔을 것입니다(15절). 이 해는 바울 개인을 향한 해가 아니고 복음에 대한 심각한 해(害)였습니다.
바울은 알렉산더를 주님께 맡깁니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교역자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교역자는 개인 자격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셔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역자가 복음 사역을 하는데 그 말을 대적한다면 그에 대한 처분은 우리 주님께서 해주십니다. 교역자는 그저 복음을 바르게 전하면 됩니다. 복수하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분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처음 변명
16절의 처음 변명이란 바울이 처음 옥에 갇혔을 때에 했던 복음 전도의 변증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는 바울과 함께 있으면서 조력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혹시 해를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랬던 자들, 즉 자기를 버렸던 자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복음의 원수가 아니고 다만 약한 신자들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60-661쪽).
이것도 교역자로서 본받아야 하는 태도입니다. 교역자는 복음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사람과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잘 구분해서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너그럽게 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끝까지 지키시고 돌보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17절에서 바울은 그때, 즉 처음 옥에 갇혔을 때에 주님께서 자기의 곁에 서셔서 자기에게 힘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 23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바울이 공회에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행 23:6)" 이렇게 외치자 공회가 반으로 갈라집니다. 그 때 그 분쟁이 얼마나 격렬했던지 천부장은 바울이 찢겨질까 해서 무리 가운데서 호위해서 영내로 들어가게 했습니다(행 23:10). 그 날 밤에 예수님께서 바울 곁에 서셔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23:11). 실로 바울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즉 공회 가운데에서 찢겨질 위기에서 건짐 받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바울을 보호하신 것은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행 22:21).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바울은 18절에서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60쪽).
이 귀절과 다음 귀절에서 바울은 그가 처음 수금(囚禁)되었을 때에 전도하던 중 주님이 함께 하셨고, 또 마침내 주님의 권능의 역사로 옥에서 석방된 일도 있었음을 회상(回想)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번에도 주님의 구원의 손이 나타나실 것을 확신한다(18절). 그러나 이번의 구원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감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의 천국"이라는 말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천국"과는 다른 말입니다. 마태복음의 "천국"은 하늘들의 나라로 직역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충만히 거하시면서 다스리신다는 개념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이 천국은 이미 임한 천국과 극치에 이를 천국을 의미하는 말이지 낙원을 의미하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에 나온 "그의 천국"이라는 말은 "위의 하늘에 있는 그의 왕국(τὴν βασιλείαν αὐτοῦ τὴν ἐπουράνιον)"이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우리 주님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계심을 생각하면서 주님께서 계시는 하늘로 갈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이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실 것을 기대한다고 할 때 그 기대는 죽음을 면할 것에 대한 기대가 아니고 죽음을 통과하여 주님 품에 안길 것에 대한 기대입니다.
주님께 영광
우리 주님은 끝까지 당신님의 사역자들을 책임지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주님의 영광이 됩니다. 주님은 일을 맡기시고 그 일을 완수할 힘을 주시고(17절) 끝까지 보호하시고 마지막에는 당신님의 품에 안으시는 분이십니다.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십니다(18절).
브리스가와 아굴라
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20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바울과 아름답게 동역했던 부부입니다. 브리스가가 아내인데 그 이름이 앞에 나왔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브리스가가 믿음과 사역에 있어서 남편인 아굴라보다 뛰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행 18:2; 롬 16:3; 고전 16:19 참조). 오네시보로는 1장 16절에 나오는데 바울을 자주 격려해 주고 바울이 갇혀 있는 죄수의 신분이었음에도 그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가 로마에 있을 때에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던 사람입니다(1:16-17).
20절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62쪽).
"에리스도"는 고린도교회의 집사였다(롬 16:23). "드로비모"는 바울의 제 3차 전도여행에 드로아에서부터 동반(同伴)되어 밀레도, 수리아, 예루살렘에 이르렀던 신자이다(행 20:4; 21:29). 위의 두 사람은 각각 그 지방 교회를 돕기 위하여 배치(配置)되었을 것이다.
어서 오라
21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22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바울은 디모데엑 겨울 전에 어서 오라고 합니다. 어서 오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에 바울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겨울을 언급한 것은 겨울에는 지중해를 통과해서 다니기가 어렵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62쪽). 21절에 나오는 으불로, 부데, 리노, 글라우디아는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들이 로마 교회의 신자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62쪽).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라고 씁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62쪽).
"심령"은 우리 인격의 중심점(中心點)이니, 그것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지 못하면 우리는 닻 없고 키 없는 배와 같아서 모든 위험스러운 곳으로 표류(漂流)하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 심령은 우리의 힘으로 관할할 수 없으니(잠 16:32; 렘 17:9), 그것이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품에서 변화와 감화와 인도와 보호를 받아야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게 될 것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심령이라고 번역된 말은 프쉬케가 아니고 프뉴마(πνεῦμα)입니다. 이 프뉴마는 영이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성령님을 가리키기도 하는 말입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 잘 주석하신 대로 이 "영"은 우리 인격의 중심점입니다. 이 인격의 중심점에 우리 주님께서 함께 거하시는 것은 큰 복입니다. 우리는 그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놀라운 연합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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