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8. 00:09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디모데후서
목차
찬송가 459장 누가 주를 따라
성경을 꼭 붙들어야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라고 명령합니다(3:14). 디모데가 베우고 확신한 일은 바로 성경입니다(3:15-17).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3:17). 그러므로 교역자는 성경 말씀을 꼭 붙들고 공부하여 날마다 사상체계가 완숙해지고 깊어지고 방대해져야 합니다.
엄히 명하노니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바울은 디모데에게 엄히 명합니다(Διαμαρτύρομαι). 이 말은 엄숙하게 증언한다는 뜻입니다. 증언은 그것을 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의무를 부과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엄숙히 증언한다고 하는 것은 디모데에게 복음 진리의 증인이 될 것에 대해서 의무를 부여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마치 재판 자리에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을 묘사합니다. 엄숙히 증언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곧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대상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입니다.
바울이 증언하는 것
바울이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것과 예수님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마치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전했습니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예수님 앞에 있는 것처럼 전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증언하는 사람처럼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복음은 진리여서 이것을 들은 사람은 양쪽으로 나뉘었습니다. 즉 진리에 순종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로 나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심판하실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복음 전도자가 심판자가 아닙니다. 복음 전도자는 증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예수님의 나라
전도자가 복음을 전하는 내용은 예수님께서 오시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천국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임하심으로 이미 도래한 천국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 전도는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미 임했지만 아직 극치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때 천국은 극치에 이를 것입니다. 전도자는 천국을 선포하면서 이미 임한 천국과 아직 임하지 않은 천국을 전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도 전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위와 같이 증언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명령합니다. "선포하라(κήρυξον)" 디모데가 선포해야 할 것은 "그 말씀(τὸν λόγον)"입니다. 여기서 그 말씀은 복음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교역자는 언제든지 복음을 선포해야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합니다.
항상 힘쓰라
선포하라고 명령한 바울은 항상 힘쓰라고 합니다. 항상 힘쓰라(ἐφίστημι)는 말은 항상 준비하고 서 있으라는 뜻입니다.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때는 항상입니다. 즉, 좋은 때든지 좋지 않은 때든지(εὐκαίρως ἀκαίρως)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54쪽).
이렇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쓸 이유는 무엇인가? 1) 하나님의 말씀은 무효로 돌아가지 않는 까닭이다(사 55:11). 세상 사업은 시기(時期)의 좋고 좋지 못함에 따라 이해(利害)가 따른다. 그러나 복음 전파의 성과는 시기에 의존하지 않는다. 전도자가 복음이 환영되는 때에는 많은 신자들을 얻게 되고, 복음이 배척되는 때에는 주님을 위한 수난(受難)과 순교의 영광을 거두게 된다. 2) 이 세상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여 있는 까닭이다(벧후 3:10). 사람들은 다 죄인으로서 마치 소경이 절벽 끝에 서서 지팡이를 떨어뜨리고 그것을 찾으려고 몸을 앞으로 굽히는 것과 같다. 이런 위기에 놓인 사람을 상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파를 항상 힘쓰라고 바울은 말한다. 3) 그 효과가 말씀의 힘에 달렸고 시대의 좋고 나쁜 데 달려있지 않은 까닭이다. 4) 어두운 시대에 말씀의 사명은 더욱 큰 까닭이다. 장미꽃의 향기는 밤중에 더욱 진동한다. 5) 듣든지 말든지 신자는 그 자신이 전도할 책임이 있는 까닭이다. 겔 2:7에 말하기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대로 고할지어다"라고 하였다.
교역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일에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매순간 복음으로 은혜를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그 마음에 있는 것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복음의 말씀이 자꾸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역자는 이런 측면에서 날마다 자라가야 합니다.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라
바울은 세 가지 명령을 더합니다. 즉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세 가지는 불의한 자를 다스릴 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불의한 자라도 그를 돌이킬 때에는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54쪽).
불의한 자를 다스림에 있어서 "오래 참음"의 덕이 없으면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여 그 마음을 잃기 쉽고, "가르침"(곧, 진리지식의 재료)이 없으면 효과를 내지 못한다. "경책함"(ἔλεγξον)은 범죄자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확인하도록 알려줌이고, "경계함"(ἐπιτίμησον)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를 꾸짖음이고, "권면함"(παρακάλεσον)은 꾸지람 당한 자로 하여금 이제부터 허물을 고치고 옳게 가도록 설유(說諭)함이다.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해야 하는 이유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교역자는 불의한 자를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해야 합니다(2절).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3절에 나옵니다. 3절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말(γὰρ)이 서두에 나옵니다. 교역자가 불의한 자를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해야 하는 이유는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는 때입니다. 여기서 바른 교훈은 건강한 교훈, 건전한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받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말은 원문을 직역하면 견디지 못한다(οὐκ ἀνέξονται)는 뜻입니다. 견디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미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역경과 연약함을 견딥니다. 특별히 서로를 사랑함으로 용납합니다. 그러나 불의한 자는 견디지 못합니다. 특별히 누가 자기에게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진리는 그 자체로 권위가 있습니다. 그 권위를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욕을 따를 스승
권위를 가진 진리의 가르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반대급부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둡니다. 자기 스승을 자기가 선택합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될 가르침을 찾아서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 같은 것을 좇으면서 그런 것들을 얻게 해줄 스승을 많이 둡니다. 사도 바울의 이 지적은 현대인을 미리 보고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런 현상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귀를 진리에서 돌이킴
자기의 사욕을 따르는 사람들은 결국 그들의 귀를 진리에서 돌이킵니다(4절). 그렇게 해서 허탄한 이야기를 따릅니다. 여기서 허탄한 이야기는 문자적으로 신화(μῦθος)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교묘하게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사람들이 듣기 좋도록, 사람들을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보통 문학이 이런 것인데 문학은 나름 가치가 있습니다. 문학은 있음직한 이야기로 거기에 나오는 많은 등장인물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런 이야기들에 치우친다(ἐκτρέπω)는 것입니다. 진리에 굳게 서 있을 때에는 문학이 순기능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문학이 주는 즐거움 때문에 사람이 망하게 됩니다. 진리를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교역자는 성도들이 어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성도들이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아니면 허탄한 이야기나 자기의 사욕을 채워줄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잘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꾸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게 되면 귀를 진리에서 돌이킬 위험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는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바울은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 신중하다(νήφω)는 말은 제 정신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상태는 주변을 잘 살피고 자기 자신을 잘 제어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특별히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3-4절에 나오는 사람들과는 정반대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3-4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자기의 사욕을 따르고 허탄한 이야기에 취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때를 분별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취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교역자는 그렇게 세상에 취하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때와 시기를 잘 분별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달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 고난을 받으라는 말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55쪽).
"고난을 받으며" 이것은 디모데가 거짓 스승들과 그 따르는 무리들 때문에 당할 고난을 가리킨다. 진리의 종은 거짓 스승들과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도자의 일을 하라고 합니다. 전도자의 일이란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진리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55쪽).
"전도자의 일을 하며" 이것은 불신자들에게 전도를 힘쓰라는 부탁이다. 교역자는 교회 안에서 범죄자를 징계하며 이단을 방지해야 된다(3-5절 상반). 그러나 그는 이런 소극적 사역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다. 그는 불신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적극적 사역을 겸해야 한다.
이 말씀은 중요합니다. 이단을 잘 방지하는 교회일수록 전통에 매여서 전도 사명을 잘 감당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내부의 이단과 싸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외부에 복음 전하는 사명에 전력해야 합니다. 교역자가 그 일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어야 합니다.
교역자는 뛰어나야 함
박윤선 목사님은 네 직무를 다하라는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56쪽).
"네 직무를 다하라" "직무"란 말(διακονίαν)은 여기서 감독직을 가리킨 것이 아니고 복음 전도의 직무를 의미한다. "다하라"라는 말(πληροφόρησον)은 성취의 확실함을 의미한다. 전도자가 직무 성취에 확실하려면, 위의 모든 귀절들(2-5절)에서 말한 것과 같이 여러 가지 각도로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교역자는 뛰어나야 합니다. 여러 방면에 있어서 진리를 수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교역자가 복음 진리를 잘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큰 문제입니다. 우선은 복음을 깊이 알고 믿고 그대로 전하면서 불의한 자를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해야 합니다. 지혜롭게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런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역자를 세울 때 교회 회원 중에서 뛰어난 사람을 잘 보아야 합니다. 엘리트 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벌이 아무리 좋아도 복음 진리를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역자를 세울 때 복음 진리에 있어서 확실한 사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 받는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제와 같이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6절은 박윤선 목사님 주석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56쪽).
본절 초두에 이유 접속사 가르(γὰρ)가 있어서 본절은 앞절의 이유를 말한다. 여기 "내가"란 말(Ἐγὼ)이 헬라어 원문에는 앞에 있어서, 윗절 초두에 "너는"이란 말(Σὺ)과 서로 대조적 관계를 가진다. 이 대조 관계를 상세히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너는 네 직무를 완수하여라, 나는 전제처럼 제물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나가기 때문이다."
"전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바울은 이 말로써 확정적인 자기의 순교(殉敎)를 비유한다. "전제"(σπένδομαι)는 드린 제물 위에 술을 붓는 것을 가리킨다(민 15:5, 25:7). 제물에 술을 붓는 것은 그 드린 제사를 마감하는 순서이다. 바울은 자기의 순교할 때가 멀지 않은 것을 이 말로써 비유한다. 곧, 그의 피 흘림이 제사를 마감하는 전제처럼 되리라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최후까지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지기를 원하였다. 롬 12:1 참조.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바울은 자기의 죽음을 하나의 이별로 보았다. 그는 죽음에 대하여 비관(悲觀)한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의미 있는 영광스러운 이전(移轉)으로 생각하였다(빌 1:23). 고후 5:8 참조.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앞에서 디모데를 강조한 바울은 6절부터 자기 자신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자기의 복음 사역이 디모데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디모데가 바울의 마지막 모습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교회에 유익하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입니다.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합니다. 여기 "싸움"이라는 말(ἀγῶνα)은 운동 경기라는 뜻이고 "싸웠다"라는 말(ἠγώνισμαι)은 운동 경기에서 분투했다는 뜻입니다. 운동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 애썼다는 뜻인데 이것은 이어서 달리기에 비유됩니다. 뒤에 나오는 말이 "나의 달려갈 길"입니다. 운동 경기는 언제나 상을 놓고 경쟁하는 상대가 있습니다. 경쟁하는 상대는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여기 선한 싸움은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도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11절에 먼저 이것들을 피하라고 합니다. 이것들은 부하려 하는 마음(딤전 1:9), 돈을 사랑하는 마음(딤전 1:10),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여기는 마음(딤전 1:5)입니다. 그리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경주를 한다고 할 때 피하기와 따르기를 열심히 하는 경주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싸움입니다. 바울은 이런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렇게 싸웠기 때문에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딤전 6:12).
바울은 이 선한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이 선한 싸움은 "믿음의 선한 싸움(딤전 6:12)"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믿음을 지켰으니"입니다. 바울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교역자는 끝까지 싸워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57쪽).
우리의 신앙은 끊임 없이 이 세상의 시련(試練) 가운데 있다. 믿음은 시련 가운데서 귀중한 연단을 받는다(벧전 1:7). 그러나 그 시련 중에서 견디지 못하는 자는 믿음의 생명을 상실한다. 바울은 그의 한 평생 시련 중에서 믿음을 지켰다.
우리는 잘하는 운동 선수에게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잘하는 운동 선수는 훈련을 할 때 다짐하고 노력하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냥 합니다. 습관을 따라서 합니다. 훈련은 그런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할 때 이것을 거창하게만 생각하면 시작도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냥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싸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즉, 운동 경기에서 이기기 위한 분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이기는 싸움을 오늘도 한다고 생각하고 그냥 해야 합니다. 복음 진리를 공부하는 일과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서 기도하는 일 모두 습관을 따라서 그냥 해야 합니다.
의의 면류관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 바울은 면류관을 바라봅니다. "이제 후로는"이라는 말은 "남은 것은"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에게 죽음은 결승선입니다. 결승선에 들어간 후에 남은 것은 상을 받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바울이 그 상을 내다보는 듯이 명확히 알고 있었다고 하면서 "그가 그 소망에 대하여 명확한 지식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그 거룩한 사명을 완수한 결과이다"라고 주석합니다. 그러면서 "현세에서 신앙을 잘 지킬 수록 내세에 대한 영적 관망(靈的觀望)은 밝아지는 법이다"라고 덧붙입니다(박윤선, 디모데후서 주석, 657-658쪽).
바울이 바라보는 것은 "의의 면류관"입니다. 의의 면류관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면서 씌워주시는 면류관입니다. 바울이 의로운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하여 주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충실히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이 의는 바울이 자기 힘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성취한 의입니다. 7절에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한 만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분투하는 사람은 이러한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 의의 면류관을 주시는 분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의로운 판단을 내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22:21). 바울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땅 끝까지 전하려고 애를 쓰면서 서바나, 즉 지금의 스페인까지 갔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에 따라 행한 바울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시는 분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 곧 바울을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고 보내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바울은 자기에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의로우신 재판장이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을 바라보며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미약하지만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끝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승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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