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사도행전 3장 1-26절 |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유명한 앉은 뱅이를 고친 후에

2024. 5. 6. 19:07성서유니온 매일성경/사도행전

목차


    사도행전 3:1-26

    찬송가 80장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교회가 세워지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베드로만 증언한 것이 아니고 사도들도 함께 서서 증언했습니다. 또한 성령 강림으로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증언하셨습니다. 또한 120명의 사람들도 방언을 받아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삼천 명이 회개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가정과도 같은 공동체였습니다(2:44-47). 3장에서는 복음이 성전 안에서 전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제 구 시는 오후 세 시입니다. 유대인들은 제 삼 시와 제 육 시 그리고 제 구 시, 이렇게 세 번 기도했습니다. 지금 시간으로 환산하면 여섯 시간을 더해주면 됩니다. 제 삼 시는 오전 9시, 제 6시는 낮 12시, 제 9시는 오후 3시입니다. 제 삼 시는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시간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 사람들은 기도 시간에 기도했고 성령께서 그 때 임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 시간에 맞추어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유대인의 기도 습관을 따랐지만 이들의 기도는 유대인과는 달랐습니다. 유대인은 모르는 것을 기도했지만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는 것을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확실하게 응답 받을 것을 기도했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나면서 못 걷게 되었다는 것은 그 장애를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은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이 생각나게 하는 사건입니다(요 9:1, 7).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2). 그 말씀이 이 사건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은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했습니다. 그는 구걸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구걸하는 것은 그에게 좋은 생계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의 자비심에 기대어 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기대어 산 것입니다. 

    미문

    미문은 성전 동편에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에 의하면 성전 미문은 여인들이 모이는 문이라고 합니다. 그 문의 이름은 니가놀 문입니다. 이 미문에 대해서 요세푸스는 겉보기에는 평범하지만 내부에는 화려한 장식이 많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을 아름다운 문, 즉 미문이라고 부른 것이라고 합니다. 이 미문은 일반 평민들이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항상 붐볐다고 합니다. 

    구걸하거늘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구걸했습니다(3절). 베드로와 요한은 그 앉은뱅이를 주목했습니다. 성경은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했다고 합니다(4절). 그러므로 이 사역은 베드로 한 사람의 단독사역이 아닙니다. 사도로서 행한 사역인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는 것

    앉은뱅이는 자기에게 우리를 보라고 하니까 무엇을 받을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5절).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당신이 기대하는 것은 자기에게 없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하지만 베드로에게 있는 것은 은과 금보다 훨씬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 능력의 이름이었습니다(6절).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에게도 이 능력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는 이름입니다. 이름에 능력이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 이름이 지칭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이 있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질병을 고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이기신 분이십니다. 부활의 첫 열매로서 사람을 죽음에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에게 이 이름이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 가운데에서도 소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잡아서 일으킴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서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7절). 누가는 이것을 의사의 관점으로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손을 잡아 일으키는 순간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겼는데 얼마나 세게 힘을 받았으면 뛰어서 섰다고 합니다(8절). 얼마나 기뻤을까요? 평생 걸어본 적이 없었는데 발과 발목에 강력한 힘이 들어갔습니다. 뛸 수 있습니다. 앉은뱅이였던 그 사람의 기분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8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장면을 봄

    모든 백성이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9절). 백성들은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였다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10절). 그만큼 그 앉은뱅이는 예루살렘 성전에 출입하던 사람들에게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해서 유명했던 것이 아니라 너무 약해서 유명했었습니다. 그런 그가 몸이 성해서 뛰어다니는 것을 본 사람들은 매우 놀랐습니다(10절 하). 

     

    하나님께서는 유명한 한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를 고치신 것으로 교회는 더욱 성장합니다. 그 이야기가 11절 이하에 펼쳐집니다. 

    솔로몬 행각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심히 놀란 사람들은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 행각은 기둥과 지붕은 있지만 벽은 없는 건물입니다. 성전 안에는 솔로몬 행각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전에 유대인들에게 에워싸였던 곳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해달라고 했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요 10:23-31). 그 똑같은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람들이 모이자 베드로는 백성들에게 자기들의 권능으로 이 사람이 걷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자기들을 주목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주목해야 할 분을 가르쳐 줍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태도는 이 시대 많은 사역자들과 청중들이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달을 보라고 손짓을 했더니 달은 안 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시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라고 설교를 하면 설교 내용이나 설교자를 더 중요하게 보고 판단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역자들도 넘어지고 청중들도 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역자들은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해야 합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베드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부터 이 일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즉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그의 종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13절). "그의 종"이라고 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를 취하셔서 십자가의 길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15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겼습니다(13절). 그랬는데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결의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했습니다(14절). 선을 악하다고 하고 악을 선하다고 하는 죄를 범했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생명의 주를 죽이는 극악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이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다고 합니다(16절).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시고(15절) 거룩하고 의로운 분(14절)이시고 하나님의 종이시고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분이십니다(13절).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서 거룩하고 의로운 분은 바로 메시아입니다. 즉 구원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님으로서 메시아, 즉 구원자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증언은 증거가 있는 증언입니다. 증거는 바로 방금 그들이 목격한 사건입니다. 앉은뱅이가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는 사건입니다(16절 하). 

    미리 알게 하신 것을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베드로는 청중들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정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베드로와 형제들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베드로는 그 일을 위해서 선택을 받은 사람일 뿐입니다. 베드로는 청중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렇게 하였고 너희 관리들도 그랬다는 것을 자기가 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몰라서 그리스도를 죽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인 일은 그 이상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미리 말씀하신 일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죽인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인 죄가 없어지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가두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입니다(롬 11:32). 

    회개하고 돌이켜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죄가 없어지려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를 알고 그 자리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죄가 사함을 받습니다. "죄 없이 함"은 죄의 기록을 도말한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서 죄를 가려준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죄를 범한 사실은 변경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그 죄가 가려집니다. 

    새롭게 되는 기회

    죄가 사해져야 새롭게 되는 날이 이릅니다. 새롭게 되는 날에서 "날"은 원어로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 카이로스는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고 특정한 시간입니다. 기회가 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기회가 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유명한 앉은 뱅이를 고친 후에

    회개는 우리에게 기회를 제공함

    회개는 우리에게 새롭게 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해서 그것이 어떤 죄인지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그 후에 우리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에는 자기들이 죽인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먼저 깨달아야 그 죄에서 돌이킬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죄가 도덕적인 잘못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음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으로 죄를 범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리에서 돌이켜서 다시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한 사람에게는 새롭게 될 기회가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님께 속한 유익을 그 사람에게 적용시켜 주시는 기회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히 4:16).

    재림은 예정된 일임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20-21절은 예수님의 재림을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또한 예정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항상 재림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가 끝에 어떤 사람으로 나타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도 이미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께서 두 단계를 거쳐서 오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이 초림과 재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 이미 잘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 하늘이 마땅히 예수님을 받아 둔다고 합니다. 만물을 회복하신다는 말씀은 이사야 11장 6-9절에 나옵니다. 이사야 35장 1-10절에도 나옵니다. 이 약속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 극치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는 이미와 아직의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물을 결정적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만물은 지금도 회복되고 있습니다. 이제 재림의 때에 만물은 완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실 것입니다. 

    모세의 예언

    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베드로는 모세를 인용합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예수님께서 오실 것을 이미 말씀했습니다(신 18:15).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22절). 그런 선지자가 왔을 때 백성들은 그의 모든 말을 들어야 합니다(22절 하).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멸망 받게 될 것입니다(23절, 신 18:19). 그러므로 모든 백성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요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시요 구원자시라는 것입니다. 구원 받기 위해서 이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멸망 받지 않습니다. 

    모든 선지자도

    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사무엘 이후의 모든 선지자들도 예수님의 때를 가리켜서 예언했습니다(24절). 베드로는 청중을 가리켜서 선지자의 자손이요 언약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25절).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25절 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예수님을 먼저 보내신 것은 그들이 돌이켜서 악함을 버리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26절).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베드로는 성전 안 특별히 솔로몬 행각 안에서 복음을 설교했습니다.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들, 즉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설교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침 이들에게 표적이 임했습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벌떡 일어섰습니다. 일어섰을뿐만 아니라 걷고 뛰고 있습니다. 이 표적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세도 알았습니다. 선지자들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청중들이 아는 것을 기반으로 그들이 아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교했습니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압니다. 아니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는 것이 맞는 것인지를 자꾸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아무 것도 모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은 하나님도 알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알고 모세도 알고 사무엘 및 다른 모든 선지자들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유대인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교회에 다니면서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난 복음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복음 진리를 모르고 여전히 성전을 드나드는 유대인처럼 그것을 율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력구원의 사고방식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자력 구원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씀합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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