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빌립보서 2장 5-30절 | 한마음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종

2023. 12. 23. 18:08성서유니온 매일성경/빌립보서

목차


    빌립보서 2:5-30

    찬송가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한마음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사도 바울은 앞에서 한마음을 강조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한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빌립보 성도들이 품어야 하는 한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절)" 빌립보 성도들이 품어야 하는 한마음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겸손한 마음,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한마음으로 복음의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복음의 일을 하는데 가장 핵심이 되는 마음은 바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6절)"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즉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동등함은 영광에 있어서 동등합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하나님이 아니신 적이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것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은 버리셨습니다. 

    자기를 비워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7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비우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떠났다는 말입니다. 자기 신성을 내어 놓으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종의 자리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늘 영광의 자리를 떠나서 종의 자리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사람은 종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는 것은 친히 종의 자리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모양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절)"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서 모양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참 사람이셨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모양을 취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교리입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의 인성이 인격이 될 때 그 인격이 예수님의 신격 안에서 인격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본성은 다 개별화되어야 합니다. 인성도 하나의 인격으로 개별화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인성은 독자적인 인격으로 개별화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신격 안에서 개별화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인성과 신성이라는 두 개의 본성이 있습니다. 본성은 개별화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신성은 신격으로 개별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인성은 신격 안에서 개별화되었습니다. 독자적인 인격으로 따로 개별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가리켜서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종은 복종하는 존재임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종의 형체로 낮추신 것입니다. 종은 복종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 존재 특성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즉 복종하셨습니다. 어디까지 복종하셨냐면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는 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한마음을 품을 때 정말 중요한 마음입니다. 

     

    매일성경 | 빌립보서 2장 5-30절 | 한마음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종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에 있는 자들과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절)" 이러므로가 중요합니다. 스스로 낮추면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이것이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마음을 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높음을 취하지 않으시고 가장 낮은 곳까지 스스로를 낮추셨습니다. 하늘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종의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이셨습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보면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어떤 이름보다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은 하늘의 천군천사와 영적인 피조물들과 이미 죽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땅에 있는 자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가리킵니다. 그 모든 것들의 무릎이 예수의 이름 앞에 꿇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극도의 존경을 표한다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주"는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낮추면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우리가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스스로 낮추니 하나님께서 나를 높이십니다. 또한 내가 스스로 낮추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낮추는 나를 인정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인정은 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높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인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12절)" 바울의 권면이 이어집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원어를 볼 때 사랑을 입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보여주신 속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입은 사람은 예수님처럼 행합니다. 즉 복종합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것처럼 항상 복종합니다. 마치 종이 복종할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처럼 종의 태도로 복종합니다. 두렵고 떨린다는 것은 곧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외에는 "자기"가 들어설 공간이 없습니다. 이것은 곧 구원을 성취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사람이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복종하는 대상 덕분에 구원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종에게는 복종할 자유밖에는 없습니다. 명한 대로 행하였다고 사례하는 주인은 없습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을 한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13-14절)"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이 뜻을 이루실 때 사람이 그 뜻에 동참합니다. 사람이 동참한다고 해서 사람에게 공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소원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소원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복음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일은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이 일을 하면서 원망과 시비가 있다면 어떨까요? 그렇기 때문에 한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빛들로 나타내며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15-16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 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첫째 이유는 빌립보 성도들이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원망과 시비가 가득한 세대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반역하는 세대입니다. 이 세대에서 빌립보 교회는 어떤 일을 할 때 원망과 시비가 없습니다. 내적으로 순결하고 겉으로 보기에도 흠 잡을 곳이 없습니다. 완전히 대조됩니다. 그 결과 세상은 어둠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교회는 빛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둘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날에 사도 바울이 자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달음질 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 열매 있는 사역인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의문이 들 때 빌립보 성도들을 보니 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참으로 생명을 주는 복음이구나 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원망과 시비가 없이 복음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온 우주에 기쁨이 충만하게 됨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17-18절)"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순종을 제물에 비유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드리는 모든 것이 다 제물입니다. 그 제물 위에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전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할 것이라고 합니다. 전제물은 제물 위에 붓는 술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 자신을 그 위에 쏟아 붓겠다는 뜻입니다. 전제는 순교를 상징합니다. 바울이 복음 사역을 감당하다가 순교한다면 그 순교는 복음 전함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의 제물을 드릴 때 전제로 함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순교를 네 번 거듭해서 기뻐한다고 표현합니다. 첫째, 나는 기뻐하고 둘째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고 셋째, 너희도 기뻐하고 넷째 나와 함께 기뻐한다고 합니다. 사방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다른 이가 기뻐하는데 서로가 서로의 기쁨을 증폭시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순종합니다. 그 순종 위에 바울이 전제로 드려집니다. 그렇게 해서 기쁨이 증폭됩니다. 복음은 이렇게 모든 성도를 하나님께로 올려 온 우주에 기쁨이 충만하게 합니다. 참 놀랍습니다. 

    디모데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19-20절)"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직접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갇힌 상태입니다. 갇혀 있으면서도 교회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보내서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알고자 합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처럼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진실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바울에게 알리는데 적임자였습니다. 

    수고하였느니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21-24절)" 바울은 디모데 말고는 적임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자기의 일을 그리스도 예수의 일보다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에서 수고하였다는 말은 원어로 종노릇했다는 의미입니다. 종은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옵니다. 자기 생활을 먼저 챙기는 자는 종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사람이 디모데밖에는 없었습니다. 바울은 2장에서 계속 종에 관해서 설명했습니다. 디모데는 그런 종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디모데를 보내고 자기도 어떻게 될지를 보고 속히 가겠다고 합니다. 주 안에서 확신한다는 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비록 지금은 갇혀 있지만 반드시 가게 될 줄 믿은 것입니다. 

    사역자의 자세

    모든 사역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종의 태도로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일을 한다고 나선 사역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종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일을 더 많이 구하는 것 같습니다. 회개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고 복음을 위하여 종이 되어야겠습니다. 보내시면 가고 오라고 하시면 오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에바브로디도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25절)"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너희 사자"입니다. 이 사자는 사도라는 말인데 여기서는 사도라는 직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단순히 너희가 보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를 바울에게 보내서 바울이 쓸 것을 도왔습니다. 에바브로디도의 헌신은 바울에게는 친 형제와도 같은 헌신이었습니다. 함께 수고한 헌신이었습니다. 선한 싸움을 함께 싸우는 헌신이었습니다. 영적인 전쟁터에서 전쟁을 함께 수행하는 헌신이었습니다. 이처럼 복음 사역자의 쓸 것을 돕는 일은 굉장한 일입니다. 

    에바브로디도와 기쁨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26-28절)"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에서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이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는 교회가 걱정한다는 것을 더 걱정했습니다. 심히 근심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기셔서 죽을 병에서 그를 살리셨습니다. 그 결과 바울의 근심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종이 그렇게 죽는 것과 또 그 소식이 빌립보 교회에 전해진 것으로 근심에 근심을 했었습니다. 그런 근심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회로 가서 그가 성한 것을 보여서 교회가 기뻐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그를 보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29-30절)"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칭찬합니다. 그가 죽기에 이르렀어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빌립보 교회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기 생명을 돌보지 않고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을 교회는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권면입니다. 

    빌립보서 2장 정리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교회가 가져야 하는 한마음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임을 말씀합니다. 그 마음은 종이 되는 마음입니다. 종으로 자기 일을 돌보지 않고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권면입니다. 사역자들 뿐만 아니고 교회에도 주시는 권면입니다. 우리는 그 권면을 잘 받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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