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사도행전 22장 30절 - 23장 11절 |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2024. 6. 20. 20:47성서유니온 매일성경/사도행전

목차


    사도행전 22:30-23:11

    찬송가 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유대인들의 격동과 천부장의 조치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자기가 만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과 같은 죄인의 죄도 씻어 주시고 사해주셨습니다(22:16).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 특별히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바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22:18-20).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보내셨습니다(22:21).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격동되어서 소리를 지르고 바울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22:22-23). 그 후에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소란한지 알고자 바울을 채찍질하여 심문하고자 했습니다(22:24). 그러나 바울이 로마 사람인 줄 알고는 그에게 죄도 묻지 않고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22:29).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왜 바울을 고발하는지 알고자 했습니다(30절). 

    진상을 알고자

    30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천부장은 바울을 채찍질해서 심문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바울의 결박을 풀고 이번에는 유대인들을 모았습니다.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은 것입니다. 당시 천부장에게는 이런 큰 권세가 있었습니다(30절). 

    공회를 주목하여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바울은 공회를 주목했습니다. 주목하다라(Ἀτενίσας)는 말을 박윤선 목사님은 '힘있게 쳐다봄'을 의미한다고 주석합니다. 이 말(ἀτενίζω)은 눈의 초점이 흔들리지 않는다, 굳건하게 바라보다라는 뜻입니다. 다음은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에 나오는 이 말에 대한 논평입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29쪽). 

     

    "주목하여"라는 말(Ἀτενίσας)은 '힘있게 쳐다봄'을 의미하는데,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자 외에는 회중을 힘있게 쳐다보기 어렵다. 설교자가 이처럼 회중을 힘있게 쳐다볼 수 있어야 그들의 양심에 부딪치도록 힘있게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회중을 주목함은 1) 그가 부끄러움 없는 일꾼으로서 담대하기 때문이고(딤후 2:15), 2) 그가 회중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여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다(유 1:22-23). 

     

    박윤선 목사님이 인용한 유다서 1장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이렇게 볼 때 바울이 가졌던 심정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예루살렘에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22:19-20). 이제 그 기회가 왔습니다. 이 기회에 바울은 그들을 힘있게 쳐다보면서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대로

    "양심을 따라"라는 말(συνειδήσει ἀγαθῇ)은 원어로 "선한 양심대로"라는 뜻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선한 양심을 거듭난 자의 양심이라고 합니다(딤전 1:5, 19; 3:9).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려는 진실한 양심입니다. 이 선한 양심의 특징은 무엇이나 사실대로 진실하게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양심의 소유자는 범죄할 때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여 즉시 회개합니다. 양심의 이런 작용이 바로 선한 것입니다. 이런 양심으로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딤후 1:3). 이 설명은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에 나오는 설명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간의 양심을 두 가지로 꾸짖는다고 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29-430쪽). 

     

    하나님의 말씀(성경)은 우리 인간의 양심을 상대로 하고 두 가지로 꾸짖는다. 곧 1) "왜 너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가?" 2) "왜 너는 사랑을 신천하지 않는가?"라고. 우리가 이 두 가지 꾸짖음 앞에서 사실대로 답하여 진실히 회개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을 섬김이다. 그것이 선한 양심의 작용이다. 

    하나님을 섬겼다

    바울은 "범사에" 즉, 모든 일에(πάσῃ) 선한 양심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합니다. 지금 청중들은 다들 자기들도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앞에서 바울은 자기도 모든 일에 선한 양심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한다면 바울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말대로라면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바울 중에서 한 쪽은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것이 됩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이 모든 일에 선한 양심대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니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옆에 있는 사람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했습니다(2절). 이렇게 명령한 이유는 그 더러운 입으로 어디 감히 하나님을 들먹이느냐라는 뜻입니다. 대제사장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양 하나님의 명예를 위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법이었습니다(3절).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행동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불법이 자주 자행됩니다. 이것은 역사에서 계속 일어났던 일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아나니아의 이런 행동을 교권주의자들의 행태라고 지적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30쪽). 

     

    아나니아가 바울의 설교를 중단시키려고 사람을 시켜 "그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으니, 이것은 성직자로서는 물론이거니와 일반 인간으로서도 할 일이 아니다. 사람은 영력을 소유해야 참으로 힘있는 자인데, 아나니아는 폭력으로써 바울의 영력을 제지하려고 한 것이다. 그것은 짐승의 힘으로 하나님을 대적함과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교권을 탐하는 자들은 모두 다 이런 과오를 범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진정한 진리 지식과 영력이 없는 까닭이다.

    회칠한 담이여

    3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바울은 아나니아에게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자기를 재판하는 사람에게 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바울의 입을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막 13:11). 바울이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라고 했는데 이 말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박윤선 목사님에 의하면 헤롯 아그립바의 동생의 후원으로 대제사장직을 받아서(주후 47년) 11년 동안 그 직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친 로마파였기에 유대주의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왔습니다. 그 결과 반 로마 전쟁(주후 66년) 당시에 하수도 속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30쪽). 하나님께서 그를 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이것은 바울의 입에서 나온 성령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회칠한 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31쪽). 

     

    "회칠한 담"은 겉만 희고 그 속은 흙이니 표리부동한 사실을 비유한다. 아나니아를 회칠한 담이라고 한 것은, 1) 그 자신은 극히 악하고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대제사장 직위의 영광을 입었으니 그것이 표리부동한 것이고, 2) 그 자신이 율법대로(공의로) 사람을 취급할 지위를 차지하고서 도리어 무죄한 바울을 불공정하게 "치라"고 하였으니, 그것도 표리부동한 행동이다. 

     

    바울은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습니다(5절). 그러나 그를 회칠한 담이라고 할 때 그가 악함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의 지위를 얻었다는 것도 포함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바울의 입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으로 생각하면 크게 문제 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의 입을 여셔서 그가 회칠한 담과 같음 말씀하시는데 그가 대제사장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도 문제 삼으시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교권주의자들을 향하여

    박윤선 목사님은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꾸짖은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의로운 발언이라고 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31쪽). 그는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꾸짖은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변호라기보다 저 악한 교권자를 공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의로운 발언이다. 권세 있는 악인을 꾸짖으려면 사실상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아야 할 수 있다. 많은 지도자들이 연약하고 권세 없는 자들을 잘 책망하면서도 권세나 지위가 있는 자에게는 아첨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럴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헤롯을 "여우"라고 하셨고(눅 13:32), 그 시대의 악한 교권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을 꾸짖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하셨다(마 23:13, 15, 16, 23, 25, 27, 29).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였다(마 3:7). 

     

    박윤선 목사님 자신이 한창 때 교권주의자들에게 많은 고난과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귀한 말씀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를 진리로 먹이는 목자라면 새겨 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4-5절을 보면 바울이 대제사장에게 즉각 사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칼빈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31쪽). 

     

    그러나 칼빈은, 바울의 이 말이 하나의 풍자라고 하였다. 곧 바울이 아나니아의 폭력 사용함을 보고 그를 대제사장으로 대우할 수 없으므로 그를 꾸짖은 것이라고 한다.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자기로서는 "관원(대제사장도 지도자이므로 일종의 관원이다. 그러나 그 당시 타락한 대제사장은 참된 관원이 아님)을 비방하지 말라"(출 22:28)는 성경 말씀을 명심한다고 하였다. 그의 이 말은, 그가 타락한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꾸짖은 것은 이 성경 말씀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대언자인 사도이니 구약시대의 선지자 신분과 같으므로 지위 있는 자들(불의한 자들이라면)을 꾸짖을 수 있다. 

     

    이런 해석은 바울이 말한 것에 일관성을 부여합니다. 바울은 선지자로서 지위 있는 자를 꾸짖은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꾸짖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바울이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라고 한 것도 선지자의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이 말은 그대로 성취됩니다.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처럼 성취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바울은 공의회 회원들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바리새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심문을 받는다고 합니다(6절). 어떻게 보면 이것은 바울이 두 당파를 분열시키려고 꾀를 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의 목적은 자기의 생존이나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분열시켜서 자기가 살기 위해서, 또는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할 이유가 바울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바울은 죽는 것도 이미 각오한 사람입니다. 그가 죽기를 각오한 이유는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그가 바리새인들을 부활 진리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32쪽). 

     

    이것은 바울이 두 당파를 분열시키려고 꾀를 부렸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부활 신앙의 진리에서 말지 않은 일파, 곧 바리새인들을 자기의 주장하는 부활 진리로 이끌려는 방침 뿐이었다. 바울은 자기가 법정에서 심문 받게 된 원인이 기독신자의 부활 소망을 전한 것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가 주장한 부활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고, 현실 세계에서 생사문제를 내걸고 전파할 역사적 그리스도 사건이다. 

     

    바울은 생사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부활 소망을 전했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서 얼마라도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는 사랑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거룩한 무덤 성당 내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바울의 말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기고 무리가 나누어졌습니다(7절). 그들은 합세해서 복음을 핍박했었습니다(4:1-3, 6, 15). 그런데 그들은 원래 합세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교리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하는 당파입니다. 반면 바리새인은 다 있다고 하는 당파입니다(8절). 합세할 수 없었던 그들이 합세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당파 모두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교리가 달랐지만 복음을 핍박하는데 있어서는 힘을 합쳤습니다. 그것이 자기들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사이가 좋지 않던 빌라도와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할 때 그 둘 사이에서도 일어났던 일입니다(눅 23:12). 비진리는 서로 교리가 달라도 진리를 핍빅하는데 있어서는 서로 힘을 합칩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 사이의 분쟁은 "큰 분쟁"이었습니다. 얼마나 큰 분쟁이었는지 바울이 찢겨질 위험에 처할 정도였습니다(10절).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동안 예수님의 부활을 계속 부인해왔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이번에는 사두개인들과 충돌하면서까지 바울이 말한 부활 사상에 동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간략한 역사

    박윤선 목사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소개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32-433쪽).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사두개파는 그 당시 유대인 당파들 중 하나로서 소수당이었다. 그 당원들은 지성인으로서 부유하고 지위 있는 계층의 사람들이었으며, 그 당파는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Zadok)의 뒤를 이어 내려온 것이었다. 그 당파에 속하는 자들의 신앙교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구약을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각기 자유롭게 해석할수 있다고 주장하였음. 2) 그들은 부활과 내세와 영혼을 부인하였음. 3) 그들은 점점 타락하여 파사와 헬라 시대에는 정치를 종교보다 높이 평가하였음. 안디오코 에피파네(Antiochus Epiphanes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침략시에는 이 당파에서 나온 많은 제사장들이 헬라의 문화와 풍속을 기탄없이 채용하고 마침내 정치 방면으로 기울어졌다. 로마 시대에도 역시 이들은 정권과 타협하였다.

    바리새파는 마카비 전쟁 때에 헬라화 운동을 막기 위해 일어난 종교인들로 구성된 것인데, 점차 탈선하여 율법주의로 기울어진 당파이다. "바리새"란 이름은 대제사장 힐카누스(John Hyrcanus) 시대(주전 135-105년)에 정식으로 사용되었다. 힐카누스는 바리새인이었다가 후에 사두개파로 넘어갔고, 그의 아들 아나우스(Janaeus)는 바리새파를 진멸하려고 까지 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Alexandra)가 바리새 운동을 후원했으므로 이 당파는 유대 종교에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 당파의 교리는 사두개파와 반대로 부활, 내세, 영혼의 존재를 믿어 왔다. 

    서기관들이 바울 편에

    9절에 보면 바리새파 중에서 서기관 몇 명이 일어나서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라고 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성전에서 말한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성전에서 무리에게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을 증언했습니다(22:7-8, 10, 18, 21).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할 일은 이방인에게 구원자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22:10, 21). 서기관들은 바울에게 혹 영이나 천사가 말했을 수도 있지 않느냐면서 바울 편을 들었습니다. 바울의 증언은 그들에게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적어도 서기관들이 성경을 다시 보는 계기를 주었을 수도 있는 증언이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보호했습니다(10절).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 군인들을 사용하셔서 바울을 보호하시고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로마로 가게하셨습니다(11절). 그런데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은 실상 군인들이 바울을 지킨 것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 하시는 주 예수님께서 군인을 포함한 그 모든 일행을 지키신 것이었습니다(27:24). 

    바울의 소원과 예수님의 뜻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신님의 일을 증언했다고 하시면서 그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공의회 가운데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과 부활을 증언하려고 한 것에 대해서 격려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22:18). 그리고 지속적으로 예루살렘에서 큰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는 자기 동족을 사랑했습니다(롬 9:1-3). 예수님께서는 바울의 사랑과 열심을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에게 보내셨지만(22:21) 바울이 예루살렘에서도 당신님을 증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동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바울의 사랑과 열심에 주님께서는 보호하심으로 함께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신 것으로 그를 크게 격려하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음성으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친히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34쪽). 

     

    "바울 곁에 서서(ἐπιστὰς αὐτῷ) 이르신" 것은 음성만으로 그렇게 느껴지도록 하신 것도 아니고, 환상으로 그렇게 보여주신 것도 아니다. 이것은 꿈 가운데 보여주신 것을 가리킨다(Jacquier). 성도에게 임한 위험이 극도에 달하면 주님께서 그를 위로하시기 위하여 특별히 나타나시는 법이다. 사람이 느끼는 위험이란 것이 하나님의 눈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가 바울로 하여금 마침내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게 하실 것이므로 앞으로도 당할 위험들을 모두 다 피할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이다(Bengel). 주님의 이 계시는 난관을 당한 바울에게 큰 힘을 주었다. 바울이 주님의 임재를 느낀 것만으로도 큰 힘을 얻었을 터인데, 하물며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하도록 인도해 주시겠다는 약속까지 받았으니 더 말할 것이 무엇이랴!

     

    바울은 이미 로마로 가려고 했습니다(19:21). 그런데 성령께서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큰 박해와 위험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20:23, 21:4, 11). 바울은 죽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예루살렘에 갈 그의 결심을 내비쳤습니다(20:24). 그런데 와서 여러 가지 일들을 당하면서 보니 성령님의 예고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안전하게 보호되었습니다. 안전하게 보호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을 향한 주 예수님의 뜻은 그가 로마에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신자에게 미래의 일은 이러합니다. 신자는 항상 죽을 것도 각오하고 그 길을 걸어갑니다. 하지만 신자의 마음에 소원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함에 있어서 두려움이 아니라 확신 가운데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을 걸어가다보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기를 소원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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