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사도행전 22장 12-29절 | 바울의 복음 전도와 듣지 않는 유대인들

2024. 6. 19. 20:30성서유니온 매일성경/사도행전

목차


    사도행전 22:12-29

    찬송가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복음 전도가 가장 중요함

    사도 바울은 로마 군인에게 잡혀 가는 중에 자기가 길리기아 다소 출신인 것을 천부장에게 헬라어로 말합니다. 그렇게 자기 학식을 드러내서 변론할 기회를 얻습니다(21:37-40). 그것으로 바울은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에게는 복음 전파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유대인을 향한 변론이 계속됩니다. 

    아나니아를 보내심

    12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바울은 아나니아를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던 바울(22:3)이 하는 말입니다. 또한 아나니아는 다메섹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이 칭찬하는 사람이었습니다(12절). 유대인들이 아나니아를 칭찬한 것은 그가 율법에 따라서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따라서 경건한 사람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아나니아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형제 사울아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형제"라고 부릅니다. 바울, 당시 사울이 잡아서 대제사장에게 넘기려고 했던 사람은 바로 아나니아와 같은 사람입니다. 사울은 아나니아와 같은 사람을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두 사람을 형제로 이어주셨습니다. 하나의 믿음으로 이어주신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보내셔서 바울의 눈을 고치셨습니다. 박해를 당하는 자로 하여금 박해자의 눈을 고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나니아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일은 바울과 아나니아 모두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22:10, 13-14). 이 일에는 주님의 주권이 드러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형제"라는 단어에 주목하여 이 부분을 주석했습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24쪽).

     

    아나니아는 바울이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가려던 핍박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서로 일치한 그리스도 신앙 때문에 바울과 "형제"가 되었다. 이것은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적적으로 이루어진 관계이다. 바울은 이러한 이적 가운데 자기의 눈이 "즉시" 열려 보게 된 것(9:18 참조)이 역시 주님의 은혜임을 증거한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일의 의미

    14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22: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에게 그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이른 사람은 바로 아나니아입니다(12절). 아나니아는 바울의 눈을 고친 후에 바울이 해야 할 일을 알려줍니다. 먼저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바울이 당한 일을 해석해 줍니다.

     

    바울이 당한 일은 첫째,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그를 택하신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메시아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24쪽).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대로 메시아를 보내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하신 것은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당한 일의 두 번째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바울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24쪽).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알려주신 것 두 번째입니다.

    그 의인

    셋째, 하나님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그 의인(τὸν Δίκαιον)"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 의인(τὸν Δίκαιον)"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그 의인이라고 칭한 것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벵겔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아나니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 의인"(τὸν Δίκαιον), 곧 특수한 의인이라고 한 것은 벵겔에 의하면 몇 가지 내용을 가진다. 1) 그리스도 자신이 언제나 의로우시며, 2) 부활 승천 후에는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담당하셨던 죄짐도 그에게서 벗겨졌으며, 3) 그가 친히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으며, 우리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예수님을 그 의인으로 칭한 것은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의인이 된다는 것을 함축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에 확실한 것입니다. 셋째 의미에서 바울은 "그 의인"을 보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곧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사람으로 선택되었다는 뜻입니다(15절). 예수님의 뜻은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죄를 씻고 의인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16절). 이러한 예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은 모든 사람 앞에서 바울이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15절). 예수님은 바울을 그렇게 당신님을 위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이전에는 자기 열심으로 잘못된 지식에 따라서 행했지만 이제는 참된 열심으로 진리에 따라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큰 고생과 수고

    박윤선 목사님은 바울이 선택된 것은 바울에게 큰 고생과 수고가 따르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25쪽).

     

    "모든 사람"이란 말(πάντας ἀνθρώπους)은 특별히 '모든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대중을 상대한 일에는 큰 고생이 뒤따른다. 사람이 은혜를 받는 것은 복음과 함께 수고하기 위함이다(고후 11:23-27; 살후 1:5; 딤후 1:8; 2:3; 4:5 참조).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쓰임 받는 것은 은혜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큰 은혜는 복음과 함께 수고하기 위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 수고는 고생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높아지려고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높아지려고 크게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16절)"라고 합니다. 이 말은 '왜 지체하는가?'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주의 이름을 부르고 세례를 받고 죄 씻음 받는 것에 주저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주저한 이유는 그가 과거에 신자들을 잡아 가두고 주의 종 스데반이 순교할 때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켰기 때문입니다(20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25쪽).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란 말(καὶ νῦν τί μέλλεις)은 고대 헬라어로서 '이제 왜 지체하는가?'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큰 죄인에게 위로를 준다. 과거에 신자들을 잡아 가두던 큰 죄를 범한 바울일지라도 사죄하시는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 앞에서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런 죄인일지라도 그 큰 은혜 앞에서 머뭇머뭇할 것 없다.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라고 합니다. 물 세례가 죄를 씻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죄를 씻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우리는 주님의 이름(주님의 권위와 공로)을 힘입어서만 죄 사함을 받는데 물로 씻은 것처럼 깨끗이 해결된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25쪽)"라고 주석합니다. 예수님은 바울이 당신님을 박해한 죄도 씻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어떤 흉악한 죄도 씻어 주십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 큰 은혜 앞에서 머뭇머뭇할 것 없습니다. 

    먼저 기도한 바울

    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바울은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서 황홀한 중에 예수님의 지시하심을 들었습니다(17-18절). 바울은 주님을 만난 신비한 체험 후에 바로 행동하기보다 기도를 먼저 했습니다. 기도하면서 바울은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 생각에는 자기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증인이 되라고 하셨는데 자기가 유대인들에게 증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19-20절에 그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께 자기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렸다고 합니다. 또한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자기가 곁에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켰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자기와 같은 핍박자가 변화된 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충격을 받아서 그 결과 그들이 자기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다름

    그러나 바울의 생각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18절)" 이것은 22절에서도 확증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들은 유대인들은 듣다가 소리를 지르면서 오히려 바울을 없애버리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증언을 듣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에게 보내기를 원하셨습니다(21절).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일어난 놀라운 복음 전도의 역사를 보면 놀랍습니다. 에베소에서는 도시 전체가 복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수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뜻하신 바가 있으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논평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26쪽).

     

    어떤 때에는 인간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론도 주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바울의 전하는 복음에 응종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18절 하). 바울은 주님의 이와 같은 계시를 따라서 이방의 사도로 사역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원칙을 발견한다. 그것은 전도자는 그 임지를 택함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자기의 판단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전진해야 된다는 것이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26쪽). 

    극단적 민족 차별주의

    22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23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박윤선 목사님은 이 때에 유대인들이 갑자기 발악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26-427쪽). 

     

    이 때에 유대인들이 갑자기 발악한 이유는, 이방인들을 유대인과 동등시한 바울의 말 때문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자랑하고(롬 2:23) 율법 없는 이방인들을 멸시하여 왔는데, 이방인도 메시야의 구원 축복에 참여한다는 바울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1) 그들이 "소리 지른" 것은 바울의 말을 중단시키려 함이고, 2) "옷을 벗어 던진" 것은 그를 돌로 치려는 준비였다(7:58 참조). 이처럼 그들은 극단적인 민족 차별주의자들이었고, 따라서 모든 인류를 동일시하는 복음(골 3:10-11)을 이해하지도 못하였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극단적인 민족 차별주의를 따르고 있습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동일시하십니다. 복음 안에 그러한 신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근거로 제시한 골로새서 3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인종간이나 빈부나 귀천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은 그 누구도 독점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이 자기들과 이방을 차별하는 것은 그들이 율법을 독점하는 것처럼 복음도 독점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 중에도 그런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서 극단적 (민족) 차별주의자들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다윗의 탑에서 통곡의 벽 쪽으로 바라봄

    하나님의 말씀만 성취됨

    유대인들의 이러한 반응은 주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신 바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18절)고 하신 그 예고가 바울의 설교 도중에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든지 이루어지는 법이니, 그 말씀은 진리요 사실 그 자체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언제든지 다시 오실 수 있다는 것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충성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더해서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성취된다는 것을 믿으면 어떤 불길한 징조나 생각이나 말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로마 시민

    24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대
    25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26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27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29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다시 소요가 일어나자 천부장은 바울을 영내로 데려다가 채찍질하여 심문하고자 합니다(24절). 바울이 히브리어로 말했기 때문에 천부장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천부장이 보기에 소요 사태의 원인은 바울의 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요 사태의 원인 제공자인 바울을 채찍질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떠들며 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이것은 바울을 돌려 쳐서 죽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천부장은 자기도 모르게 바울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적극적으로 보호했습니다(25절). 바울은 그 때 자기가 로마 시민인 것을 밝혔습니다. 바울은 이미 그것이 효과가 있음을 경험했습니다(16:37-39).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27쪽). 

     

    바울은 자기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실에 근거하여 자기를 변호하였다. 로마 법에 의하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신상에 폭력을 가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Calvin). 바울이 이런 법률에 의하여 자기 안전책을 찾은 것은 무법한 자들에게 정의를 가르치려는 목적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는 법적으로 면할 수 있는 폭행을 일부러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기독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에 훼손됨이 없는 한, 법률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다만 세상 국법과 천국 법(성경)이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때에는 기독 신자가 국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제한을 받게 된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고전 6:12). 아무리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라도 그것을 사용함이 신령한 은혜와 건덕에 손상을 준다면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 

    법률의 보호

    박윤선 목사님이 법률에 보호를 받을 수 있으나 국법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기독 신자가 제한을 받는다고 한 것은 박 목사님 당시 민감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고신 교단 안에 있었던 송사 문제입니다. 그 때에 총회에서 교회의 재산에 대해서 반납하라는 명령에 불복하여 세상 법정에 소를 제기해야 하느냐 아니냐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박병식 목사님이 쓴 논문, "고려파 초기 박윤선의 신학적 긴장"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신학정론, 2024년 6월, 70-84쪽 참조). 

    특권은 곧 사명임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사용하셔서 바울을 보호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 되게 하셨습니다(28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로마 전역에 바울이 복음을 전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은 헌신을 위한 것입니다. 믿는 자가 어떤 특권을 타고났다면 그 특권은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데 사용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믿는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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