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16. 11:23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사도행전
목차
사도행전 21:1-16
찬송가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밀레도에서 떠나서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서 권면했습니다(20:17, 28). 바울은 장로들에게 그들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권면했습니다(20:28 상). 그들이 삼가야 하는 이유는 교회를 보살피기 위함입니다(20:28 하). 바울은 자기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나운 이리는 거짓 선생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자기를 따르게 하는 사람들입니다(20:30). 거짓 선생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바울이 전한 은혜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20:31). 바울은 장로들을 주 예수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합니다(20:32). 그러면서 말씀이 그들을 세울 것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교회를 붙들고 말씀이 교회를 세웁니다. 그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내용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내용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밀레도에서 두로까지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바울과 그 일행은 밀레도에서 떠나서 배를 타고 고스와 로도와 바다라를 거쳐서 두로에 상륙했습니다(1-3절). 누가는 이 여행에 동행하면서 행선지를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이 여행은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고스와 로도(1절)와 구브로(3절)은 섬입니다. 바다라는 루기아 지방의 항구도시입니다.
두로에 있었던 제자들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두로에 상륙한 바울은 제자들을 찾아서 거기에서 7일을 머물렀습니다. 여기서 제자들(μαθητὰς)이라는 말은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믿는 사람은 복음 진리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μαθητής)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기독신자들은 계속적으로 복음 진리를 배우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13쪽). 옳은 해석입니다. 성경을 가르치다보면 자주 경험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들이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안다고 생각하면서 그것 말고 하나님의 뜻, 원칙을 알려 달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복음 진리를 모르는 태도입니다. 모든 원칙은 복음 진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상식에 반하는 복음 진리를 신자들은 계속 찾고 배워야 합니다. 한 번 들었다고 깨달았다고 내가 다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두로에서 바울은 제자들을 찾았습니다. 찾아서 만났는데 두로에 있는 성도들은 수준 있는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드어가면 위험할 것을 바울에게 알렸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위험한 일에 대한 그들의 예감은 성령의 역사였지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바울을 만류한 것은 그들 자신의 인간적 동정심이었다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13쪽).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로마를 거쳐서 서바나로 갈 소원을 주셨기 때문입니다(롬 15:23, 28).
두로에서 이루어진 성도의 교제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두로에서 제자들을 만난 바울은 여러 날을 그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들은 비록 며칠 간이었지만 진정한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다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제는 인간적인 교제가 아니라 영적 교제였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그들이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한 것을 보면 그들의 사랑은 혈육에 속한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이어서 하나님 중심이었다고 주석합니다. 그러면서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을 가리켜서 그 장래를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서로가 그 장래를 하나님께 부탁함은 가장 견고하게 친구의 잘 됨을 확보하게 하는 비결이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14쪽)."
복음으로 하나였던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돌레마이는 두로에서 약 45km 남쪽에 위치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거기에 빌립이 교회를 세웠을 것이라고 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14쪽). 거기에도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교통의 요충지마다 교회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과도 하루 동안 함께 거했습니다. 바울은 거기에서 "형제들에게 안부를"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형제들에게 안부를 맏는 것은 하나의 형식적 인사가 아니고 이때 초대 교회에서 신자들끼리 끓는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그 문안 한마디가 상대방에게 위안과 용기와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복음으로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로 마음이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잘 세워져 있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차원에서의 안녕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안은 듣는 사람들에게 영원의 차원에서 위안과 용기와 소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함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이튿날 떠난 그들은 가이사랴에 이르렀습니다. 가이사랴까지는 돌레마이에서 약 50km 정도 남쪽에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전도자 빌립"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도 빌립이 아니고 빌립 집사가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들은 복음 전도 사명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가보의 예언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바울은 빌립의 집에서 여러 날 머물렀습니다(10절). 오순절 전에 충분히 예루살렘에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여러 날 머무른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머무는 동안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가이사랴로 왔습니다. 아가보는 11장 28절에서 글라우디오 때에 흉년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던 그 사람입니다. 그만큼 아가보의 예언은 당시에 권위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언의 목적
아가보는 바울의 띠로 수족을 잡아매고 예언했습니다. 이것은 상징행동입니다(왕상 22:11; 사 20:2; 렘 13:117; 겔 4:1-17 참조). 이 행동을 한 후에 아가보는 그 뜻을 설명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해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했습니다(11절). 박윤선 목사님은 이 예언의 목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14쪽).
성령께서 이처럼 예언자를 통하여 바울의 앞길에 찾아올 환난에 대하여 예고하신 목적은 그 예언이 성취되어 환난이 임할 때에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실성과 하나님이 그와 동행하시는 사실을 확신케 하려는 것이다. 그는 그의 발걸음마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바 없음을 확신하고 그 환난 중에서도 위로와 힘을 얻을 것이다.
진실된 예언과 장엄한 거절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예언을 들은 사람들은 다 바울을 말렸습니다. 빌립의 딸 넷도 예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9절) 이 예언(11절)은 확증된 예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까지 바울을 말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바울과 동행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말릴 때 울면서 말렸습니다(13절).
이에 대해서 바울은 자신의 굳은 결심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어찌하여...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라고 합니다. 그들이 울면서 자기를 말리는 것이 자기 마음을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이 약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굳은 결심을 드러냅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라고 합니다(13절). 여기서 각오하였다(ἑτοίμως ἔχω)는 것은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환난에 대한 예고는 바울을 단단히 준비시키는 선한 작용을 했습니다. 바울은 권함을 받지 않고 거절했습니다(14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캄벨 모건의 말을 인용하여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15쪽).
이 점에 대하여 캄벨 모건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권면은 진실한 맛이 있는 권면이고, 그 권면을 듣지 않는 것은 장엄한 맛이 있는 거절이다. 그러나 이 두 편이 다 주님의 뜻을 찾는 데 있어서는 일치한 보조를 취한 것이다."
미래 일을 대하는 신자들의 태도
이것은 신자들의 마음을 일깨웁니다. 신자들은 보통 사람과 다른 사람들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미래 일을 미리 알려고 할 때 그 목적은 재앙을 알고 피하는 것입니다. 복을 얻으면 더 좋습니다. 기복방액이 미래 일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미래 일을 생각하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미래 일을 기복이나 방액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선 우리는 미래 일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선하게 사용하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성령께서 미래 일을 예고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신자들은 일반 사람들과 다르게 반응합니다. 마음에 단단히 준비하는 것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이 와도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그 길을 가리라, 죽을 것을 각오하리라, 이것이 신자의 반응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일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반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에게 오는 환난 예고는 신자를 준비시키고 장엄하게 그 길로 나아가게 하는데 사용됩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오랜 제자 나손
15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바울은 전도자 빌립의 집에서 여러 날 머물다가 시간에 맞춰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때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갔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위험이 자기들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동행했습니다. 그들은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갔습니다. 나손의 집은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 사이에 있었을 것입니다. 나손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새로이 믿기로 작정하고 잘 믿는 자도 귀하지만, 이미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자는 더 귀하다고 주석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누가는 나손을 오랜 제자라고 특별히 소개했다고 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11쪽). 오랜 신자는 믿음이 넉넉하여 환난에도 능히 참고 견디는 신자입니다. 환난이 기다린다는 길을 동행하면서 바울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랜 믿음에서 나오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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