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사도행전 20장 28-38절 | 교회를 지도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들

2024. 6. 15. 18:55성서유니온 매일성경/사도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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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사도행전 20:28-38

    찬송가 208장 내 주의 나라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바울은 밀레도에서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합니다. 에베소를 들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입니다(20:16). 그래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렀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을 부른 것은 그들에게 에베소의 양들을 잘 돌보라고 당부하기 위해서입니다(28, 32, 35절). 

    삼가라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첫째, 자기를 위해서, 둘째, 온 양떼를 위해서 "삼가라"라고 합니다. 삼가라는 말(προσέχω)은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돌보라는 것입니다. 양떼를 돌보는 장로들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온 양 떼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먼저 자기를 잘 살펴야 하는 이유는 장로가 무너지면 양떼들이 함께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장로들이 성직자로서 더러운 자가 되면 양 떼를 다스릴 능력을 상실한다고 주석합니다. 그러면서 부흥사 찰스 피니를 인용해서 교역자들이 삼가야 할 것 일곱 가지를 제시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02쪽).

     

    1. 너는 죄인들의 위험성을 느끼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하는가?
    2. 너는 그 죄인들을 위하여 죽기까지 하려는 사랑을 가졌는가?
    3.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쓰는가?
    4. 너의 습관 가운데 고쳐야 할 것은 없는가?
    5. 너는 너의 혀에 재갈 먹여 헛된 말을 하지 않도록 하는가?
    6. 너는 특별히 이성 교제에 극력 조심하는가?
    7. 너는 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가?

    이 목록은 박윤선 목사님이 여러 가지 중에서 교역자들에게 해당한다고 생각되는 것을 추린 것입니다. 

    삼가야 하는 이유

    교회를 치리하는 장로들이 자기와 양 떼를 위하여 삼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감독자로 삼으셔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기 때문입니다(28절).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셔서 죄의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교회를 사셨습니다. 당신님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하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측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하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통을 당하시며 피를 흘리실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무한한 고통을 당하셨다는 측면입니다. 피를 흘리신 분은 아드님이시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상응하는 고통, 어쩌면 더욱 큰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삼위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사시기 위해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교회를 사랑함

    교회를 맡은 사람은 피 흘리기까지 고통당하시면서 교회를 사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역자와 장로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명예와 의를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맡기신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온 양 떼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나운 이리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교회에 사나운 이리가 들어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29절). 사나운 이리는 그 양 떼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들을 당신님의 피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는 양 떼를 굉장히 아끼십니다. 그러나 사나운 이리는 그 반대입니다. 그들이 사나운 이리인지 구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를 따르게 하는가를 보면 됩니다. 참된 교역자는 양들이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합니다. 하지만 사나운 이리, 즉 거짓 교사는 자기를 따르게 합니다(30절). 

    거짓 교사의 무기, 어그러진 말

    사나운 이리인 거짓 교사가 자기를 따르게 하는 방법은 어그러진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에서 "어그러진"은 어그러뜨린다(διαστρέφω)는 뜻입니다. 즉 그들이 말을 하면 일이나 사람이나 다 어그러뜨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어그러뜨린다는 말은 왜곡한다, 두 가지를 뒤섞는다, 부패시킨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것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참과 거짓을 섞어 말함을 가리킨다고 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04쪽).

     

    거짓과 진리를 잘 구분해서 전하면 사람들은 진리 편에 섭니다. 즉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과 진리를 섞어서 말하면 사람들은 어그러지게 됩니다. 특별히 그들의 생각과 사상이 어그러집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일에 기준을 잡지 못하고 거짓 교사를 자꾸 의지하게 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바울의 예언대로 과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딤전 1:20), 부겔로와 허모게네(딤후 1:15), 또한 데마(딤후 4:10)와 같은 자들이 일어났다."라고 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04쪽). 교회 초기부터 이런 사람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밀레도의 고대 유적

    일깨어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일깨어" 즉, "깨어 있으라(γρηγορεῖτε)"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를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권면하신 말(마 24:43; 26:38; 막 13:34; 14:34; 눅 12:37, 39)과 같은 말입니다. 거짓 교사에게 당하지 않는 방법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말은 밤에 깨어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무언가를 지킨다는 말입니다. 잠을 자거나 졸면 무언가를 바르게 보고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즉각적인 조치를 취할 수도 없습니다. 깨어 있다는 말은 그 반대의 상태를 뜻합니다. 제대로 보고 판단을 내리는 상태, 즉각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상태가 바로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기억하라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깨어 있으면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기억하라"라고 되어 있는데 원어로는 "기억하면서 깨어 있으라"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깨어 있다는 말은 물리적으로 잠을 안 잔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바르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바르게 생각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이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입니다. 잘못 읽으면 바울이 그렇게 수고한 것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가 각 사람을 훈계한 그 내용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각 사람을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하였기 때문에 장로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32절도 그것을 말합니다. 

    그 은혜의 말씀

    32절에는 "그 은혜의 말씀"과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31절에서 기억하면서 깨어 있으라고 한 것은 바울의 수고가 아니라 바울이 전한 그 은혜의 말씀입니다. 그 은혜의 말씀이 전하는 분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장로들이 말씀을 붙들고 기억하면서 깨어 있으면 주님께서 그들을 붙들어 주시고 동시에 주님의 은혜의 말씀이 그들을 붙들어 주십니다. 내가 말씀을 붙들고 사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말씀을 나에게 주신 주님께서, 그리고 그 말씀이 나를 붙들어 주시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그 은혜의 말씀"은 죽은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가지시고 일하시는 도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패하지 않음에 대하여 이사야는 말하기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0-11) 하였고,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라고 하였다. 
    역사가 리챠드 그린(John Richard Green)은 말하기를 "가장 큰 도덕적 변화가 영국에 생긴 때는 영국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성경)에 속하였던 때이다."라고 하였고, 맹인 헬렌 켈러(Helen Keller)는 말하기를 "나는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왔는데, 그 말씀은 나의 걸음을 인도하는 지팡이와 같다."고 하였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05쪽).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붙잡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든든히 세웁니다. 든든히 세워서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십니다. 말씀이 믿음으로 굳건하게 붙잡고 세우고 거룩하게 함, 즉 성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이십니다. 지금도 성령님께서는 말씀을 효력 있게 하십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여 보내신 일에 형통하게 하십니다(사 55:10-11). 

    바울이 어떻게 사역을 감당했는지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은 자기가 어떻게 사역을 감당했는지를 장로들에게 상기시킵니다. 이것을 상기시키는 이유는 사나운 이리가 자기들을 따르게 해서(30절) 얻으려는 것이 물질적인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양이 가진 것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즉 그들이 가진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습니다(33절). 양들이 잘 산다고 해서 그것에 탐심을 가지지 않은 것입니다. 사나운 이리, 거짓 교사는 그것을 탐하여 빼앗습니다. 양들을 이익의 도구로 사용하는 일은 지금도 사이비 교주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양들은 굶주리고 메말라가고 목자들은 살이 찐다면 그들은 참된 목자들이 아닙니다. 

    사역자와 생활비

    바울은 자기가 쓸 것을 자기 손으로 충당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34-35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06쪽). 

     

    바울은 손으로 수고하여 그 물질로써 그의 동료들까지 도와주었다. 그것은 전도자로서 부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자급 전도를 힘썼다. 그가 여기서 그의 이와 같은 생활을 진술함은, 모든 다른 교역자들도 자기와 같이 해야 된다고 명령함이 아니다. 그는 도리어 교역자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 것을 당연한 일로 가르쳤다(고후 9:14; 고후 9:8; 갈 6:6; 빌 4:10, 16; 딤전 5:18; 딤후 2:6).
    주님께서도 전도자가 물질적 보수를 받을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마 10:10). 그럴지라도 교역자로서 명심할 것은, 자기는 그 보수를 사람들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줄 알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교역을 바로 해야 될 일이다. 그가 그와 같이 생각하게 되면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사역의 부족한 점을 찾아 회개해야 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 교역자가 생활비를 받지 못하는 처지에서 부득이 자급 전도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할 때에 그가 조심할 것은 복음전도보다 그 사업에 치중하지 말 것이다. 그가 만일 사업을 전도보다 시급하게 생각하여 사업에 치중한다면 사람들이 그에게서 복음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될 터이니, 그렇게 되면 그는 전도자의 위신을 잃는다.

     

    여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원칙이 나옵니다. 첫째는 교역자가 생활비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같이 하는 것은 비상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역자는 보수를 사람에게서 받는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수가 적다고 재정부를 맡은 사람이나 장로를 원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교역자의 경우 담임 목사를 원망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원망은 보수를 사람에게서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원망입니다. 보수가 적다면 오히려 자기 사역의 부족한 잠을 찾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적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자급 전도를 할 때에 복음 전도보다 사업에 치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도자의 위신을 잃어버립니다. 전도자의 위신을 잃는다면 사업이 아무리 잘 되어도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교역자는 이 세 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가장 복되신 하나님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35절).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지만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06쪽).

     

    주시기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는 독생자를 세상에 주셨으며, 독생자와 함께 만물을 신자들에게 주신다(롬 8:3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주시기만 하신 복된 분이시다. 그의 이 세상에서의 생애는 인류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었고, 최후에는 그의 생명까지 주셨다. 바울도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고후 6:10) 하는 사랑을 실천하였다. 주님의 제자가 된 신자들도 이웃에게 주기를 힘써야 한다.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가장 복되신 분이십니다. 오늘날에도 이 원칙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 복되게 합니다. 무엇을 받을 수 있을까보다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복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줄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로 서로 교제함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바울은 이 말을 하고 무릎을 꿇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36절).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은 하나님만을 신뢰한다는 간절함과 겸손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마음으로 기도한 것입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09쪽). 

     

    함께 기도한 후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이 크게 울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벵겔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10쪽).

     

    벵겔은 이 점에 대하여 말하기를 "가장 부드러운 정서가 여기에서 주장한다. 이처럼 눈물을 귀히 여기는 점에서도 성경을 당할 책이 없다. 눈물이 점점 없어지는 것도 그 후 시대들이 부패한 증거이다. 전 세대에는 남녀, 심지어 영웅들도 쉽게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여자들과 아이들에게만 남아 있다."라고 하였다. 

     

    그들이 눈물을 흘린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교제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정서는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 바울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에 크게 근심했습니다. 그만큼 사랑의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 사랑은 교회 안에 나타난 삼위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 안에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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