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24. 20:39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사도행전
목차
사도행전 25:13-27
찬송가 420장 너 성결키 위해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가이사랴에 옴
바울은 벨릭스에 이어서 새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 앞에서 가이사에게 상소했습니다(25:10-11). 이 상소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불러서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간계에서 벗어났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아그립바 왕과 그의 누이였던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왔습니다(13절).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아그립바와 버니게와 드루실라
13절에 나오는 아그립바 왕은 아그립바 2세입니다. 그는 사도행전 12장 1-2절에서 사도 야고보를 죽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로디아와 남매지간입니다. 아그립바 1세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둘, 합해서 세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 중 아들이 아그립바 2세이고 딸들 중에서 언니가 버니게이고 동생이 드루실라였습니다. 드루실라는 베스도의 전임 총리였던 벨릭스의 아내였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하거나 지혜롭다고 하는 것의 위험성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는 남매지간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불륜을 행하였기 때문에 아그립바 2세를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버니게에게는 아그립바 2세 말고도 많은 불륜관계가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나중에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디도 장군의 첩이 됩니다. 디도 장군은 나중에 황제가 되는데 로마 원로원이 유대인을 싫어하여 황후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아그립바와 버니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52쪽).
"아그립바 왕"은 아그립바 2세인데 헤롯 대왕의 손자이며, 사도 야고보(세베대의 아들)를 죽인 아그립바 1세(헤롯)의 아들이다. "버니게"는 그의 누이인데(Morgan) 아그립바가 자기 누이로 더불어 불륜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버니게는 이때에 자기 오라비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그 밖에도 그녀에게는 불륜의 생활이 많았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에는 갈키스의 왕자, 곧 그녀의 삼촌 헤롯과 결혼했던 일도 있었다.
그같은 사람들이 바울을 재판하는 자리에 앉게 된 것도 중요한 영적 교훈을 준다. 곧, 이런 어두운 사람들까지도 바울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는데(26:30-32) 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자칭하면서 바울을 죽일 죄인이라고 고소하였다(21:31; 22:22; 23:15; 25:15). 믿는다고 하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는 자들(눅 18:9)은 점점 더 어두워진다. 잠 26:12에 말하기를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고 하였고, 예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혹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 하)"고 하셨다.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하거나 지혜롭다고 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불륜관계라고 하면서 업신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처럼 어두운 자들이 바울의 사건에 대해서는 바울이 무죄인 것을 알았습니다(26:30-32). 딱 잠언 말씀 그대로입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들보다 미련한 자들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잠 26:12).
베스도가 아그립바에게 바울의 일을 고함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가이사랴에 여러 날 머물렀습니다. 그 때 베스도는 그들에게 바울의 일을 고했습니다(14-22절). 베스도는 바울을 변호하듯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철저하게 로마의 법질서에 근거해서 말한 것이었습니다(16절 하). 바울에게는 로마법에 저촉되는 어떤 악행의 혐의도 없었습니다(18절). 이 부분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53-454쪽).
유대인을 다스리는 집권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과 이 세상 정치의 구분을 알리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들에게 이 구분을 알려주되 어떤 문서나 말로 함보다 재판 사건을 통하여 함으로 더욱 현실적이고 실감 있게 알리게 된 것이다. 1) 그 때에 이 구분이 유대 사회에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 것은 복음 전파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2) 그리고 집권자들이 복음을 이해할 기회도 된 것이다. 바울을 세우신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 것이다. 그때에 복음으로 집권자들과 접촉할 길은 이런 방법(재판건)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죄 없는 죄수로서 재판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지혜로우시다.
예수라 하는 이
베스도는 바울이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19절). 베스도는 바울의 말을 잘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도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베스도가 예수님을 가리켜서 "예수라 하는 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54쪽).
베스도의 말에 "예수라 하는 이"(τινος Ἰησοῦ)라고 한 것은 어느 정도 업신여김으로, 혹은 무관심주의에서 사용한 말투였다. 그가 하나의 법관으로서 공정하기는 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에는 아직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후에 바울의 긴 설교를 듣고 바울을 미쳤다고 하였다(26:24). 다만 그가 재판정에서 잘한 것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켜 바울은 처벌 받을 정치범이 아니라고 밝힌 그것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간접적인 복음증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B. Wielenga).
베스도는 간접적인 복음증인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즉시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지위가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좋은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베스도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겠느냐고 물었습니다(20절). 베스도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려고 한 것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그가 종교적 문제에 대해서 자기의 무식을 인정한 것이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54쪽).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겠다고 했습니다(21절). 그 결과 바울은 유대인의 계략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까지 일어난 일을 간략하지만 소상하게 아그립바에게 알리자 아그립바는 자기도 바울의 말을 듣겠다고 했습니다(22절).
아그립바와 버니게와 베스도 앞에서 열린 재판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왔습니다(23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54쪽).
아그립바의 허영심
아그립바 왕의 이와 같은 태도는 자기의 허영심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의복이나 외모의 찬란함과 위엄스럽게 꾸민 것으로 위신을 세워보려고 한 것이다. 여기 "위엄(φαντασίας)"이란 말은 내용 없는 장식을 가리킨다. 그는 그의 부친이 그렇게 허식으로 위엄을 나타내며 신인 듯이 자기를 높이다가 천벌을 받아 죽은 사실(12:21-23)도 기억하지 못하고 같은 죄를 범하고 있다. 세속주의로 어두워진 자들은 이처럼 죄의 전철을 밟으며 멸망으로 달리고 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 올바르게 주석했듯이 "위엄(φαντασίας)"이란 말은 영어 판타지의 어원입니다. 즉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해서 겉모양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뜻합니다. 즉, 당시 행렬이 화려하고 볼 거리가 많았다는 뜻입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과 행렬이 다 들어오자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의 모든 무리가 바울을 가리켜서 살려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했지만(24절) 베스도 자신은 바울이 죽임을 당할 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25절). 그래서 바울의 상소를 받아들여서 황제에게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25절 하).
베스도의 고민
그런데 베스도에게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황제에게 보낼 때 상소할 자료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26절). 이 말은 바울에게 어떤 죄목을 특정해야 하는데 그럴 죄목이 없다는 말입니다(27절). 그래서 베스도는 아그립바가 온 김에 그 앞에서 바울을 자세히 심문해서 상소할 자료를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55쪽).
베스도가 바울의 사건을 가이사 앞에 상정키로 작정했으나 상소할 자료가 없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이제 그는 바울로 하여금 아그립바 왕의 재판을 받게 함으로 상소할 자료가 생길까 하고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의 이와 같은 처사로 말미암아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와 많은 고위층 인물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처사를 이용하셔서 그의 선을 이루시기도 하신다.
지금도 여러 모양으로 복음을 듣게 하심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복음을 듣게 하고 계십니다. 교회의 아주 초기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러한 놀라운 복음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에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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