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사도행전 26장 19-32절 | 아그립바 왕에게 담대히 전도하는 바울

2024. 6. 26. 17:00성서유니온 매일성경/사도행전

목차


    사도행전 26:19-32

    찬송가 446장 주 음성 외에는


    아그립바 왕이여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기 일에 대해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26:2). 그가 다행으로 여긴 것은 아그립바를 비롯해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 전할 기회를 얻은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특별히 아그립바 왕을 계속 불렀습니다(26:2, 7, 13). 여기서 바울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한 사람, 아그립바 왕을 향해서 복음 진리를 집중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이여"라고 또 그를 부르면서 바울은 자기가 만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계속합니다(19절). 

     

    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바울은 자기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거스르지 아니했다고 합니다(19절). 그는 전에 가시채를 뒷발질했습니다(26:14). 그랬던 그가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늘에서 보이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본 것은 객관적인 사건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64쪽). 

     

    극도로 반대하던 자가 그 반대하던 내용을 변호하며 전파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확신을 얻은 증거이다. 바울의 확신은 다메섹 도상에 갑자기 나타난 객관적 사태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햇빛보다 더 밝은 빛과 또 공중에서 들린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확신을 얻었다. 그 빛은 바울만 아니라 함께 가던 사람들도 보았고 그들이 다 같이 땅에 엎드러졌다. 이와 같은 현상은 주관적 심리의 산물일 수 없다. 그것은 바울로서 "거스르지" 못할 진리요 사실이었다. 여기 이른 바 "거스르지 아니하고"란 말(οὐκ ἐγενόμην ἀπειθὴς)은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이 시점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대적하던 그가 이제는 그 불가항력적인 초자연적 계시에 정복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확신을 얻은 그는 "다메섹"과 "예루살렘"과 "유대"와 "땅 끝까지" 가서 전도하게 된 것이다(20절). 그는 그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고전 9:16). 


    바울은 다메섹에서 시작했습니다(20절). 바울은 증언하는 일에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증언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는 예루살렘에서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유대 온 땅으로 나아가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이방인에게까지 증언했습니다. 바울이 증언한 것은 첫째,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둘째,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방법은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하던 것을 멈추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으로서 기쁘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각자 위치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증언하면서 다닌 바울을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21절, 21:27-30).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22절). 하나님께서는 천부장을 사용하셔서 바울의 생명을 구해주셨습니다(21:31-36). 바울은 생명의 보존을 입은 목적대로 계속 증언을 이어갔습니다. 그가 지금 아그립바 왕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계속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증언한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한 것밖에는 없었습니다(22절 하). 

    성경대로 이루어진 복음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예언한 것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는 것입니다(23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성경대로 이루어진 복음이었습니다(고전 15:3-4).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이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이 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도 공유하고 있는 성경의 바른 의미였습니다.

     

    가이사랴 해변

    먼저 다시 살아나사

    여기서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셨다고 할 때 "먼저"는 다른 이의 부활을 보증하는 처음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메튜 헨리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메튜 헨리, 사도행전 주석). 

     

    본문에서 먼저라 함은 시간적으로 먼저가 아니라 남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부활로써의 처음 부활이라는 뜻이다. 즉 그들이 예언했고 바울이 전한 것은 예수께서 부활한 자들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이었다. 이 말씀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셨다"(계 1:5) 말씀이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골 1:18)라는 말씀이나 다 같은 의미를 지닌 말씀들이다. 그는 여자의 첫 번 소생이 자궁을 열고 태어나듯이 죽음의 문(자궁)을 여셨다. 그리고 우리의 부활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리고 그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 왜냐하면 그분은 추수된 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 더 이상 죽지 않는 처음 분이 되셨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의 부활이 주의 권능을 힘입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그가 부활하셨을 때 "많은 성도들의 몸이 깨어나 거룩한 성으로 들어갔던 것이다"(마 27:52, 53). 

    네가 미쳤도다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바울의 말을 듣던 베스도는 현대주의자들이 보일 법한 반응을 보입니다. 베스도는 바울더러 미쳤다고 합니다. 바울의 많은 학문이 바울을 미치게 한다고 합니다(24절). 베스도가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주의는 이런 초자연적인 사건은 일어날 수 없다고 봅니다. 베스도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당시 사람들도 부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부활은 불가능한데 바울이 부활을 목격했다고 하고 또 성경이 부활을 증언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부활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계속 고수하는 방법은 바울이 미쳤다고 하는 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의 모든 학문이 바울을 미치게 했다고 할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즉 성경이 부활을 증언한다는 바울의 주장도 바울이 미쳤기 때문에 가당치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메튜 헨리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메튜 헨리, 사도행전 주석).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누명을 쓰고 대중들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그러므로 방백들이 선지자에 대하여 "그 미친 자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뇨"(왕하 9:11; 호 9:7)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는 미친 사람 또는 귀신들린 사람으로 간주되었었다. 

    정신이 온전함을 찬찬히 전함

    이에 대해서 바울은 베스도에게 똑바로 말합니다. 먼저 바울은 베스도에게 "베스도 각하여"라고 합니다. 베스도를 부르면서 정신이 온전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온전하고 정중한 태도로 베스도를 부른 것입니다. 바울은 미쳤다는 말에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치지 않았음을 정중한 태도로 드러냈습니다. 또한 그는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라고 합니다. 바울은 먼저 자기가 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Οὐ μαίνομαι). 미쳤다고 번역된 헬라어(μαίνομαι)는 분노로 눈이 돌아간 상태, 또는 귀신 같은 것에 현혹되어서 미친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정중하게 베스도를 각하라고 부르면서 화를 내지 않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 정신임을 나타내는 태도로 말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기가 말한 것이 참된 것, 즉 진리(ἀληθείας)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정신, 특별히 지성이 아주 온전하다고 합니다(σωφροσύνη).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라고 합니다. 아그립바는 이 일을 다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는데 자세하게 안다고 합니다.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여기서 "이 일"은 바울이 앞에서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가리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아그립바가 그의 조부 헤롯 대왕 때부터 유대 땅에 큰 화제거리가 되어 온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건에 대하여 모른다고 할 수 없는 처지였을 것이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66쪽).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라고 합니다(26절).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 받으심과 십자가와 부활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당시 예루살렘과 갈릴리와 온 유대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흩어진 유대인들에게까지 다 알려진 일입니다.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고 덧붙입니다. 이 말은 선지자를 믿는다면 선지자가 예언한 일도 믿는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일, 즉 그의 고난 당하심과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를 믿으신다면 예수님도 믿는 것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는 뜻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27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65-466쪽). 

     

    여기서 바울은 두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내세우면서 아그립바 왕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곧 1) 예수 그리스도에게 되어진 일은 유대인들에게 두루 알려진 것이니, 아그립바도 부인할 수 없다는 것과(26절) 2) 선지자의 예언 성취를 아그립바도 모른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27절). 예수님의 부활은 예언 성취의 사건이다. 선지자들을 믿는 자라면 그 선지자들이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있으랴! 

    냉소적 반응을 보이는 아그립바

    바울이 적극적으로 자기를 전도하자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28절)"라고 합니다. 자기는 이성적인 사람으로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66쪽). 

     

    아그립바 왕의 이 말은 바울의 전도에 대한 냉담한 반응이다. 그는 바울의 간곡한 전도를 일소(一笑)에 붙였다. 바울이 비록 죄인된 신분으로 법정에 섰지만 그는 아그립바와 거기 둘러 있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불타는 마음으로 복음ㅇ르 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적은 말"이라고 하며 냉소하였다.

     

    "그리스도인(Χριστιανὸν)"이란 말에도 이런 냉소가 담겨져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조롱하는 투로 불렀던 칭호가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자기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고 소원을 간절하게 피력합니다(29절).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있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66쪽). 

     

    그리고 그는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됨이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인 줄 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Εὐξαίμην ἂν τῷ Θεῷ)고 하였다. 

    바울은 무죄했으나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 즉 재판 자리에 앉아서 바울을 심리한 사람들은 모두가 바울이 무죄하다고 보았습니다(30-31절). 그렇지만 바울을 석방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였기 때문입니다(32절). 자기의 유익을 구한다면 속히 석방되는 것이 좋으나 바울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일전에 예수님께서 바울 곁에 서셔서 하신 말씀에 담겨 있었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23:11)"  바울은 베스도와 아그립바와 버니게와 그 외의 높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물론 누가 회심했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베스도도 아그립바도 바울의 무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만 그 마음을 돌이켰다고는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때 바울의 증언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온 세계 만방에 전파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차별이 없이 전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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