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사도행전 26장 1-18절 | 바울이 핍박자에서 전도자가 된 경위를 아그립바 앞에서 증언함

2024. 6. 25. 16:35성서유니온 매일성경/사도행전

목차


    사도행전 26:1-18

    찬송가 515장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벨릭스의 뒤를 이어서 총독이 된 베스도는 자기를 방문한 아그립바에게 바울의 일을 고했습니다(25:13-22). 베스도가 바울의 일을 아그립바에게 고한 이유는 상소할 자료를 얻을까 바랐기 때문입니다(25:26). 상소할 자료를 얻으려고 하는 이유는 황제에게 상소할 때 죄목이 없이 상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25:27). 문제의 핵심은 베스도가 바울에게 적용할 마땅한 죄목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25:25). 이렇게 되어 바울은 아그립바와 그의 누이 버니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1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말로 변론 기회를 줍니다. 아그립바의 이런 태도는 벨릭스보다는 나은 태도입니다. 벨릭스는 바울에게 말하라는 표시를 머리로 했었습니다(24:10). 그에 비하면 아그립바는 바울을 존중하는 듯이 보입니다. 여기서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말하기를 허락한 것은 그가 이 모임에서 가장 높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권력에 있어서는 총독들과 대등했지만 아그립바에게만 왕의 칭호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아그립바는 총독에 비해서는 높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판을 연 것은 베스도이지만 아그립바가 그 회의의 최고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바울에게 변론을 명한 것입니다(메튜 헨리, 사도행전 주석). 

     

    바울은 손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손을 들었다는 것은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ἐκτείνω)는 뜻입니다. 바울은 전혀 죄수답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견해를 자유롭게 피력하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그가 손을 뻗은 것에는 그의 말에 진리가 담겨 있으니 조용히 잘 들으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메튜 헨리, 사도행전 주석). 메튜 헨리는 갖가지 환상적인 장식으로 꾸민 아그립바와 버니게의 빛은 죄수의 신분으로 초라한 바울에게서 나오는 빛나는 광채에 비할 수 없다고 씁니다. 

    다행히 여김

    바울은 또한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기 신상 문제를 말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겼습니다(2절). 그 이유는 아그립바 왕이 유대 종교로 개종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메튜 헨리 목사님은 아그립바를 학자 출신으로 봅니다. 그는 유대 학문에 정통하였고 유대 종교의 관습에 대해서 전문가로서 그 관습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아그립바는 유대인들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는 유대인의 관습에서 야기된 문제도 척척 해결했다고 합니다. 아그립바는 구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는 문제로 야기된 바울과 유대인의 싸움을 잘 판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메튜 헨리, 사도행전 주석).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다행히" 여긴 것은 아그립바 덕분에 자기 일이 잘 해결되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가이사에게 상소한 입장입니다. 로마에 가기로 굳게 결심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 풀려나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다(26:32 참조). 바울이 다행히 여긴 것은 유대인의 관습을 잘 아는 아그립바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그립바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57쪽).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자기 존재의 필요가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만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빌 1:23-24 참조). 그는 여기서 많은 고위층 인사들 앞에 섰지만, 그들을 기쁘게 하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 믿고 담대히 서서 복음 중심으로 말하였다.

    너그러이

    다만 바울은 왕 앞에서 예의를 지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너그러이" 들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3절). 너그러이라는 말(μακροθύμως)은  "오래 참으면서, 인내심 있게"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의 작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전도하기로 마음 먹은 것입니다(26:26-29). 메튜 헨리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관한 설교를 할 때 최소한 필요한 조건은 상대편이 끝까지 너그러이 들어 주는 것이다(메튜 헨리, 사도행전 주석)."

     

    바리새인이었던 바울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바울은 자기가 바리새인의 생활을 했고 그것을 유대인들이 다 안다고 합니다(4-5절). 이에 대해서 메튜 헨리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바울은 비록 유대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예루살렘에서 그들과 함께 성장하였다. 비록 그가 최근에는 이방인들과 사귀어 오고 있지만(이것이 유대인들을 가장 격분케 한 조건이었다) 그가 사회에 첫발을 디딜 때에는 유대 민족에 정통하였고 또 유대 민족의 유익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받은 교육은 외국의 것도 아니고 또 모호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신앙과 학문이 융성하였던 예루살렘에서 자기의 민족 가운데서 교육받았다. 오래 전 일을 기억하는 모든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바울은 자신을 과시하는 일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그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가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으며 그가 유대교인일 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모든 관습까지 철저히 지키는 자라는 것을 증언할 수 있었다. ...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어느 바리새인들도 바울이 스스로 정하고 실천하였던 규칙을 그만큼 정확히 지킨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바리새인 가운데서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힐렐 학파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랍비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힐렐 학파는 샤마이 학파보다 더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소망 때문에

    이렇다면 유대인들은 바울이 자기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바리새인이라고 여길 것이 분명한데도 왜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가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소망 때문입니다(6-7절). 바울이 말하고 있는 소망은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그것입니다(6절). 또한 이 약속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것입니다(7절). 바울은 이 소망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입니다(7절). 이 소망은 바로 부활에 관한 소망입니다(8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 후대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6절).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가리키는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얻기를 바라는 것입니다(7절). 그런데 왜 그렇게 소망하는 것입니까? 소망하는 이유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58쪽).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기타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메시야(그리스도) 중심의 "소망"(ἐλπίδος)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 소망을 죽은 자의 부활로 해석하였다. 메시야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므로 그의 신자들도 마침내 죽었다가 다시 사는 축복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메시야는 우리에게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다(요 11:25). ...

    그 신앙 노선(바울의 신앙 노선)은 "약속"과 "소망"의 노선이라는 것이다. "약속"이란 명사(ἐπαγγελία)와 "바라는"이란 동사(ἐλπίζει)는 서로 관련되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메시야께서 오시리라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소망"(바라는 바)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들이 메시야로 말미암아 세상 끝날에 부활의 소망을 가진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바울은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라고 반문합니다(8절). 여기에서 고대인은 비이성적이어서 부활을 잘 믿게 되었을 것이라는 부활 반대론자의 논리가 깨집니다.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마찬가지로 부활을 못 믿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 현대인과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부활을 믿게 된 경위

    바울은 이어서 자기가 부활을 믿게 된 경위를 전합니다. 그는 처음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했습니다(9절).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특별히 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고 또 그들을 죽일 때 찬성 투표를 했습니다(10절). 그리스도인이 회당 예배에 참석하면 그가 회당 규례를 어겼다고 고소해서 형벌을 가했습니다. 형벌을 가할 때 그 벌을 받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모독하지 않으면 계속 형벌을 가했습니다(11절). 그는 정말 하나님에 대한 훼방자요 핍박자였습니다(딤전 1:13). 바울은 처음에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처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러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14-18절). 예수님께서는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바울 일행을 비추셨습니다(13절). 그 빛이 너무 강력해서 모든 이들이 엎드러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엎드러뜨리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엎드러뜨리신 목적은 그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62쪽). 그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도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14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당하는 박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한 박해를 당신님을 향한 박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억울하게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고난입니다(골 1:24). 즉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교회로서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고생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박해 당하는 자들이 고생인 것 같으나 아닙니다. 박해 당하는 자들에게는 영광이요 박해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고생입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고생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14절). 가시채는 가축을 앞으로 몰기 위해서 가축 뒤에 두는 끝이 뾰족한 막대기입니다. 밭 가는 소가 앞으로 가지 않으면 채찍질해서 앞으로 가게 합니다. 그런데 채찍에 맞은 소는 뒷발질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뒤에 있는 가시채에 더 찔리게 됩니다. 밭 가는 소는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가지 않고 뒤로 가거나 멈추어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거스르는 소는 자기만 상하게 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그리스도와 부활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앞으로 전진하는 교회를 멈추려고 했습니다. 뒤로 가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가시채에 찔릴 뿐 바울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능력을 벗어난 일을 하려고 하니 고생만 할 뿐 아무 성과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63쪽). 

     

    누구든지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꾸러뜨림이 된 자는 그로 말미암아 일으킴이 될 소망이 있다. 그 이유는 그를 거꾸러뜨리신 이가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그 소망은 오직 주님께만 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일으키시고 그를 증인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십니다(16절).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것과 또 주님께서 장차 나타날 일에 대해서 증언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본 것이 사도의 자격 중 하나입니다(고전 15:8-9). 주님은 또한 바울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에게 또 나타나셨습니다(고후 12:1, 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62쪽).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놀라운 일을 본 것에 대해서 전합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환상과 계시를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일어나는 일들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바울을 구원하셨습니다(17절). 사실 지금 재판 자리에서도 바울을 보호하시고 계셨습니다. 구원하신 목적은 그들에게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듣는 자의 눈이 뜨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옵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죄 사함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 즉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됩니다(18절). 이 일이 복음 전도로 인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부분을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사도행전 주석, 463쪽). 

     

    복음을 전함으로 듣는 자의 심령의 눈이 열리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 이 일은 그가 사람들의 사역을 통해서 하시는 것이므로 그들이 복음을 전해야 된다(롬 10:14-15 참조). 복음의 말씀은 그 듣는 자로 하여금 "사단의 권세에서" 놓이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해준다. 그만큼 복음은 능력 있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사람이 영생의 기업을 누리는 데 이르게 되는 비결이 사죄(ἄφεσιν ἁμαρτιῶν)와 신앙(πίστις)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에 "거룩하게 된다"는 말이 첨부되었으나 실상 그것은 사죄와 신앙의 결과이다. 사죄와 신앙으로 얻도록 하시는 구원운동이야말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이루어 주시는 구원운동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러면 왜 복음 전도를 열심히 해야 할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복음 전도를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 전도를 사람에게 맡기시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또한 놀라운 은혜입니다. 복음 전도자는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면 위에서 언급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행하신다고 믿고 전해야 합니다. 

     

    사죄와 신앙의 결과 거룩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성화는 날마다 회개하고 더 믿는 것으로 구성됩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믿음의 성장이 성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성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지혜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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