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열왕기상 19장 1-21절 | 엘리야 승리의 뒷 이야기, 진정한 승리란? 세미한 음성과 하사엘, 예후, 엘리사

2023. 10. 21. 16:57성서유니온 매일성경/열왕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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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열왕기상 19:1-21

    찬송가 388장 비바람이 칠 때와


    엘리야의 승리

    엘리야는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약 5:17). 그 결과 정말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합은 이스라엘과 주변 모든 나라에 엘리야를 찾으려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아합은 비가 오지 않는 원인을 엘리야에게 돌렸습니다(18:17). 이제 모든 백성이 엘리야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상황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무대였습니다. 그 무대에서 엘리야는 큰 승리를 거둡니다. 능력 대결을 펼쳐서 여호와께서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증명합니다. 그 결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죽이고 그 땅에 더이상 바알에게 제사할 제사장들이 없게 합니다. 그렇게 하고 비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실 그는 기도하기 전에 이미 큰 비를 예견했습니다(18:41). 하지만 그는 다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머리를 무릎 사이에 넣고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구름 한 점 없을 때 기도를 시작해서 일곱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여(18:42-43) 손바닥만한 구름을 봅니다. 그 구름을 본 엘리야는 아합에게 비에 막히지 않게 먼저 내려가라고 합니다(18:44). 아합은 마차를 타고 가고 엘리야는 달려가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엘리야가 마차 앞서서 달려가는 기적을 아합에게 보입니다(18:45-46). 엘리야는 이렇게 크게 승리했습니다. 

    승리자에게 임하는 살해 위협

    승리한 엘리야는 승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위협에 맞닥뜨립니다.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2절)" 그 위협은 바로 살해 위협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죽은 것처럼 엘리야도 죽이겠다는 위협입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노기가 분분해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위협한 것입니다. 이세벨이 그렇게 한 이유는 아합이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바알 선지자들을 칼로 죽였는지를 고했기 때문입니다(1절). 아합은 마치 이세벨이 왕이고 자기는 그 왕의 신하인 것처럼 이세벨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아합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기회를 차버리는 아합

    아합에게 힘이 될 사람은 이세벨이 아니라 엘리야였습니다. 다윗에게 갓과 나단이 큰 힘이 되었던 것처럼 엘리야도 아합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로 그 하나님이신 것을 친히 경험한 아합은 엘리야를 중용해서 곁에 두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의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세벨을 선택했습니다. 누구를 선택하느냐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 결과는 뒤에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아람의 침공으로 나라가 위태해지고 거기에 더해서 자기 목숨도 잃는 것입니다. 아합이 엘리야에게 물어서 이세벨을 내쫓고 폐위시키고 나라의 우상을 다 멸했다면 이스라엘 역사는 다르게 흘러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고자 하는 것에 동조했습니다. 

    엘리야의 실망과 낙심과 간구

    엘리야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승리가 크고 영광스러운 만큼 그 결과에 대한 실망감은 깊고 어두웠습니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3절)" 그는 브엘세바로 도망했습니다. 여호와를 대표해서 큰 씨움에서 승리한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브엘세바는 남유다에 속한 곳으로 남방 사막 바로 위에 위치한 곳입니다. 그러니까 북이스라엘에서 도망하여 남유다를 가로질러서 최남단까지 도망간 것입니다. 브엘세바에서 그는 자기 사환을 거기에 머물러 두고 유다 광야로 들어갔습니다(3-4절). 하룻길을 걸어서 광야 안쪽으로 쭉 들어갔습니다. 거기에 있는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죽기를 구했습니다(4절).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가 죽기를 구할 때에 그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라고 아룁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시키신 모든 일을 다 행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제 더 살아야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고 구합니다. 여기서 생명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네페쉬(נֶפֶשׁ)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내 영혼을 거두어달라는 말입니다. 즉 자기 영혼을 거두어 이제 하나님께로 가서 평안히 쉬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매일성경 | 열왕기상 19장 1-21절 | 엘리야 승리의 뒷 이야기, 진정한 승리란? 세미한 음성과 하사엘, 예후, 엘리사

    여호와의 천사, 구약에 등장하는 그리스도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 엘리야를 거두어가실 마음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셨습니다(5절). 여기서 천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신저, 즉 사자(מֲלְאָךְ)입니다. 그 사자는 엘리야를 어루만지면서 그에게 일어나서 먹으라고 합니다. 보니까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었습니다(6절).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위해서 구운 떡과 생선으로 조반을 준비해 주시는 장면과 같은 장면입니다. 역시나 7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7절)" 여기서 "여호와의 천사"는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앞에 5절에 나온 사자와 같은 사자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께서 실의에 빠진 사명자들에게 위로자로 임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그러셨고 베드로에게도 그러셨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사자가 준 음식을 먹고 40주 40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렸습니다(8절). 브엘세바에서 호렙산까지는 40일까지 걸리는 거리가 아닙니다. 물론 호렙 산의 위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떻게 보아도 40일까지는 걸리지 않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땅까지 거리가 직선 거리로는 약 15일 정도, 그리고 행진한 대로 간다고 해도 약 30일이면 가서 닿을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러니까 브엘세바에서 호렙산 까지는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는 거리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40주 40야를 걸려서 호렙산에 도착했습니다. 이 40주 40야는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시간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머문 시간인 40년과 같은 숫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광야에서 40일 간 금식하셨습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이 40주 40야는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여정과 비슷한 여정을 겪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가지 권능과 세미한 음성

    엘리야는 40주 40야를 걸려 호렙에 도착하여 한 굴 속에 들어가서 머물렀습니다(9절). 그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엘리야가 그 곳 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9절)"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10절)" 엘리야의 말은 일면 맞는 면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야 혼자 남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바댜가 숨긴 100명의 선지자도 당시 아직 살아있었을 것입니다(18:4). 그렇기 때문에 엘리야의 말은 지나친 말이었습니다. 게다가 주의 백성 모두가 다 우상에 빠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직 7,000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18절). 엘리야의 이 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앞에서 권능을 베풀어 보여주십니다.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을 보여주시고 지진을 보여주시고 불을 보여주십니다(11-12절). 그런데 그러한 권능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 권능이 지나간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세미한 소리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였습니다(12절).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세미한 소리 가운데 계심을 알아차리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렸기 때문입니다(13절). 하나님께서 갈멜 산에서 불로 응답하실 때 백성들은 거기에 하나님께서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 기적을 보고 여호와 그가 그 하나님이시로다 라면서 엎드렸습니다. 엘리야는 그것으로 승리하고 다 끝날 줄 알았습니다. 아합이 자기를 중용해서 우상을 깨뜨리고 나라를 개혁시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승리는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승리는 권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가운데 있었습니다.

    세미한 음성

    세미한 음성 안에 승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다가오실 때에 항상 있는 것이 바로 이 세미한 음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미한 음성으로 들릴까 말까한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하는 음성입니다. 이 음성은 믿음을 주는 음성입니다. 성도를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이 음성을 듣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죄를 자복합니다. 이것은 실제 음성으로 들리기도 하고 설교 중에 마음에 감동하심으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성경을 읽다가 깨달으로 말씀하시기도 하는 음성입니다. 세미하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 붙잡아야 하는 음성입니다. 이 음성을 들은 자가 돌이켜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얻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기 시작합니다. 권능은 겉으로는 대단해 보이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굴복은 할 수 있을지언정 속 깊이 회개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표적을 보이라는 바리새인들에게 표적 보이시기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표적을 보이더라도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세미한 음성으로 들어 그것을 받아들여야 회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를 다시 세우시면서 하신 말씀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고발한 내용에 대해서 공의로 갚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먼저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십니다(15절). 하사엘은 아람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쳐서 쇠약하게 할 것입니다. 그 후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십니다(16절). 예후는 바알 숭배자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아합의 집을 멸할 것입니다. 또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엘리야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16절 하).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세우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끝까지 긍휼히 여기시겠다는 표시입니다.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17절)" 세 명을 세워서 바알 숭배자들을 철저히 심판하시겠다고 하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바알을 숭배하지 않은 7,000명을 남기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이 말씀은 신약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겨주셔야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여기 남은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남긴 자라는 뜻인 동시에 신약의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7은 신약 시대 교회의 숫자요 이방인의 숫자입니다. 창세기 10장의 70족속에서 7이라는 숫자가 등장하고 사천 명을 먹인 후 남은 광주리가 일곱 광주리라는 데에서 7이라는 숫자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먹이신 사천 명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또한 교회의 일을 맡아 보는 집사는 일곱 집사입니다. 이렇게 7은 이방 족속들을 상징하는 숫자인데 여기에 딱 7과 많다는 의미의 천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대신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방인들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러한 의미를 담아서 이 구절을 인용했습니다(롬 11:1-12). 즉 여기 남은 자들은 은혜로 남은 자들입니다. 엘리야는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그 말에 대해서 은혜로 답하셨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세례 요한과 예수님

    그 은혜의 대답은 엘리사를 세우는 것으로 이어집니다(19-21절). 엘리야와 엘리사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엘리사를 세우셨습니다. 엘리사(אֱלִישָׁע)는 그 이름의 뜻이 "하나님이 구원이라(God is salvation)"는 뜻입니다. 엘리야(אֵלִיָּה)는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시라(Yah is God)"라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증언했습니다(요 1:33-34). 이 말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엘리야의 사역이 세레 요한에게 이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은 "구원자"입니다. 이렇게 엘리야와 엘리사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들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를 세우신 것은 끝까지 반역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남은 자들을 남기셔서 구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이 일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저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소속 목사입니다.

    현재 자비량으로 군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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