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열왕기상 8장 1-11절 | 여호와의 언약궤를 성전에 메어 올림

2023. 9. 20. 16:57성서유니온 매일성경/열왕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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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열왕기상 8:1-11

    찬송가 20장 큰 영광 중에 계신 주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우두머리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소집함 

    성전의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 가운데 계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5장부터 7장까지 성전 건축에 관한 기사가 나오고 이 성전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리는 장면이 8장에 이어집니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리려고 할 때 "이스라엘의 장로와 모든 우두머리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에게로 소집"했습니다(1절). 여호와의 언약궤를 모셔 올리는 일은 솔로몬 한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백성의 일(일천 번제도 백성의 모든 대표자들과 함께 드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건축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을 건축한 것은 하나님께서 거기에 임재하셔서 택하신 백성에게 지극한 복과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와의 언약궤를 맞이하는 일은 모든 백성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백성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다 불러 모은 것입니다. 그것을 2절에서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모였다고 기록합니다. 실질적으로는 백성의 대표자들이 모인 것이지만 그것은 곧 모든 백성이 모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와 십계명 

    그렇게 모든 백성이 모여서 다윗 성에서 성전으로 메어 올린 것은 여호와의 언약궤입니다. 이 표현에서도 하나님과 백성들의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의 말씀이 언약궤 안에 있는 십계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십계명의 말씀은 언약의 말씀입니다. 제 1계명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너는 나 외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런데 원문의 문법은 명령형이 아니고 미완료형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옮겨서 번역하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않을 것이니라"가 됩니다. 즉 이 말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고 약속입니다. 이 말을 잘 듣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키고자 하는 자는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 앞에 다른 신들을 두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약속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우리는 전적으로 무능해서 이러한 명령을 우리 힘으로는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 안에 죄성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성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하도록 우리를 끌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 죄와의 싸움에서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싸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로 이끄셨습니다. 어떻게 승리하셨냐면 십자가에서 우리와 함께 죽으심으로 승리로 이끄셨습니다. 우리 안에 죄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자기에게 두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언약의 말씀입니다. 이 언약의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이 궤를 가리켜서 언약궤라고 하는 것입니다. 법궤라도고 부르는데 여기서는 언약을 강조해서 언약궤라고 썼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언약궤를 모셔 올린 때 

    이 언약궤를 모셔 올린 때는 에다님 월입니다. 에다님이라는 말은 "흐르는 시냇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에다님 월이 칠월인데 칠월에는 대속죄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시냇물에 씻겨 내려간다는 의미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언약궤를 모셔 올리기 위해서 "일곱째 달 절기"에 모였다고 합니다(2절). 이 절기는 솔로몬 성전을 봉헌한 절기입니다. 유대 달력으로 7월 15일부터 장막절이 시작되는데 그 전 7월 8일부터 14일까지 성전을 봉헌했습니다. 이 장막절 전에 그들이 회막(4절)과 언약궤를 성전에 모셔 놓고 장막절을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장막에 거하시지 않으시고 그들 안에 영원히 함께 거하신다는 의미로 성전에 모셔 놓고 나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이끄신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장막절을 이어서 지킨 것입니다. 언약궤를 모셔 올리는 일은 이렇게 의미있게 이루어졌습니다. 

    수효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제물로 제사를 드림 

    모든 백성들을 대표하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이르자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멨습니다(3절). 그 때에 여호와의 궤와 회막과 성막 안의 모든 거룩한 기구들을 메고 올라갔습니다(4절). 그 때에 솔로몬과 이스라엘 회중이 다 궤 앞에서 양과 소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제물의 수가 많아서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다고 저자는 기록합니다(5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 제사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의 죄를 씻는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뿐인데 그 가치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생명값보다 귀한 가치입니다. 무한한 가치를 지닌 속죄제사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드리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죄와 상관없이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룹들의 날개 아래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처소로 들어갔는데 그 처소는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고 합니다(6절). 그룹들은 날개로 궤와 채를 덮었습니다(7절).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셔서 그 누구도 함부로 하나님께로 침범할 수 없습니다. 오직 언약 백성만,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냐 할 때 언약궤 안에 두 돌판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존재를 형상으로 나타내시는 것을 철저하게 금하셨습니다. 대신 말씀으로 당신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만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지켜야 합니다.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9절에 보면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라고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9장 4절에 의하면 본래는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는 없어졌고 두 돌판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견해로 보는데 첫째 견해는 법궤가 블레셋 민족에게 빼앗겼을 때(함상 4:11-5:5) 분실되었다는 견해입니다.  다른 하나는 솔로몬 왕이 그 두 가지 물건을 지성소의 다른 곳에 두었다는 견해입니다. 하여튼 당시에는 만나와 싹난 지팡이는 없고 두 돌판만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만나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먹이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싹난 지팡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의 지도에 반역하여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 다 광야를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심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마치 에덴 동산과도 같이 거기에 성전을 짓고 함께 거하십니다. 광야 생활이 종식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들에게 반역할 일, 즉 하나님께 반역할 일도 없습니다. 물론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전 건축과 하나님의 임재는 에덴의 회복을 나타냅니다. 또한 이것은 마지막 날에 모든 원수를 발등상 아래 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좌정하셨을 때를 가리킵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 안에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만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 때는 그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가 밝히 드러나는 때입니다. 즉 사람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이미 이루어진 때입니다. 

    채 끝이 내소 앞 성소에서 보이나 

    8절에 채가 내소 앞 성소에서 보였다는 말씀은 언약궤의 채 끝이 성소쪽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유대 랍비들과 최근 학자들은 우리가 아는 보통 언약궤의 그림과는 다르게 봅니다. 우리가 아는 그림은 채가 언약궤의 세로 면쪽으로 끼워져 있는 것인데 언약궤를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생각할 때는 다른 그림이 나옵니다. 채는 언약궤의 가로면 쪽으로 끼워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언약궤는 가로 면으로 놓였고 채는 앞으로 튀어나왔을 것입니다.

    열왕기상 8장 1-11절 | 여호와의 언약궤를 성전에 메어 올림

     

    채가 앞으로 튀어나온 것은 치수를 잘못 계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임재가 감춰져 있으면서 동시에 나타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하나님께서 알리시는 데까지 알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감추시는 것은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감추시는 것까지 들추려고 합니다. 이것은 큰 죄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 즉 마치 채가 밖으로 나와서 성소에서는 보이도록 된 것처럼 말씀하여 알 수 있게 하시는 것은 최대한 알려고 해야 합니다만 감추시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그 채가 오늘까지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저자가 열왕기서 말씀을 썼을 때는 아직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지 않았을 때로 보입니다. 열왕기서의 저작 연도를 주전 561년에서 538년으로 보는데 그 때는 바벨론 포로 말기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 때는 책이 다 완성되고 편집도 끝난 때이고 저자가 이 부분을 쓸 때는 아직 솔로몬 성전이 건재했을 때였을 것입니다.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누가 여호와께 올라갈 수 있을 것인가?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했습니다(10절).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에는 항상 구름이 빽빽하여 하나님을 가렸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감추시면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렇게 구름이 빽빽하게 있음으로 제사장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11절). 이것은 성막을 지었을 때에도 일어났던 현상입니다. 출애굽기 마지막에 보면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다고 나옵니다(출 40:34). 그 때에 모세마저도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기 때문입니다(출 40:35). 모세도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이 거룩하고 놀랍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과 같은 사건이 성전을 건축했을 때에도 일어납니다. 이 말씀은 똑같은 질문을 하게 합니다. 즉 누가 영광의 하나님께 들어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출애굽기가 레위기로 이어집니다. 누가 여호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제사로 죄 씻음을 입은 제사장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냐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씻음 받은 왕 같은 제사장들, 즉 우리 믿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저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소속 목사입니다.

    현재 자비량으로 군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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