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예레미야 29장 1-14절 |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2024. 7. 6. 20:41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반응형

목차


    예레미야 29:1-14

    찬송가 278장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징계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 하나냐가 죽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냐는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습니다(27:17). 하나님께서 하나냐를 죽이신 이유는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말이 사실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야 백성들이 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징계 중에서도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살 길을 보여준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살 길을 보여주십니다. 예레미야는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1절). 

     

    1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고 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냈는데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잡혀간 포로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먼저 장로들이고 그 다음으로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고 그 다음으로는 모든 백성입니다. 이 편지를 먼저 나이 많은 장로들, 즉 사회적 경험이 많은 지도자들이 읽고 그 다음으로는 종교 지도자들이 읽고 그 다음으로는 모든 백성들이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주석에서 먼저 장로들이 나오는 것에 대해서 "환난 때에는 노인들을 지도자로 생각할 만하다"라고 썼습니다. 다음으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나오는 것에 대해서 "이들은 일찍이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자들 편에 있었을 것이다(26:11).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아직도 그들을 상대로 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선히 지도한다"라고 합니다. 

    지도자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편지의 수신자로 먼저 등장하는 것은 이들이 백성들을 지도할 책임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먼저인 것은 백성들을 의의 길로 인도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잔치 자리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나 이름이 먼저 불리는 것은 명예를 탐하는 자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에게 명예가 주어지는 이유는 그에게 주어진 책임 때문입니다. 즉 맡겨진 백성들을 잘 지도해야 하는 책임 때문에 이름이 먼저 불리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항상 이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은 자에게 많이 달라고 하십니다(눅 12:48).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2   그 때는 여고니야 왕과 왕후와 궁중 내시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기능공과 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3   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 편으로 말하되

     

    예레미야가 편지를 보낸 때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여고냐, 즉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을 사로 잡아 간 후입니다(왕하 24:12). 그 때 사로잡혀 간 사람에 대해서 열왕기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비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4:14)" 여기에 더해서 용사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 명과 용감하여 싸움을 한 만한 모든 사람들이 잡혀갔습니다(왕하 24:16). 그 결과 비천한 자, 즉 용기나 힘이나 지혜에 있어서 전혀 싸울 수 없는 사람들만 유다 땅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왕하 24:14 하). 박윤선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72쪽). 

    특별히 부유층과 지식층과 권력층의 사람들이 포로 되어 갔으니, 이것은 유다 민족으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려는 방침이었다. 유다 민족이 그만큼 비참해진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내리신 벌이었다. "내시들"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사리심(סָּרִיסִ֜ים)이니, 여기서는 이것이 높은 관리들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유다에 남은 사람들은 실상 바벨론에게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벌하신 것으로 예레미야가 바벨론 왕을 섬기라고 한 것(27:5-7)은 하나님께서 낮추신 일, 즉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계를 달게 받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냐 같은 거짓 선지자가 일어날 정도로 사람들은 이 말씀을 싫어했습니다. 

    엘라사와 그마랴

    예레미야가 편지를 써서 들려 보낸 사람들은 엘라사와 그마랴였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72쪽). 

    "엘라사"는 요시야 왕을 돕던 자로서(왕하 22:8-14), 예레미야에게 잘 수종들던 자이다(참조. 왕하 22:12; 렘 26:24). "그마랴"도 선한 사람으로서 요시야 왕 종교 개혁에 가담하였다(왕하 22:8; 대하 34:14).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일을 위하여 진실하고 충성된 일꾼을 요구하신다(딤후 2:2).

     

    당시는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곳곳에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사용하셔서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아무리 암울해 보이는 시대라도 언제나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남은 자들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왕상 19:18).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버림 받은 사람들이 아님

    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예레미야는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에게도 살 길을 전합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잡혀간 당신님의 백성을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버림 받은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그들에게 전해주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라고 말씀하셨듯이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또한 그들은 비록 포로로 잡혀가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는 없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편지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4절)" 하나님께서는 포로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포로들은 하나님의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즉 하나님에게서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버림 당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징계를 달게 받으라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 말씀은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라는 말씀입니다(5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72쪽). 

    곧, 유대인 포로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멀지 않아 해방된다는 거짓말)을 듣지 말고, 그곳에서 영구한 생활 대책을 세우라는 뜻이다. 만일 그들이 속히 해방될 줄로 잘못 알고 마음을 낙착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오래지 않아서 원망과 낙심과 불신앙에 떨어질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포로 생활이 쉬이 끝나지 않고 70년이나 계속되겠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가 포로로 잡혀가지 않은 사람에게 전한 말씀과 궤를 같이 합니다. 예레미야는 포로로 잡혀가지 않은 사람들에게 단 마음으로 징계를 받을 것을 말씀했습니다. 즉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메라고 전한 것입니다(27:11). 이 말씀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포로 생활이 오랠 것이라고 전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단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계를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반란을 계획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고 동시에 그들 스스로의 생명을 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방지하시고자 위와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6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포로들에게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자녀들도 그 땅에서 결혼을 시키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그 수효가 줄어들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6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님의 백성들이 살고 또 번성하기를 원하십니다(창 15:5). 그 수가 줄어들고 약해지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어떤 교역자는 양보다 질이라고 하면서 자기는 교인수를 늘리는 것보다 그들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것에 중점을 두겠다고 합니다. 이 말은 교역자가 교인의 숫자로 자기 능력을 증명하려는 세태에 대한 반작용으로 옳은 말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창 1:28). 이 시대에 교회는 교회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동시에 교회는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복음 전하는 사명에 교회 전체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집을 채워야 합니다(눅 14:23).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복음 전파를 등한시하면서 고상한 척, 바른 척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이 거주하는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 성읍이 평안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백성들이 거주하는 성읍이 평안해야 그들도 평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7절). 이것이 역사가 지금도 유지되는 이유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인류가 멸망할 위기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인류는 지금도 존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자들, 즉 당신님의 교회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님께 평안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교회를 중심으로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교회 덕분에 세상이 존속되고 유지되게 하시면서 택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73쪽). 

    하나님의 백성은 가는 곳마다 남들에게 평안을 줄 자들이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함으로 만민에게 축복의 기관이 되어야 한다(창 22:18). 특별히 이때에 유다 민족이 바벨론에 잡혀간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신 결과니, 그들이 잘 순종하여 사로잡혀 간 땅에 평안을 주도록 힘써야 옳은 것이었다.  

     

    유대인의 고난은 이방인에게 복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흩어져서 전 세계에 회당을 세웠습니다. 그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 세계에 빠르게 전해졌습니다. 백 년도 안 되어서 당시 로마가 통치하는 모든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이 일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기도 응답

    유대인이 바벨론에 의해서 잡혀갔을 때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성읍이 평안하도록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의 생명은 바벨론이라는 제국이 멸망하는 와중에도 보호를 받았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 성을 포위했을 때 성읍에는 넉넉한 식량이 있었습니다. 성읍 안에 그 누구도 기근에 시달리지 않았습니다. 벨사살 왕이 술잔치까지 벌일 정도였습니다(단 5:1-4). 그런데 그날 밤에 벨사살은 죽임을 당했습니다(단 5:30). 즉 성읍 안에 살던 민간인에 대한 피해는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고레스는 수로로 병사들을 침투시켜서 수비하던 군인들과 벨사살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고레스의 기념비에는 "나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사들은 바벨론으로 평화롭게 행진해 들어갔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다니엘서 5장 30절에 보면 메데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다고 나옵니다. 당시 고레스가 이끌던 군대는 페르시아와 메데 연합군이었습니다. 여기서 메데 사람 다리오는 고레스 대왕의 삼촌이자 장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는 벨사살와 고레스 대왕 사이 2년을 다스린 인물인데 성경에만 나오는 인물입니다. 여기에서 초점은 바벨론 성에 메데와 페르시아 연합군에 의해서 함락되었지만 그 안에 살던 유대인들은 평안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포로 귀환과 종말의 때

    8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9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유다 땅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바벨론에 잡혀간 포로들 가운데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간 유다 민족에게 곧 포로 상태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유혹했습니다. 그들은 2년 안에 돌아오게 되리라고 했던 하나냐의 예언을 전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렘 28:1-4). 하나님께서는 그런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하셨습니다(8-9절). 이들의 말은 회개하도록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이유는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포로로 잡혀가서 해야 할 것은 가슴을 치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징계를 달게 받는 방법이고 그것이 또한 살 길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의 살 길을 가로 막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70년이 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절). 즉 70년이 찬 뒤에 포로 생활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한을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 백성들로 하여금 인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번성하고 그 수가 줄어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중에 다니엘은 이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단 9:2). 그 때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단 9:24-27). 이렇게 볼 때 포로 생활의 끝은 곧 종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를 받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 극치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 시대가 언제 끝날 지 그 때와 기한은 아버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다만 이 때에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면서 우리는 일반 생활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일반 생활을 충실하게 영위해야 함

    박윤선 목사님은 일반 생활을 충실하게 영위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교문을 남겼습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74쪽). 

    그들에게 농사를 지으며 가정을 이루라고 하셨으니, 이런 생활 형태는 신앙에 유익한 것이다. 사람이 생계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신앙도 타락하기 쉽다. 신앙은 결코 공중누각을 짓는 것이 아니라, 현실 생활을 그 운동장으로 삼는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가정을 가졌고 자녀를 낳았다(창 5:21, 22). 물론 은사는 각각 달라서 바울과 같이 어떤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고 주님을 잘 믿은 사람들도 있다(마 19:12; 고전 7:7). 

    그들은 그 당면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여 바로 살아 나가는 훈련을 가져야 될 것이었다. 인간은 그 당면한 환경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ㅇ니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덴마크(Denmark)의 역사를 잘 안다. 그 나라 민족은 모든 다른 나라 민족들처럼 고대에는 대단히 미개하였었다. 주후 800년부터 몇 백 년 동안은 그 민족이 해적 생활을 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을 받은 후부터는 해적 생활을 버리고 농업국으로 발달하여 현재와 같은 문명국이 되었다. 그 나라가 한때는 외국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국토를 잃기도 하였으나, 달가스(Dalgas, 1824-1895)란 귀한 인물이 일어나서, "밖에서 잃은 국토 안에서 찾자!"라는 표어를 세우고 국토를 개간하여 많은 생산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바로 사는 민족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낙심하지 않고 소망을 가지고 분투노력한다. 

    ... 그 때에 바벨론에 포로 된 유대인들은 그 사회에 대하여 좋은 일에도 협력할 마음이 없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신자들이 그 어디로 가든지 그 사회에 복이 되기 위하여 의리로 힘쓰기를 원하신다. 그 이유는 인생의 갈 길은 언제나 의리여야 하고, 또 그것으로써만 형통하기 때문이다. ... 사람이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공익을 힘쓰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리에 속한다. 의리를 행하는 자는 남들에게 유익을 주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유익을 받는다(잠 11:4). 공익을 위하는 것은 특별히 사람들이 단체로 잘 되는 길이다. 무엇보다도 의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우리의 처세는 언제나 의리를 택하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 

    재앙을 당할 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1절의 말씀은 항상 재앙을 당하는 신자들에게 소망을 줍니다. 이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78-379쪽).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그의 자녀에게 대하여 부모의 사랑보다 더 깊은 사랑으로 생각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들에 대한 그의 모든 행동 원리는 모두 다 그들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나타난다. 그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도, 그들로 하여금 그 재앙 가운데서 망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결국 평안케 하고 그들의 영혼이 장래의 소망을 갖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참 사랑은 필경 평안을 가져오나 그 나타나는 방식은 평안이 아닐 때도 있다. 어떤 때에는 그것이 그 자녀들을 아프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박윤선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아프게 하는 다섯 가지 경우를 듭니다. 1) 어떤 때에는 신자들에게 아픈 징계가 오나니, 그것은 필경 그들의 영혼을 잘 되게 하려는 것이다. 2) 하나님은 질병으로도 그 자녀들을 유익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 중에도 병으로 앓는 일이 많다. 3)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혹시 죽을 뻔하게 되는 환난을 허락하시므로 그들을 유익하게 하신다. 4)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로 사망을 당하게 하시므로 도와주신다. ... 성도가 어떤 때에는 땅 위에 더 머무름으로 그의 영혼에 해를 당할 일이 있을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데려가신다는 것이다(사 57:1-2).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로 하여금 의를 위하여 죽도록 인도하심으로 잘 되게 하시는 일도 있다. 5) 그가 그 자녀들을 도와주시되 오랫동안 기다리시다가 도와주시는 일도 있다. 그것은 그의 지혜이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78-379쪽). 

    기도하라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14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재앙의 때에 성도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성도가 재앙을 당할 때에도 미래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재앙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기도하면 내가 들을 것이라고 하시고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오 나를 만날 것이라고 하십니다(13절). 사람이 절박한 상황에 몰리면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재앙은 성도들에게 큰 유익을 줍니다. 인생의 참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합니다. 인생의 참 의미는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때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70년이 차면 그들은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포로된 중에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14절).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재앙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고 회복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성도의 삶의 의미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것은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과 같습니다(겔 37:14). 우리는 이 일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들입니다. 이것을 믿고 항상 예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만나 주실 것입니다. 약속해 주신 대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글이 유익하셨다면 구독과 공감(❤️) 부탁드립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