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예레미야 28장 1-17절 | 하나냐의 등장과 죽음, 하나님께서 지우시는 멍에에 대한 바른 태도

2024. 7. 5. 17:20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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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예레미야 28:1-17

    찬송가 201장 참 사람 되신 말씀


    거짓 선지자의 예언을 듣지 말라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의 예언을 듣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27:17). 하나님의 뜻은 징계를 달게 받는 것이었습니다. 즉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것이었습니다(27:11-12).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그 반대로 예언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왕을 섬기게 되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27:14).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들으면 그 선지자들과 함께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27:15). 예레미야는 왕과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 길을 제시했고 거짓에서 떠날 것을 간곡하게 선포했습니다(27:17).

    바벨론 왕을 섬기라

    여기에서 바벨론 왕을 섬기라고 하는 예언은 정치적으로 보면 얼토당토않은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치적으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들어서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을 섬기라고 하시는 것은 유대 민족주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적인 명령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특별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셨으면 유대 민족은 없어졌어도 벌써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징계하신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바벨론을 섬기라는 말씀은 징계를 달게 받아서 목숨을 부지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것이니 감사함으로 그 처분을 달게 받으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 나라를 섬기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 의미가 더 깊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이 죽음은 육체적 고통을 훨씬 초월하는 죽음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에게서 단절되어 무한히 고통을 당하는 죽음인 것입니다. 이런 죽음을 하나님의 아들이 겪으셨습니다. 겪으실 때 심히 고민하시며 괴로워하셨지만 단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출 4:22)로서 징계를 받을 때 보였어야 하는 태도가 예수님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냐

    1   그 해 곧 유다 왕 시드기야가 다스리기 시작한 지 사 년 다섯째 달 기브온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1절은 "그 해"로 시작합니다. 그 해는 27장 16절 이하에 나온 사건이 일어난 해입니다. 즉 예레미야가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말라고 선포한 그 해입니다. 그 때 하나냐라고 하는 선지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거짓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하나냐를 보고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1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63). 

    거짓 "선지자 하나냐"가 예레미야에게 대하여 거짓말로 예언할 때에 거기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있었다. 하나냐는 이만큼, 거짓말 하는데 있어서 담대하였다. 거짓된 것은 언제나, 참된 것을 대적하는데 있어서 비례식으로 자체를 나타낸다. 참된 것이 강하면 거짓된 것도 강한 모양을 취한다. 크래머(Crammer)는 말하기를,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면 마귀는 그 옆에 강당을 세운다"(Wherever the dear Lord builds His church, the devil has a chpel near by.)라고 하였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의 지혜는 진리를 아는데 무능합니다. 선이 있는 만큼 악이 거기에 섞여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교회 강단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강단만큼 복음이 아닌 가치를 전하는 강단이 많습니다. 진리를 전하는 강단만큼 비진리를 전하는 강단이 많은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인용한 크래머의 말로 생각해보면 그렇게 되는 이유는 사탄이 발악을 하기 때문입니다. 교역자들은 자기가 전하는 말씀에 극히 주의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사탄의 도구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고대 바벨론 공중정원

    거짓을 진리인양

    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3   내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 곳으로 되돌려 오리라
    4   내가 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니라

     

    하나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언하는 형식은 예레미야와 똑같습니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합니다. 이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소름이 끼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은 말을 전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가져다가 붙였습니다. 거짓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었습니다. 제3계명 위반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신 5: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출 20:1)"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63-364쪽).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했다. 그리고 이 거짓 예언의 내막은 모두 민중의 소원에 아부한 거짓말 성격을 띈다. 그것은, 1) "바벨론 왕의 멍에"가 벌써 꺾인 것같이 불원한 장래에 폐지될 것이라고 함(2절). 그때에 바벨론 왕에 대한 유다 민족의 증오심은 극도에 달하였다. 그러므로 바벨론 왕의 멍에가 꺾인다는 말은 그들에게 매우 유쾌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호언장담이, 혈육에 불과한 민족적 감정을 일시적으로 유쾌하게 할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의지는 털끝만치도 전해주지 못한 거짓말이다. 진리는 혈육에 아부하지 않고 공의에 의하여 혈육을 심판하고 참되이 살 길을 제공하는 법이다.

    2)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예루살렘으로 도로 가져오며 또한 바벨론으로 잡혀간 포로들을 귀환시킬 것이라고 함(3, 4절). "이 년 안에"란 말은 날수 대로 2년이 되기 전이란 뜻이다.  하나냐가 이렇게도 속히 유다 국운이 회복된다는 말씀과 정반대로 사실상 유다의 패망을 유야무야로 돌리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 거짓 선지자들이 유대인들에게 아부하며 "평강하다 평강하다"(8:11)라고 한 거짓 말을, 참인 듯이 변호하는 궤변이다.

    여기서 포로들보다도 성전 기구를 먼저 관설한 이유는, 그때에 외식하는 제사장들이 하나님보다도 성전 기구 자체를 지나치게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거짓 선지자는 그때의 시대정신에 아부하여 이렇게 말했다. 

    듣고 싶어하는 말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

    박윤선 목사님은 하나냐가 왜 그런 거짓 예언을 했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냐가 거짓을 예언한 이유는 먼저, 당시 기득권층인 성전의 제사장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백성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서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신약시대에도 일어났습니다. 할례를 전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할례를 전하는 자들에 대해서 그들은 박해를 면하려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갈 6:12). 바울은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할례를 전한 사람들은 박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듣고 싶은 것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박윤선 목사님 말씀대로 거짓의 사람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은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전하는 것은 시대정신에 아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시대정신이 하나님을 반대하고 대적한다면 그것은 사탄이 조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교역자는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에게 아부하는 자입니다. 

    예레미야의 마음

    5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선지자 하나냐에게 말하니라
    6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니라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가 예언한 말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 곳으로 되돌려 오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냐의 예언을 예레미야도 듣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예언을 듣고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그 예언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자기도 소원한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냐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자기 민족을 사랑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냐의 말대로 속히 회복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피력합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면서 성전과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것이고 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겨야 살 수 있다고 했다고 해서 그가 그 민족을 미워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민족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자기 민족이 받을 심판을 그대로 예언할 때 그의 마음은 그들을 향한 사랑으로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예레미야 13장 17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 예레미야는 이렇게 자기 민족을 사랑한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사랑 없이 진리를 말하는 자는 열매를 거두지 못한다"라고 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65쪽). 

    교묘한 거짓

    그렇다면 하나냐는 자기 민족을 사랑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는 겉으로는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 깊은 속내에는 자기를 더 사랑했습니다. 자기가 높아지기를 바랐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추종하기를 바랐습니다. 만약 그가 자기 민족을 사랑했다면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기보다는 그들을 진정 살릴 수 있는 길을 전했을 것입니다. 거짓은 이렇게 교묘합니다. 그 겉모습에 온유함과 사랑이 느껴지고 그 말의 내용에 복이 가득하다 할지라도 종국에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말을 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요, 자기 배만 위하는 사람입니다(빌 3:19).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합니다(빌 3:18). 

    언약체계의 성격상

    7   그러나 너는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잘 들으라
    8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예레미야는 하나냐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은 정당하지 못한 것임을 드러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예언과 정반대인 자기의 예언이 이전 선지자들의 예언과 일치한다고 합니다(7-8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65쪽). 

    여기서 예레미야는 자기와 옛적 선지자들이 예언 원리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음을 언급한다. 국가들이 받을 재앙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옛날부터 진정한 선지자들이 하여 온 것이다(신 28:15-29:29). 이런 예언 방식은 근거 없는 새것이 아니고, 도리어 옛날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계시의 계약 체계 성격이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거짓 선지자의 예언 방법과 진정한 선지자의 그것과의 대조를 볼 수 있다. 1)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의 회개를 목적하지 않기 때문에 백성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한다. 그러나 참 선지자는 사람들의 회개를 위하여 장차 임할 심판을 서슴지 않고 말한다. 2) 거짓 선지자들은 늘 혈육에 속하여 움직인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에 전속하여 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의 의지에 거스르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참 선지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혈육을 거스른다. 혈육은 하늘나라를 받지 못한다. 자기의 혈육을 미워하지 못하는 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는 방법

    성도는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아주 중요한 단서를 몇 가지 제시합니다. 1) 참 선지자의 선포는 사랑을 동인으로 합니다. 사랑을 가지고 선포합니다. 그들이 진정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2) 참 선지자가 말씀을 선포하는 목적은 청중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듣기 좋은 말만 해서는 참된 회개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을 때 받을 재앙에 대해서 적나라게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선포를 하면서도 그 안에는 사랑이 담겨 있고 그 목적은 회개로 이끌어 살리는 것입니다.

     

    3) 참 선지자는 혈육을 거스릅니다. 즉 자기 자리 보전을 위해서 애쓰지 않습니다. 혹시 자기가 선포하는 말씀 때문에 쫓겨난다고 하여도 그것에 유념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리보다 청중이 회개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4) 또한 참 선지자는 언약 체계 그대로를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으실 때 배반에 따르는 저주를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신 28:15)" 그렇게 하시고 백성들이 언약에서 벗어날 때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비상상황에서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들이 전하는 예언은 재앙이 임한다는 말씀이 대부분입니다.

     

    위의 네 가지를 이 시대에 적용한다면 참된 말씀 사역자는 1) 성경에서 약속하는 생명을 전하고 성경에서 경고하는 재앙을 전합니다. 전하면서 가감하지 않습니다. 2) 자기 자리 보전을 위하지 않습니다.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회개하게 하는 말씀을 담대하게 전합니다. 3) 성도들이 듣고 회개하도록, 회개해서 생명에 이르도록 하려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즉, 사랑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정죄하려고 재앙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재앙을 선포합니다. 이 부분을 여러 번 잘 읽어보면 누가 참된 말씀 사역자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9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라

     

    예레미야는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인정을 받는다고 합니다(9절). 그만큼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의 예언이 참인 것은 드물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선지자가 일어난 것 자체가 비상상황임을 전제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했다면, 즉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백성들이 그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다면 선지자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별하게 경고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선지자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평화가 응한 경우

    역사 가운에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의 말이 응한 예가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14장 25절에 보면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나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영토를 회복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열왕기하 말씀을 잘 보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죄악이 가득한 상황이었지만 영토가 회복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을 요나에게 말씀하셔서 미리 알리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알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외에는 선지자들은 다 재앙을 선포했습니다.

    재앙 선포가 응하지 않은 경우

    재앙을 선포한 이유는 망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앙을 선포한 선지자의 말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그 재앙의 말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 예는 미가가 재앙을 선포했을 때 히스기야와 백성들이 회개함으로 재앙이 임하지 않은 일과 요나가 니느웨 백성들에게 재앙을 선포했을 때 니느웨가 망하지 않은 일 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때 청중은 그 말의 내용을 잘 들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말의 의도를 또한 잘 파악해야 합니다. 재앙을 말한다고 해서 재앙이 임하라고 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고

    10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고
    11   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냐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

     

    선지자 하나냐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었습니다. 예레미야의 목에 멍에가 메어져 있었다는 것은 예레미야가 상징행동을 계속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멍에를 메고 다니면서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그 메시지는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징계를 달게 받아서 죽지 말고 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뿐만 아니라 삶으로도 살 길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냐는 그런 예레미야의 상징 행동을 자기 마음대로 멈추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우신 멍에를 자기가 하나님이라도 된 양 빼앗아서 꺾어버렸습니다(10절). 그러면서 거짓을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2년 안에 이와 같이 꺾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11절). 

    하나냐의 악독함

    하나냐의 행동은 굉장히 악독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죽을 뿐만 아니라 자기 말을 듣는 모든 이들도 죽게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행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외식하면서 교인 한 사람을 얻고 그를 자기들보다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었습니다(마 23:15). 하나냐의 행동이 이런 행동입니다. 자기만 죽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말과 행동을 듣고 보는 사람도 죽이는 행동인 것입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해서 다 구덩이에 빠뜨리는 행동입니다(마 15:14). 예레미야의 상징 행동을 보고 재앙을 떠올리면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회개하여 하나님께서 말한대로 행하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하나냐는 그 사람이 회개할 길을 막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하나냐를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17절).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12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 버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기를
    13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하라

     

    선지자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 버리자 하나님께서는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절).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습니다. 혹시 나무 멍에를 꺾을 수 있을 지는 모르나 곧 쇠 멍에를 메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설교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368쪽).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설교> 나무 멍에를 꺾으면 쇠 멍에를 메운다는 뜻은 무엇인가(12-14절)

    1. 유다를 위시하여 모든 나라들이 바벨론에 복속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꺾을 수 없다는 것. 만일 사람이 그 예언을 꺾는다 할지라도 실상 그 노력은 헛되다. 그 이유는, 사람이 꺾는 경우에라도 하나님께서는 무쇠와 같이 강한 능력을 가지시고 그것을 그 예언 내용대로 성취시키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2. 바벨론 왕에게 복속하여 순종하는 것("나무 멍에")을 그때의 나라들이 거부하는 경우에는, "쇠 멍에"와 같은 더 무거운 노예살이를 하게 된다는 것. 이것은 언제나 진리이다.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제재나 징계를 배척하고 받지 않으면, 반드시 보다 무서운 제재나 환난을 받게 되는 법이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어 보면, 기독자(Christian)와 소망(Hope)이 길을 걸어가는데, 찌르는 차돌과 가시들이 가득한 길을 가게 되자 그곳을 피하여 다른 길로 갈 때, 홍수를 만났으며, 낙심이라는 거인에게 붙잡혀 옥에 끌려가 많은 매를 맞고 고생하던 중 하나님의 은혜로 겨우 빠져 나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환란의 멍에를 감심으로 메는 자는 축복을 받겠거니와, 그렇지 못한 자는 더 험한 곤란을 당하게 된다. 

    1) 사람이 율법의 멍에를 메기 싫어하면 불법의 멍에가 온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교회는 역시 율법적 제재에 의하여 안녕과 질서를 유지한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가 교회가 율법의 제재를 거부하는 때에는, 율법보다 더 무거운 불법으로 말미암은 해독과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2) 사람이 양심의 멍에를 메는 것은 도리어 유쾌하나, 그것을 거부할 때에는 자신을 죽을 지경의 고통에 빠뜨리는 무서운 정욕의 멍에를 메게 된다. 사람마다 자기 마음속에 양심의 율법이 있다. 그것은 그가 잘못 갈 때에 언제나 경고를 말한다. 사람이 만일 그 경고를 순종하지 않으면, 그의 모든 저열한 성질의 지배를 받다가 필경 불행과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가 자기의 저열한 성질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 그 타락이 매우 신속하여 걷잡기 어렵다. 그것은 마치 여행자가 알프스 산의 눈 덮인 높은 봉우리에서 미끄러져 떨어짐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사람이 죄를 짓다가 나중에는 죄가 사람을 좌우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3) 사람이 그리스도의 멍에를 거부하면, 결국 사람을 멸망케 하는 무서운 불경건의 멍에를 메게 된다. 그리스도의 멍에는 쉽고 가벼우나(마 11:30) 그리스도 없이 사는 불경건의 멍에는 쇠 멍에와 같이 무겁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환난의 멍에를 달게 받지 않고 그것에 대하여 반항하게 된다. 이런 반항은 실상, 발뒤꿈치로 송곳을 차는 미련이다. 새가 그 조롱을 제 머리로 받으면 제 몸이 상할 것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섭리로써 임한 역경을 달게 순종하여라. 그리하면 그것(그 섭리)의 굳은 것이 부드러워진다. 

    하나냐의 죽음과 하나님의 사랑

    15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1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니
    17   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더라

     

    예레미야는 하나냐에게 하나냐를 향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호와께서는 하나냐에게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절). 그리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은 것입니다(17절).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냐의 죽음이 백성들에게 또 하나의 메시지가 된 것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냐의 죽음을 보면서 예레미야의 예언이 진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깨닫는다면 살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나냐를 먼저 죽이심으로해서 백성들이 그와 함께 다 죽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27:15).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역사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사람들은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면서 잘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참 신이심을 증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일이 다니엘서와 에스더서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서와 에스라서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로잡혀 가지 않은 백성들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점점 더 비참해졌습니다. 하나냐의 죽음을 보고도 믿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 남은 자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믿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살리시고 보호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회개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재앙을 선포하실 때 하나님께 속히 돌이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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