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2. 22:10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목차
예레미야 31:23-40
찬송가 289장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에브라임이 뉘우치고 돌아옴
여호와께서는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다고 하셨습니다(22절). 그 일은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는 일입니다. 이것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긴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이긴다는 뜻이고 생명이 죽음을 이긴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강합니다. 하나님께서 약한 자들을 들어 쓰시기 때문입니다(고전 1:27). 그 결과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고전 1:29). 사로잡힌 자가 돌아오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31:16-22).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이 돌이키고 뉘우치면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유다에 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서
2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그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때에 그들이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서 다시 이 말을 쓰리니 곧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 것이며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 칭호는 모든 군대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전쟁을 주관하시고 승리하신다는 뜻입니다. 승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서 포위하게 하셨습니다(31:22). 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즉 모든 믿는 자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으로 승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거둔 가장 값진 승리는 죄와 사망을 이긴 승리입니다. 즉 바벨론에게 잡혀서 포로로 있던 처지에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내가 그 사로잡힌 자들을 돌아오게 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축복의 말을 다시 쓸 것임
하나님께서 포로들을 돌아오게 할 때에 그들이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서 곧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을 쓸 것이라고 하십니다. 축복의 말을 다시 쓴다는 뜻입니다. 그 축복의 내용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23쪽).
"다시 이 말을 쓰리니"란 말은 이스라엘이 포로 되기 전 그 전성시대에 말하였던 것과 같이, 이제 국운이 회복되어 또다시 그런 축복의 말을 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 축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이 예루살렘을 "의로운 처소" 또는 "거룩한 산"이라고 부름. 그곳은 일찍이 황폐되어 하나님이 떠나신 곳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계시므로 저런 고귀한 이름을 가질 수 있다. "의로운 처소"(נְוֵה־ צֶ֖דֶק/네베 체데크)(참조. 23:6; 사 1:21). "거룩한 산"(הַ֥ר הַקֹּֽדֶשׁ/하르 하코데쉬)(참조. 시 2:6; 48:2; 사 11:9; 27:13). 황폐하고 적막하여 하나님이 버리신바 되었던 곳도 하나님께서 다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처소로 삼으신다.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교회의 모습은 전연 없던 곳, 이를테면 지옥과 방불(彷彿)한 곳에도 하나님의 능력은 교회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하였다.
2) 그들은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יְבָרֶכְךָ֧ יְהוָ֛ה)고 함. 이것은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축복을 받음직하기 때문에 나오는 기원(祈願)이다. 따라서 과연 이 기원대로 될 것이다. 이런 기원의 대상이 될만하고 또 이런 기원자들이 살고 있는 그 사회는 복되다. 이 복의 원인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신 사실 그것뿐이다.
풍족함
24 유다와 그 모든 성읍의 농부와 양 떼를 인도하는 자가 거기에 함께 살리니
24절에서 말하는 "거기"는 유다 땅과 그 성읍들(23절)입니다. 그 성읍들은 의로운 처소, 거룩한 산, 사람들이 거기를 가리켜서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하는 그곳입니다. 거기에는 유다 백성이 살 것이고 농부들과 양 떼를 인도하는 자들이 함께 거할 것입니다. 즉 가축과 곡식이 풍부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거하시면서 복을 내리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24쪽).
이것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뒤에 유다와 모든 성읍들이 평화로울 것을 보여준다. 칼빈(Calvin)은 이 말씀이 교회의 회복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 교회 시대를 전적으로 포함하는 예언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이암는 교회의 영적 평안을 가리킨다.
영혼을 상쾌하게 하심
25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며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였음이라 하시기로
25절에서는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 거하는 사람들이 평안히 사는 이유가 나옵니다. 사람의 평안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외부의 필요가 만족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양떼와 곡식이 풍부한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24절). 그러나 진정한 평안은 심령이 만족함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며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셔야만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24쪽).
그러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속죄하여 주시는 은혜로 신자들이 영적으로 만족하게 됨을 예언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예언의 성취자로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하였다(마 11:28).
진정한 평안은 죄로부터 해방된 영혼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정죄 받지 않는 영혼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람이 평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잠이 달았더라
26 내가 깨어 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
2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시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실행됩니다. 예레미야가 잠에서 깨었을 때 그 잠이 달았습니다. 단 잠을 자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만족하게 하심으로 단 잠을 잘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24-425쪽).
... 하나님께서 주무신다는 사상이 성경(시 121:4)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시 선지자의 처지에서 표현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꿈을 방편(方便)으로 하여 계시를 주시는 일이 있음은 명백하다(단 2:1, 5, 28, 29; 4:2-7; 7:1, 2, 7, 13). 그러나 카이퍼(A. Kuyper)가 말한 것과 같이, 꿈은 계시의 방편으로써 높이 서지는 않았다. 성경이 완비된 후에는 물론 계시의 방편으로써의 꿈은 정지(停止)되었다.
예레미야의 "잠이 달았"던 이유는 그가 꿈 가운데서 본 계시가 기쁜 것이었기 때문이다. 23-25절이 보여 준 그대로 그가 본 계시는 복된 것이었다. 이 계시는 순전한 위안(慰安)뿐이었다(Delitzsch).
세우며 심으리라
2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 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을 세우시고 심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세우시고 심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우며 심으실 때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재앙 당한 것은 앞으로 복 주실 것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비록 죄를 지어 재앙을 당했지만 하나님께 그들을 돌이키실 때에는 그 재앙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언제든지 이것이 진리입니다. 믿는 자에게 재앙으로 귀결되는 악한 일은 없습니다. 모든 재앙은 선으로 귀결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깨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당신님의 백성들을 지켜주시고 계십니다(시 121:4). 깨어 계시기에 죄에 대한 징계를 내리시고 또한 깨어 계시기에 징계를 거두시고 그 징계를 복이 되게 하십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25쪽).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흩어져 살던 남북국(南北國)을 다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시여 인구를 증가시킬 것을 예언한다. 유다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되어 간 뒤에는 그 땅이 폐허와 같이 되었으며 인적(人跡)이 드물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며 식민(植民)하시는 이가 "여호와"시니 거기에 인구가 증가하게 될 것은 확실하다(G. Ch. Aalders). 하나님의 새 백성과 구원 운동은 전적(全的)으로 그의 창조사역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그 일은 참으로 이루어진다. 이 예언은 유다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 되었던 자리에서 해방됨으로 어느 정도 성취되었으나, 그보다도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성취되고 있다.
"깨어서" 이것은 1:12이 말한 것("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대로 잊지 않으시고 깨어 열심으로 이루심을 가리킨다. 그는 두 가지 일로써 자기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신다. 하나는, 그들의 죄를 징벌하심이고("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 다른 하나는 그들이 회개할 때에 다시 세워 주심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양면(兩面) 사역(使役)은 1:10에서도 보여준다.
위에 말씀하신 1장 10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 뜨리는 사역이 십자가로 성취되었습니다. 부활로 건설하고 심는 사역이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취된 십자가와 부활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누리는 방법은 마음을 매순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믿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
29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30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
바벨론의 침공으로 재앙을 당하는 이들은 아버지의 죄 때문에 자기들이 재앙을 당한다는 의미에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29절). 그러나 이 말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누구나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입니다(30절). 신포도를 먹으면 먹은 그 사람의 이가 신 것입니다. 다른 누구의 이가 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앙으로 파괴되고 멸망 당하는 것은 자기 죄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18장 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명백하게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받는 화복(禍福)은 각기 개인이 창조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행한 대로 받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27쪽).
그러므로 불초한 자식을 둔 아버지가 어느 정도 책임을 느끼는 것은 가하나, 그 불초한 자식의 불행에 대한 책임을 전부 걸머지는 의미에서 너무 과도한 근심에 빠지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런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할 뿐이며, 그 자식이 아주 당하여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자식의 주재자(主宰者)는 창조주이신 하나님뿐이며, 그 자식의 자유도 그 아비 된 자의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그 자식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그러면 출애굽기 20장 5절 하반절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요?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이 말씀을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26쪽).
이 말씀의 의미는, 범죄한 자의 자손이 삼사 대까지 모두 다 그 조상된 자의 죄 값을 일률적으로 받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1) 이것은 다만, 범죄한 자가 그 죄 값을 자신이 받지 않으면, 그 자손대에서라도(삼사 대 안에) 받는 자가 있을 것을 지적함이다. 설혹 그 자손 중에 어떤 자가 그 조상의 죄 값으로 벌을 받는 경우에라도, 그것은 물론 어떤 외부적인 이 세상 것이겠고 그 영혼이 멸망하는 것까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 그러나 위의 해석보다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곧, 어떤 범죄자의 자손들이 그 조상이 범한 죄악을 계승하며 회개치 않는 한, 조상들의 죄 값을 그대로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겔 18:14-19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과연 인류 역사는 이와 같은 원리로 내려왔다. 악한 사람의 자손이라고 하여 다 악한 것도 아니었다. 르호보암은 악한 왕이었으나(대하 13:7) 그의 아들 아비야는 무흠하고 신앙이 있었으므로 형통하였고(대하 13;19), 아하스 왕은 우상 섬긴 자로서 악하였으나(대하 28:22) 그 아들 히스기야는 선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왕하 10:14-19; 20:1-7). 아몬도 악한 왕이었으나(대하 33:22, 23) 그 아들 요시야는 선한 왕으로서 종교를 개혁하였다(왕하 23:25).
이렇게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인을 사하여 주시고 다시 심어주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맺으신다고 하십니다(31절).
새 언약을 맺으리라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날이 이르면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신다고 하십니다.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었습니다. 이 구절을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27쪽).
여기 이른바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은 남북국(南北國)을 다 합한 유다 민족을 가리킨다. 이것은 모든 택한 백성(이방인까지 포함한)을 대표하는 명칭이다. "새 언약"이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베리트 하다샤(בְּרִ֥ית חֲדָשָֽׁה)이니 신약 시대에 나타날 구원 계약을 가리킨다. 이것은 물론 구약식 계약과는 다른 새 것이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운동을 의미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이것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유대인의 새로운 국가 운동을 가리킨다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이것이 율법 운동의 계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 언약 운동이 그 실질에 있어선 구약식 계약과 다른 것은 아니니,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재래(在來)의 계시와 모순된 새 계시는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언약이 옛 언약에 비하여 다른 것은 다만 그 외형 문제에 관계된 것뿐이다.
시내산 언약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과 다르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시내산 언약은 그 언약을 맺는 언약식을 거행하는 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마치 남편과 아내가 결혼식을 하는 중에 아내가 다른 남자와 간음을 행하여 결혼 언약을 깨뜨린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중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숭배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세는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의 두 돌판을 깨뜨렸습니다. 그 백성들이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28쪽).
위의 말씀은 이 새 언약이 얼마나 위대할 것인지를 보여 준다. 옛 언약도 위대하였지만("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그 언약에 내포된 축복을 받지 못하고 어겼으니 인간성이 얼마나 패역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성을 상대하고 구원을 약속하는 새 언약이야말로 말할 수 없이 위대한 것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사 어디까지나 그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고야 만다. 이제 새 언약의 위대함에 대하여 아래 33, 34절이 말한다.
마음에 기록하여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절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그 법을 그들의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는 언약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입니다.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다 알게 되는 언약이고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악행을 사하시고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언약입니다(34절). 시내산 언약은 두 돌판이 깨어짐으로 깨어졌지만 새 언약은 깨어질 수 없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사람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고 하나님의 법을 아는 것이 사람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29쪽).
"그들의 속"이란 말은 그들의 인격 내부(inward parts)를 가리키고, "그 마음에 기록한다" 함은 역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다루심에 있어서 이제 부터는 그 심령을 초점으로 하실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이 신약시대의 특징이다(요 4:23). 바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을 거듭나게 하시는 구원 운동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바이저는 말하기를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할 때에 역시 자기 체험에서 하였을 것이다"라고 했다. 구약 시대엔 중생(重生)시키는 은혜가 신약시대처럼 풍부하지는 못했으나, 그것이 있은 것만은 틀림없다. "마음"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레브(לֵב)이니, 애정을 소생시키는 심령 부분을 가리키는 동시에, 실상 인격의 통치 능력을 가진 부분이다. 이런 깊은 부분에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부분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 말씀은 흔히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대하여 계약하실 때 많이 쓰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참되이 성립되는 이런 복된 관계는 실상 그들의 구원을 의미한다.
새 언약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이 서로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렇게 함은 그 때에는 전도(傳道) 행위를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성령의 풍부하신 운동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사실을 역설(力說)하는 것뿐이다(Calvin).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 문구 초두에 키(כִּי)라는 이유 접속사가 있어서 윗말씀의 이유임을 보여 준다. 곧, 사죄해 주시는 운동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얼핏 복면 이상한 말씀같이 보인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복음 운동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자에게 한하여 사죄하여 주는 운동이다. 이렇게 사죄를 받은 자만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영적 교통이 생겨서 하나님을 참되이 알게 된다. 주를 알아 경외하게 되는 비결은 사죄 받는 사실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니,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러므로 시 130:3-4에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라고 하였다.
새 언약을 확증하심
3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36 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5-3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확증하십니다. 새 언약은 창조의 법도가 영원한 것처럼 영원히 효력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35쪽).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위에 말씀하신 대로, 그의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실 사실을 힘껏 보장하여 주신다. 곧, "해"와 "달"과 "별들"이 늘 하나님의 규정대로 그 사명(使命)을 하고 있으며, "바다"의 "파도"도 내왕(來往)하는 규정대로 늘 변치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다시 말하면, "자연 질서가 변동 없는 것처럼 역사계에 하나님의 구원 질서도 그의 수중에서 든든히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Weiser). 우리는 자연계시(自然啓示)를 보아서도 하나님의 진실성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질서를 세우시고 그것을 굳게 지키십니다. 지금도 그것을 굳게 지키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매순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질서도 굳게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언약을 맺으신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끝끝내 구원하십니다.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언약 성취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
3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위에 있는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밑에 있는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이 행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씀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으시겠다는 것을 보장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 자손이 행한 모든 일"이 깨뜨릴 수 없는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늘을 측량할 수 없고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없다는 사실로 확증됩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했지만 사람은 아직 저 우주에 대해서 모릅니다. 아는 만큼 모르는 부분이 생깁니다. 또한 저 땅의 기초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사람은 자연을 측량하는 것에도 한계를 경험합니다. 그런 존재가 어찌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그 안에 담긴 섭리와 언약을 알 수 있을까요? 버리지 않으신다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사람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신다고 하심을 믿을 따름입니다. 약속에 기초해서 언약에 기초해서 믿을 따름인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의 회복
38 보라, 날이 이르리니 이 성은 하나넬 망대로부터 모퉁이 문에 이르기까지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성"이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로 성취되었습니다. 교회는 지금 성전으로 지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올 것입니다(계 21:2). 이 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무너졌고 부활로 다시 재건되기 시작했습니다. 완성은 재림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하나넬 망대와 모퉁이 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36쪽).
"하나넬 망대"는 예루살렘 성벽의 동북 모퉁이에 있고(느 3:1; 슥 4:10), "모퉁이 문"은 예루살렘 시의 서북 모퉁이에 있다(왕하 14:13; 대하 26:9). 본절은 재건될 예루살렘 북쪽 전면(全面)에 대해 간단하게 진술한다.
여호와의 거룩한 곳이라
39 측량줄이 곧게 가렙 언덕 밑에 이르고 고아로 돌아
40 시체와 재의 모든 골짜기와 기드론 시내에 이르는 모든 고지 곧 동쪽 마문의 모퉁이에 이르기까지 여호와의 거룩한 곳이니라 영원히 다시는 뽑거나 전복하지 못할 것이니라
39절의 측량줄은 건축할 때 쓰는 도구입니다. 건축을 할 때에 측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36쪽).
"가렙산"과 "고아"는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문맥으로 보아 예루살렘 서쪽에 있은 듯하다. 이것은, 그때에 예루살렘 시(市)를 더 확대시킨다는 양적(量的) 의미보다는 전보다 더 거룩하게 한다는 질적(質的) 의미를 표시한다.
40절은 예루살렘 성의 동쪽을 가리킵니다. 기드론 골짜기에는 무덤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시체와 재의 모든 골짜기"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마문"은 예루살렘 성전의 동남쪽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36쪽).
"여호와의 거룩한 곳이니라 영원히 다시는 뽑거나 전복하지 못할 것이니라"라고 하신 말씀을 보아서, 위의 38-40절 말씀은, 유다 민족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돌아와 재건한 사실로써만 완전한 성취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신약 구원 운동으로 최후적 성취를 본 것이다(참조. 슥 14:11).
부활과 최후 심판
특히 40절은 시체가 있는 부정한 골짜기가 거룩한 곳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시체는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없는 부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체로 그냥 있으면 절대 거룩한 곳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부활이 숨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죽은 자는 부활합니다. 택하심을 얻은 자는 생명의 부활로 회개치 않은 자는 심판의 부활로 일어납니다(요 5:29). 그리고 생명의 부활로 일어난 자들은 거룩함과 영광 가운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합니다. 반면 심판의 부활로 일어난 자들은 영원한 불못에 던져져서 세세토록 고통을 당합니다(계 20:15). 그 결과 시체와 재의 모든 골짜기에서 모든 시체가 없어지고 여호와의 거룩한 곳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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