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0. 22:59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목차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언약관계의 회복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회복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30:22).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회복되면 하나님 백성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섬길 수 있습니다(30:21). 백성들은 영도자를 따라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 영도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언약의 회복을 말씀하신 후에(30:22)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말씀하셨습니다(30:23-24). 이어서 다시 언약의 회복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회복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다 풀어진 후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왜 우리에게 복된 것인가?
1절은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05-406쪽).
"이스라엘 모든 종족(לְכֹ֖ל מִשְׁפְּח֣וֹת יִשְׂרָאֵ֑ל)"이란 말은 여기서, 남쪽 나라 유다나 북쪽 나라 열 지파나 모두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바벨론에서 해방된 사건으로 다 성취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해방 때에 열 지파가 완전히 다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유다 민족이 바벨론에서 해방된 사건을 가지고 장차 신약시대에 이루어질 세계적 새 이스라엘 운동, 곧 그리스도 교회의 복음 운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모든 택한 백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라에취(Laetsch)는, 이것이 믿는 유대인들과 모든 이방 그리스도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하였으니 정당하다(Bible Commentary, Jeremiah, p. 244).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란 말씀은 하나님께서 백성을 구원하신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것이야말로 그 구원의 복된 이유를 성립시킨다. 이 말씀은 우리가 받을 구원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이 왜 우리에게 복된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으로서 참되이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계를 벗어나서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구약은 이 구원을 내어다보고 예언했는데(창 17:7; 출 29:45, 46; 레 11:45; 22:33; 25:38; 26:12, 45; 민 15:41; 신 26:17, 18; 29:12; 렘 7:23; 겔 34:30). 신약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사 이 예언을 성취하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제부터 하나님을 저희 하나님으로 모시게 되고, 그들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이것의 대종말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나타난다(계 21:3). 이렇게 생각될 때에, 우리 본문은 실상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바이저(A. Weiser)는 이 말씀을 가리켜 "계약 형식의 말씀"(Di Bundesformel)이라고 하였으니 지당하다(Das Buch des Propheten Jeremia, p. 274).
하나님의 가족
개역개정에서 "종족"이라고 번역된 말(מִשְׁפָחָה)은 개역한글에서는 "가족"입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2장 1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기서 권속이라는 말도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언약관계의 친밀성을 생각할 때 종족보다는 가족이라는 말이 더 와닿습니다. 우리는 이방이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을 아버지요 가장으로 모신 가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종족, 즉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열두 지파 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2절은 "때"를 말씀합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가시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시는 이유는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안식을 얻게 되는 이유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칼에서 벗어났습니다. 생명을 간신히 부지한 것입니다. 이 또한 은혜입니다. 또한 그들이 은혜를 입은 장소는 광야입니다. 광야는 아무 의지할 것이나 먹을 것이 없는 장소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장소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이것은 유다 민족이 바벨론의 침략 전쟁으로 인하여 죽을 뻔하고, 필경 바벨론으로 잡혀갔다가 거기서 그들이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해방될 것을 가리킨다. 물론 이것은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아직 미래에 속한 일이다.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확실히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하여("안식을 얻게" 하려고) 출동하시리라는 의미이다. ... 이 구절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라고 하였으니, 근근이 명맥을 보존하는 백성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광야와 같이 의지할 데 없는 거친 환경에 처한 그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귀하다.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런 능력으로 나타나지 아니하시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없는 것같이 무시하며 의심하는 것으로 일관하여 나아간다.
안식을 얻게 하신 분
예수님께서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 12:8; 막 2:28; 눅 6: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려 오신 분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으로 안식을 얻게 하신 방법은 그들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멸하신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 백성은 진정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 백성이 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그 백성은 광야에서 은혜를 입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무엇도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없는 지경, 즉 광야와 같은 지경에서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었습니다.
영원한 사랑
3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3절은 "옛적"을 말씀합니다. 이 옛적 일은 지금의 나를 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옛적의 사랑은 영원하여 지금 내가 받는 그 사랑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은 지금도 인자함으로 나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07-408쪽).
이 문구에 있어서 칼빈(Calvin)은 탈굼(Targum)에 있는 해석대로 다음과 같은 뜻을 찾았다. 곧, 어떤 불평하는 자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셨으니, 오늘날은 구원하실 수 없다"라고 함에 대하여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리하여 대답하기를, "내가 옛적에 나타나 사랑을 베풀었으나, 그것은 영원한 계약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 사랑이 영원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구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계약하신 대로, 그는 "영원한"(עוֹלָם֙) 사랑으로 그 백성을 사랑하시어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들을 바벨론에서 인도하여 내시겠다고 하는 의미이다. 여기 "이끌었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 마샤크(מָשַׁךְ)니, 계속한다고도 번역할 수 있다(Delitzsch). 그러므로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는 말은 "너희에게 인자를 계속하리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약은 옛날에 되었으나 그것이 영원한 계약인 것만큼, 그가 구원하여 주시는 사랑이 영원토록 계속한다. 이 영원한 사랑은 옛적부터 "나"를 지향하고 움직였으니, 나를 위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가! ... 하나님의 사랑은 그 택한 백성 전체를 위하는 동시에, 역시 그 중에 하나인 "나" 개인에게도 그만큼 뜨겁게 나타난다.
옛적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즉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원한 사랑으로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그 백성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인자함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시 23:6)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4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처녀"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세움을 입습니다. 절대적으로 세움을 입는 것입니다. 세움을 입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시면서 "처녀 이스라엘"이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올 것이라고 하십니다(4절). 옛적에 애굽 군대가 홍해 바다에 수장되었을 때에 처녀 이스라엘은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며 춤추며 나왔습니다. 그 일이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바벨론이 망하고 이스라엘은 영광을 입을 것입니다. 즉 죄와 사망 세력은 망하고 하나님 백성은 영광을 입고 즐거워하며 승리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출 15:19-21). 이 구절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08쪽).
여기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처녀"라고 함은 주목할 만하다. 실상 이스라엘은 처녀 자격을 상실하였던(우상을 섬겼으므로) 자이다(18:13, 1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민족을 옛날에 순전한 "처녀"(2:2, 3)였던 그대로 보아주신다. 그가 이스라엘을 용서하심으로 그같이 좋게 보신 것이다(31:34).
"다시 너를 세우리니" 이것은 바벨론에 잡혀갔던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귀환시켜 국세를 회복하도록 하실 것을 가리킨다. 이런 말씀은, 포로된 미참한 처지에 있는 그들을 낙심하지 않게 하려는 사랑의 약속이다. "소고로... 장식하고... 춤추는" 것은 근동지방의 처녀들이 기쁜 축하의 때에 행한 풍속이었다(삿 11:34; 시 68:25). 이런 기쁨의 축하는 유다 민족이 바벨론에서 해방됨으로 인하여 거행될 것이다.
심는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하리라
5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들을 심되 심는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하리라
사마리아 산들은 당시에 황폐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산들이 회복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회복되는데 거기에 포도나무들을 심을 것이고 심는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나무를 심는 자가 열매를 거두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언약 관계 안에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면 포도나무를 심되 그 열매를 타인이 취하게 됩니다(신 28:30; 신 20:6 참조). 이 말씀은 이런 저주가 떠나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회복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이야 주석, 408-409쪽).
다시 침략자가 오지 아니하므로, 사마리아 산들의 포도가 군대의 노략거리가 되지 않고(사 62:8) 그 심은 자들의 식물이 된다. 여기 "따기 시작하리라"란 말은 히브리어로 힐렐루(חִלֵּֽלוּ)니, 속용(인간의 사용)으로 사용함을 의미한다. 율법(레 19:23-25)에 의하면, 어떤 땅에 과실을 심으면 그 열매를 3년 동안은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내버린다. 그리고 제4년째의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고, 제5년째의 열매라야 그 심은 자가 먹는다. 다시 말하면, 제5년째의 열매가 속용에 제공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서는 평안히 시간 여유 있게 농사하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에브라임의 회복과 교회
6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수꾼이 외치는 날이 있을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에브라임 산은 북쪽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파수꾼이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라고 외친다고 합니다. 북 이스라엘이 온전히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온전한 회복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의 회복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09쪽).
이것은, 유다 지파뿐 아니라 열 지파(북쪽 나라)도 돌아와서 이제는 유다와 연합할 것을 예언한다. 북쪽 나라가 갈라진 후 여로보암 왕이 그 백성을 금하여 남쪽 나라 남 유다에 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는 그 나라의 종교를 따로 시설하기까지 하였다(왕상 12:29-31). 이렇게 장벽이 막혔던 두 나라의 기막히던 사정도 이제는 해제되고, 북쪽 나라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서 참되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게 되리라고 한다. 이 예언은, 유다 민족이 바벨론에서 해방됨으로 그 부분적 성취를 보았고, 그보다도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으로 완전히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라에취(Laetsch)는 말하기를, 시온에 올라감은 그리스도 교회에 참예함을 가리킨다고 하고, 갈릴리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은 사실은 이 예언의 성취라고 하였다.
이 예언은 위에 기술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성령께서 교회에 강림하신 후에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또 성취되었습니다.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또한 완전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7절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로 시작합니다. 다시 한 번 이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환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7절에 나오는 내용은 중요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라고 하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는 것은 모든 이에게 기쁨이 됩니다. 이어서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또한 전파하고 찬양하면서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룹니다(빌 2:12). 구원을 이루는 방편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 마음으로 받고 그것으로 기도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서 구원을 얻습니다. 이미 구원 얻은 사람이 말씀과 기도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7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10쪽).
"야곱"은 유다 민족을 대표하는 명칭이다. "기뻐 노래함"은, 그 민족이 해방될 것을 확신하는 의미에서 기쁘게 그 소망을 만방에 알림이다. 하나님의 예언은 사실과 참되기 때문에, 그것을 만방에 알리기에 부끄러울 것 없고 도리어 기뻐해야 된다.
...
"남은 자"란 말은, 택한 백성으로서 회개하는 자들(슥 12:10; 13:1)이다. 그들의 수효는 적어도 유다 민족 전체를 대표한다. 하나님께서 여기서 명하신 기도는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을 필경은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다. 이것이 기이한 말씀이다. 그가 으레 이루실 것이로되 그것을 위하여 우리의 기도를 요구하시나니, 그것은 그의 오묘한 경륜이다.
모으리라, 돌아오리라
8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 갔었던 자들입니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죄와 사망의 포로가 되었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포로되었던 땅, 북쪽 땅에서 돌아오게 됩니다.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즉 이동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안전하게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골 1:13). 이들은 스스로 이동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들을 순식간에 옮기신 것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10-411쪽).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을 보여 준다. 곧, 포로된 유다 민족을 "북편 땅"(바벨론)에서 인도해 오시며 "땅 끝에서"(먼 곳에서)도 인도해 오시리라고 한다. 이런 일은 이적스러운 일이니,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여행하기에는 불가능한 자들이 그 먼 길을 여행하여 본국으로 "돌아오리라"라고 하니, 이것은 그 구원 운동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될 것을 비유한다. 주님 앞에는 장애물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라에취(Laetsch)는 여기 이 말씀이, 신양시대 큰 무리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예언한다고 한다(엡 2:11-22; 행 15:7-17). 여기 "무리"란 히브리어 원어 카할은 조직된 회중을 가르키는 바, 교회도 이 말로써 표현된다. 다시 말하면 카할은 교회 곧 에클레시아에 해당하는데, 예수님도 자기(예수님) 줌심으로 모인 회중을 이 말로 표현하셨다. 그러므로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고 하신 말씀은, 신약시대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를 이루어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을 예언한다.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9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그들은 울며 돌아올 것입니다. 왜 울까요? 구원의 감격 때문에 웁니다. 성인이 되어 예수님을 믿고 회심한 사람들의 공통된 반응이 눈물입니다. 그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또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은 울면서 오는 길입니다.
울면서 돌아올 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또한 간구하면서 돌아옵니다. 보통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회심합니다. 회심하면서 간구합니다. 간구하면서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옵니다. 그렇게 올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은 목마르지 않는 길입니다. 언제든지 물을 마시면서 곧바로 따라갈 수 있는 길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처럼 회심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이끄십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에 멀리서 보고 달려와서 목을 안고 입을 마추시는 아버지처럼(눅 15:20)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는 자들을 이끄십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11쪽).
"울며 돌아오리니"라고 함은 기쁨의 눈물또한 과분한 은혜 때문에 감격하여 회개하는 눈물로 돌아온다는 의미이다(참고. 슥 12:10-14). 구원받을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받을 때에도 마음이 부드러워지지만 벌을 받을 때에도 부드러워진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반대이다.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란 문구는 "그들이 간절히 기도할 때에 내가 그들을 인도하리라"라고 번역하여야 한다(Laetsch). 과연 이 예언과 같이, 포로 된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눈물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였다(시 127:1-). 언제나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간절한 기도자들에게 임한다(출 2:@3-25). "물 있는 계곡(נַ֣חֲלֵי מַ֔יִם)"이란 말은 ... 사막이나 광야의 메마른 땅에 혹시 있는 흐르는 물을 가리킴인데,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사막 여행자에게 말할 수 없이 귀한 것이다(시 84:6). 사막에서 바른 길이란 이런 물 있는 데로 경유해 가는 길이다. 이것은 또한 신약시대의 복음을 비유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함은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을 보호하시는 신이심을 가리킨다. "에브라임"은 북국(이스라엘) 열 지파를 대표하는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을 "장자"라고 하심은 그를 바벨론에서 구원하심에 있어서 유다 민족과 마찬가지로 하실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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