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1. 17:00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목차
예레미야 31:10-22
찬송가 525장 돌아와 돌아와
울며 돌아오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울며 하나님께 돌아올 것입니다(31:9). 울음과 눈물은 회심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사람이 회심해서 하나님께 돌이킬 때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울면서 돌아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그를 끌어 안고 맞아주십니다(눅 15:20).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이방들이여
10 이방들이여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11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노래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떼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10절). 흩으심은 재앙을 내리심으로 심판하셨다는 뜻입니다. 모으시고는 그들을 회복시키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자가 양떼를 지키시는 것처럼 그 택하신 백성을 지키십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바이겔(A. Weiser)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여호와는 세계의 주님이시므로, 그가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것은 세계 열방들에게도 의의를 가진다" 우리는 이방인들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하신 것으로 우리 구원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죽어 무덤에 묻힌다고 하더라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보호하시고 부활하게 하실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겔 37:12). 여호와께서는 우리 목자로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 우리를 여호와의 집으로 반드시 이끄실 것입니다(시 23편).
속량하셨으니
여호와께서는 야곱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습니다(11절). 즉 바벨론에서 그들을 구하여내신 것입니다. 여기서 속량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대신 다른 이의 생명을 내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사 43:1-4).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을 바벨론에서 구출하시기 위하여, 바벨론 사람들로 메대 바사에게 죽임을 당하도록 하실 것이었다.
그런데 이 예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죄와 사망, 그리고 사탄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생명값을 치르시고 구출해 내셨습니다.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12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그들" 즉 유다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곡식과 포도주와 어린 양과 소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게 됩니다.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게 됩니다. 다시는 근심이 없게 됩니다. 그들은 시온, 즉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복을 온전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복은 심령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는 복입니다(요 7:38). 이 예언은 성령 강림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성령 강림 후에 제자들은 근심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근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사명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14쪽).
예레미야의 이 부분 말씀은 신약시대에 있을 복음적 은혜의 부요를 예언한다. 라에취(Laetsch)는 말하기를, 여기 "곡식"은 생명 떡을 비유하고, "포도주"는 복음을, "기름"은 성령의 은사를, "양의 떼와 소의 떼"는 모든 다른 신령한 은혜들을 상징한다고 했다.
...
여기 "심령"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영혼(נֶפֶשׁ/네페쉬)이란 말이다. 그들의 영혼이 "물댄 동산 같겠고"라고 했으니 물이 마르지 않는 동산에는 모든 좋은 수목이 풍성함과 같이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늘 점령되어 있는 영혼은 생명이 풍성하다. 이런 말씀을 보아서 이 부분의 예언은 신령한 은혜가 풍성한 신약시대를 가리킨 것임이 분명하다.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도 또 다시 신약적인 신령한 은혜로야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롬 5:3; 요 16:20-22).
항상 기뻐하는 교회
13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14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을 회복시키실 때 그 백성의 모든 구성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기쁨을 표현할 것입니다.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할 것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13절). 또한 제사장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름으로 흡족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으로 당신님의 백성을 만족하게 하실 것입니다(14절).
교회는 기쁨의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누리는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기쁨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기에 교회는 기뻐합니다. 이 기쁨은 상황을 초월하는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옥에 갇혀 있지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편지에 기록합니다(빌 4:4). 이 기쁨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15절에서 분위기가 갑자기 변합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 즉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소리를 말씀합니다. 라헬의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라헬의 아들들이 거하는 지경, 즉 요셉과 베냐민의 지경으로 포로들이 잡혀가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15-416쪽).
이 말씀은 유다 민족이 주전 586년 경에 바벨론으로 잡혀갈 사건을 예언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 사건에 대해서 시적으로 말한다. 곧 베냐민 지파의 조상 "라헬"이 그 잡혀가는 후손들을 애곡한다고 한다. 라헬은 이미 죽은 지 오래 되었는데 어떻게 애곡할까? 이것은 시적 표현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 시는 가상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많다. 이런 가상적 표현은, 유다 민족에게 장차 임할 고통이 매우 극심할 것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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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는 헤롯의 베들레헴 영아 학살 사건을 가리켜 이 구절 예언의 성취라고 하였다(마 2:17-18). 예언은 미래의 일들을 압축시켜 한몫 표현시키는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런 예언은 한 가지 이상의 사건들로 성취된다. "자식이 없어져서"는 라헬의 자손들이 바벨론의 침략 때문에 많이 죽고, 또 사로잡혀 간 사실을 가리킨다.
죽음을 통과한 후 오는 기쁨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거져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통과해서 오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오는 것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가지 않았다면 귀환도 없는 것처럼 슬픔을 통과해서 기쁨이 옵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서 부활의 영광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께서 행하실 일을 역사 가운데 보여주었습니다. 이 역사는 헤롯 왕 때에 다시 재현되었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무한한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무한히 값진 것입니다.
은혜로 주시면서
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께서는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삯은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눈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길에 뿌려집니다. 그 눈물의 삯으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을 얻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의 공로를 긍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라헬이 울고 눈물을 흘린 이유는 그들의 죄값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징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은혜를 베푸셔서 운 것에 대해서 삯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16쪽).
이 구절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여호와의 말이니라"로 끝맺는다. 이렇게 함으로, 그 위로의 약속은 인간의 상상이 아니고 거짓 없으신 하나님이 주신 것임이 보장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 값으로 사정없는 고생과 애통을 당하는 것도 사실이지만(히 12:5-13; 렘 31:15), 그 뒤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만족하게 임하는 것도 확실하다. 그러므로 애 3:30-32에 말하기를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하였고, 미 7:8, 9에는 말하기를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당하려니와 마침내 주께서 나를 위하여 논쟁하시고 심판하시며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라고 하였다.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이것은 유다 민족이 구원의 위로를 받게 된 것이 바벨론에서 고생한 대가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고생해야 할 순서를 지냈으니 만큼,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해방의 광복을 누리도록 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너희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17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소망은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라는 것입니다. 16절과 17절은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것이 강조됩니다. 즉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당하는 슬픔에 압도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강하게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반드시 그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너의 장래"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17쪽).
"너의 장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하리테크(אַחֲרִיתֵ֖ךְ)이니, "너의 마지막 끝"이라는 의미이다. 신자가 자기 현재의 보이는 형편을 척도로 할 때에는 하나님이 사랑하여 주시는 여부를 측량하지 못한다(Calvin). 신자에게 더 좋은 복은 미래에 온다. 하나님께서 현재에는 신자를 기뻐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신자는 진실하게 회개만 하면서 참아 기다려야 된다.
포로된 현실에 집중하면 보면 암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 소망이 생깁니다. 우리는 이미 해방된 사람으로서 끝 날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암울한 현실을 지나고 있습니까? 주님으 약속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뉘우치는 백성들
18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19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18-19절은 뉘우치는 백성들의 말을 묘사합니다. 에브라임은 뉘우치면서 탄식하기를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는 목이 곧은 송아지라는 뜻입니다. 즉 이끄는 대로 오지 않는 송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 송아지를 길들이려면 고통과 고난이 가해져야 합니다. "징벌"이 그런 의미입니다. 이 탄식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탄식입니다. 뉘우침(19절)입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길이 생명의 길인 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라고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러면서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라고 합니다(18절).
뉘우침과 회개
19절에서는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어렸을 때에는 부끄러운 일을 많이 저지릅니다. 나중에 뉘우치고 보면 그 일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그러므로 볼기를 맞는 것입니다. 왜 자기가 징벌을 당했는지를 깨달은 사람의 뉘우침입니다. 회개가 이런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설교문을 남겼습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18쪽).
1.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이 명백함
범죄하고 핑계하거나 자기 자신에게 아첨하는 자는 멸망할 것밖에 없다. 그러나 진실되이 아프게 스스로 탄식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신다. ... 그는 범죄는 자기 자신을 낮고 천하게 여긴다. 따라서 그는 이제 죄악을 끊고 나서기 위하여, 이 세상 어떤 것에 있어서는 손해를 보기로 각오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범죄한 손과 발을 찍듯이, 범죄한 눈을 뽑듯이, 손해 볼 것을 각오하라고 말씀하신다. 탕자도 회개하며 각오하기를,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라고 하였다(눅 15:18, 19). 범죄한 몸은 더러워진 몸이니, 이제부터는 천대와 멸시와 고통을 당하기로 각오해야 진리에 합당하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강도도 죄 값으로 손해 볼 각오를 단단히 하는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라고 하였다(눅 23:41).
2. 징계를 달게 받음
...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에 그 고통을 자기 죄 값인 줄 앎이 겸손이며, 또 회개의 태도이다. ... 환난을 받을 만한 두드러진 원인이 없었던 욥도 ...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라고 하였다. 회개자는 징계를 달게 받는 자이다. 잠 10:17에 말하기를,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 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 하였고, 잠 13:18에는,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 하였고, 잠 29:1에는 말하기를,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라고 하였다. 욥 5:17-18에 말하기를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라고 하였다. 징계를 달게 받지 않는 것은 지옥 갈 자의 특징이다. 요나는 회개하며 징계를 감수하는 의미에서 한 말이,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욘 1:12)"라고 하였다.
3. 하나님만 바라봄
18절에 말하기를, 에브라임은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다"고 하였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는 그 주인에게 잘 순종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개과천선할 수 없는 자인 줄 바로 알고 탄식한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야 자기의 회개가 이루어질 줄 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만이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가져오게 한다. 두 소경이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고쳐 주시기를 구할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묻기를,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고 하셨다. 그때에 그들이 대답하기를,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 믿음대로 되라"라고 하셨다. 그 때에 그들의 눈은 밝아졌다(마 9:27-30). 이 사적은 믿음 만이 우리에게 참된 하늘의 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거나 의지할 때에 마귀의 기계가 되며, 결국 망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해방되며, 또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된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4. 과거의 죄악을 원통히 여김
19절을 보면 에브라임(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징계를 통하여 교훈을 받고 돌이킨 후에는 "뉘우쳤고", "볼기를 쳤다"라고 한다. "볼기"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실상 "허벅다리"인데 그것을 침은 원통함을 표시함이다. 이렇게 그들은 철저히 회개할 것이라고 한다. 죄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죄악을 문제시하지 않는다. 잠 14:9에 말하기를,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라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죄악이 무엇임을 깨닫는 자는 그것을 극히 미워한다. 비둘기는 독수리를 미워할 뿐 아니라, 독수리 털만 보아도 놀란다고 한다(박물학자 Androvaldus의 말). 설교자의 입에서 "죄"라는 말을 무심히 듣는 자들은 죄를 그림에 있는 사자같이 여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죄 때문에 징계를 받아 본 사람은 그것을 심히 두려워할 것이다.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우리가 고통으로 인하여 자신을 반성하게 되어야 죄를 깨닫는다"라고 하였다. 평안은 우리로 잠자게 하는 마취제이다. 고난이 아니고는 사람에게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채찍질 하신다(히 12:5-6). 징계를 받는 일이 없는 신자는, 도리어 자신이 불택자가 아닌가 하여 두려워해야 된다.
19절에 나타난 에브라임의 기도는 참된 회개의 기도이다. 그는 징계를 받은 결과로 그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말로 기도한다. 곧 자기는 "뉘우쳤고", "볼기를 쳤고", "치욕을 지고", "부끄럽고", "욕되다"고 한다. 이런 기도가 참된 기도이다. 스펄전(Spurgeon)은 말하기를, "자신이 깨어진 기도만이 최선의 기도이다"라고 하였다(Broken prayers are the best prayer).
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회개하는 자를 위로합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책망할 때 섣불리 하지 않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한 마디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 자녀들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또한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게 들끓으니"라고 하십니다. 자녀가 어디라도 아파서 고통을 당하면 어머니는 그 자녀의 고통에 애간장이 녹습니다.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도 경험하십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자식이 회개하고 돌아오고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식을 불쌍히 여기시겠다고 하십니다(20절). 이 말씀은 하나님의 깊으신 헤아리심과 사랑과 애끓는 마음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21쪽).
5. 회개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
20절에 말하기를,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라고 하였다. 잠 28:13에 말하기를,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라고 하였다.
21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스라엘에게 다시 "처녀"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이정표를 세우고 푯말을 만들어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돌아오게 되는 성읍들을 "네 성읍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길들은 "전에 가던 길"입니다. 그 성읍들은 빼앗겼었으나 이제 도로 찾았습니다. 빼앗긴 것을 도로 찾는 가장 빠른 방법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을 다시 얻습니다. 하나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깊이 유념해야 합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21쪽).
"이스라엘" 백성을 "처녀"라고 함은 그 백성이 주님을 신랑과 같이 모셔야 할 자이기 때문이다(고후 11:2).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들로 하여금 바벨론에서 유다로 돌아올 소망을 가지도록 주의시킨다. 그들에게 돌아올 길을 기억하라는 의미에서, "길표를 세우며 ... 표목을 만들"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이 범죄할 때에 징벌하심은, 그들로 낙심케 하려는 것이 아니고 새 소망을 가지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징계를 받는 중에 소망을 잊어버리기 쉬우니 이것을 경계해야 된다. 우리 민족이 38도선 문제로 (막힌 지 오래 된 것으로) 인해 낙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이 아니다. 우리는 장차 돌아갈 소망을 단단히 가지고 힘써 기도하며 믿고 회개할 따름이다. 믿고 회개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돌아갈 준비라고 할 수 있다. 그것(믿고 회개하는 것)은 비유컨대 "이정표를 세우며 ... 푯말을 만드는" 운동이다.
박윤선 목사님은 잃어버린 북한 땅을 바라보며 이 말씀을 적용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한국 교회는 잊지 말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2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 싸리라
이스라엘은 "처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현재 "반역한 딸"입니다. 현재 그들은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은 미래에 처녀로서 하나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그 일은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새 일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둘러 싸리라는 말씀에 대한 해석은 아래 박윤선 목사님 주석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22쪽).
"방황"한다고 함은 불확실한 태도로 주저함이다. 신자는 신앙의 길로 일로매진 하면서 심령의 평안을 가져야 한다.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이것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실 하나님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참조. 사 43:19). "여자가 남자를 둘러 싸리라"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다. 1) 동정녀 마리아가 남자 예수님을 잉태하여 해산할 것을 의미한다고 함. 2) 교회(여자로 비유되었음)가 하나님(남자로 비유되었음)을 찾으리라는 뜻이라고 함. 3) 바이저(A. Weiser)는 말하기를, 이 문구의 의미는 "부부 관계의 회복을 의미한 것으로 자손을 번식하리라(창 1:28; 렘 31:27)는 창조 축복을 찾아 누림인 듯 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보다는 다음의 것이 훨씬 더 확실하다. 4) 이스라엘이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갈 때에는 여성과 같이 약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여성 같았던 이스라엘이, 후에 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남자 같은 바벨론 사람을 이기고 해방되리라는 뜻이라고 한다(Calvin, Henry, Blayney). 이 넷째 해석이 옳은 이유는, 여기 "남자"란 히브리어 가베르(גָּֽבֶר)가 일반적으로 남자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고, 국방을 위한 용사(勇士)나 역사(力士)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문구에 있어서의 대조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이성(異性)의 대조가 아니고 약자와 강자의 대조이다. 그러므로 이 문구의 의미는 약한 이스라엘이 강한 바벨론을 이기고 나오게 될 것을 예언함이다. "둘러 싸리라"란 말의 원어 테소베브(תְּס֥וֹבֵֽב)는 전쟁에 있어서 원수를 포위하여 잡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으로 본다면 새 일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포위하여 무력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확장시켜서 적용하자면 약해 보이는 생명이 강해 보이는 죽음을 삼켜버린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명의 승리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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