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3. 18:58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목차
예레미야 32:1-15
찬송가 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새 언약과 예루살렘의 멸망
예레미야 3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말씀하셨습니다. 새 언약은 신약 시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극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극치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31장은 예루살렘 성이 회복될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재림 때 부활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예언하는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집니다(계 21:2). 이런 벅찬 소망의 말씀은 예루살렘 성이 포위된 상황으로 이어집니다(32장). 우리 신자들은 가장 암울한 그 때 가장 찬란한 비전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소망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1 유다의 시드기야 왕 열째 해 곧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2 그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이 때는 시드기야 왕 열째 해입니다. 시드기야가 위에 있었던 기간은 597년부터 586년입니다. 그러니까 열째 해는 곧 시드기야 왕을 끝으로 유다가 망하는 그 해입니다. 이 때는 멸망하기 바로 직전인 것입니다. 이 때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유다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습니다(2절).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러면 얼른 항복하고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를 달게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더욱 강퍅해져서 예레미야를 가두어 놓고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것을 보면 그들은 영적으로 소경이요 극도로 악했던 것이 드러난다. 그들은 예언이 성취되어 감을 밝히 보며서도 그 예언자를 박해하고 있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42쪽).
충신과 악인
3-5 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차지할 것이며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 가리니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
3-5절에는 예레미야가 감금된 이유가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길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시드기야는 잡혀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또한 싸워도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을 들은 시드기야는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느냐 하고 그를 가두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42쪽).
이것은 예레미야가 그때의 유다 민족을 미워하여 발표한 하나의 개인적 저주가 아니다. 이것은 그도 말하기 원치 않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받은 사명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직언한 것뿐이다(참조. 20:7-9). 이것은 물론, 그때에 시드기야 왕을 위시하여 유다 지도자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케 하려는 충언이었다. 그러나 그 때의 지도자들은 악했기 때문에 이런 충성된 사람을 도리어 핍박했다. 언제나 악정자(惡政者)들 앞에서 간신은 용납되나 충신은 박해를 받는 법이다.
충신은 전체를 봅니다. 잘 되는 길을 제시합니다. 잘 되려면 악한 사람들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돌이켜야만 합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를 싫어합니다. 그저 자기 자신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신은 박해를 받습니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하나님 나라의 충신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하여 진정 잘 되는 길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를 달게 받는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갇혔습니다.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신약시대로 오면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행 5:41). 그들은 오직 예수님께만 영광 돌리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박해를 받아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시대에 삽니다.
밭을 사라
6 예레미야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8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9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0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12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 앞과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13 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봉인하고 봉인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멸망이 임박한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그 말씀은 밭을 사라는 말씀이었습니다(7절). 예레미야는 곧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밭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밭을 사라고 하신 이유는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15절)"라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매매 증서가 효력을 발휘할 날이 올 것이라는 뜻입니다(14절). 이것은 곧 비록 지금은 나라가 망하지만 정한 때에 나라가 회복되고 이전과 같은 사회제도가 다시 자리잡힐 것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암울한 때에 가장 희망찬 말씀을 주시는 분
하나님께서는 가장 암울한 때에 가장 희망찬 말씀을 해 주십니다. 이런 말씀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십니다. 동시에 자비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기에 가장 암울한 시점에서 가장 희망찬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상황이 암울할수록 더욱 큰 희망을 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더욱 생생해지고 커지고 가까워집니다. 누구든지 개인적 종말을 맞이해야 합니다. 즉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에 밭을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레미야가 산 밭은 하나님의 땅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는 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다. 종말이 올수록 더욱 담대한 소망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위의 구절들에 대한 해석은 아래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을 참조하세요(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42-444쪽).
6-15절은 예레미야가 시위대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대로 행동 예언한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는 법이 없다(딤후 2:9). 옥에 갇힌 예레미야에게도 그 말씀은 임하여 거기서도 여전히 역사하였다. 이 행동 예언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그가 그의 사촌에게서 "밭을 사는"(9절) 것이었다. 이것은, 유다 나라가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패망된 후에도 반드시 그 민족이 포로 되었던 데서 돌아와서 토지를 매매하는 평안한 시절이 있을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이 행동 예언에 있어서 우리가 취할 만한 영적 교훈이 몇 가지가 있으니, 1) 예언자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 때문에 폐허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복된 건설을 내어다 볼 수 있다는 것. 2) 선지자의 이 예언 행동은 어디까지나 신앙으로 하였다는 것. 다시 말하면, 그의 신념은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한 근거로 하고 일어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면 틀림없는 줄 알았다. 8절 초두의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란 말과 8절 끝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란 말이 그의 행동 근거를 성립시켰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캄벨 몰간(Campbell Morgan)이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는, 예레미야의 신앙적 행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1) 그런 암흑시대에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신 확실한 광명(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행동하였다는 것(8-10). 그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레미야의 사촌 하나멜이 와서 그에게 밭을 사라고 하기 때문에, 그것이 확실히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그가 순종하여 밭을 산 사실이다. 신앙은 맹목적 행동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를 아는 지식적 행동이다. 2) 예레미야의 탐문(32:16-25). 신앙은 모험이기 때문에 신앙자 자신의 마음속에 그 취한 행동에 대하여 모르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의심하는 것은 아님).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7절). 여기 "무를 권리(מִשְׁפַּ֥ט הַגְּאֻלָּ֖ה)"란 말의 히브리 원어는 물러 가질 권리를 의미한다. 레위기 법에 의하면, 제사장족에 속하는 자는 땅을 팔 때에 자기와 같은 족속에게만 팔았다(레 25:32-34).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כִּדְבַ֣ר יְהוָה֮)"(8절). 이것은 이 부분에 나타난 예레미야의 신앙을 발생시켰다. 곧, 앞에 기록된(7절)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과연 실제적으로 그의 사촌 하나멜이 그를 찾아와서 밭을 사라고 하기 때문에 그는 신앙적 행동을 취하여 밭을 산 것이다. 언제든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초자연적인 진실성과 그 영적 감미(甘味)에 부딪쳐 믿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불신앙 심리라도 녹이고 신앙을 발생시킬 권능을 가진 것이다.
"십칠 세겔"(9절). 이것은 미화(美貨)로 10달라 5센트이다(한 세겔이 은일 때에는 노동자의 4일치 품삯이다. 그러므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한 세겔은 약 400달러 정도 된다. 그러므로 17세겔은 약 6,800달러다. 우리 돈으로 하면 2024년 기준 약 천만 원 정도라고 볼 수 있다-옮긴이 주).
"봉인하고 봉인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가지고"(11절). 이것은 예레미야가 그 밭을 샀다는 증서 둘을 써서, 하나는 인봉하고 하나는 인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봉"한 것은 누구든지 그 내용에 손대지 못하도록 영구 보존하기 위한 것이며, "인봉하지 아니한" 것은 누구에게나 보이기 위한 문서로 작성된 것이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두 문서를 작성한 것은 그때에 통행되던 매매의 법규대로 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신앙 행위는 인간 생활의 특수 부문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도 평범한 모든 활동(매매하는 일 같은 것)에 관계하고 있다. 그러므로 벨드캄프(Veldkamp)는 말하기를, "그리스도 신자가 평범한 일도 신앙으로 하기 위하여 은혜를 받는다"라고 하였다.
"바룩(בָּרוּךְ)"(12절). 그는 공증대서인(公證代書人)과 같은 공직인(公職人)이 아니고 선지자 예레미야의 젊은 친구로서 그의 서기(書記)였을 것이다(참조 36장).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14절) "토기"(בִּכְלִי־חָ֑רֶשׂ)는 문서를 간직함에 있어서 습기가 들지 않도록 보관하는데 사용되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15절). 곧, 예레미야가 밭을 사고 그 문서를 영구히 보존한 것과 같이, 필경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안전한 사회를 이루고 토지 매매 관계가 정상화되리라는 의미이다.
박윤선 목사님의 해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해서 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상황을 초월합니다.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바울 곁에 서셔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 23: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갇혀있었지만 누구보다 자유롭게 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증언했습니다.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또한 신앙의 행위는 인간 생활의 특수 부문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모든 활동에 관계한다는 말씀도 진리입니다. 우리가 집을 사고 파는 행위, 거주할 곳을 정하는 행위, 진로를 정하거나 직장을 정하는 행위 등 모든 것이 신앙 행위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말씀을 읽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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