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예레미야 40장 1-16절 | 이방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 말씀과 그다랴

2024. 7. 29. 15:28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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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예레미야 40:1-16

    찬송가 487장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었고 불사름을 당했습니다. 시드기야는 끝까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항복하지 않고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그는 붙잡혀서 느부갓네살의 면전에서 심문을 당했습니다. 그 눈 앞에서 아들들이 죽임을 당했고 그 눈이 뽑혀서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눈이 뽑혀서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 땅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것도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된 것이었습니다. 40장에서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의 일들이 펼쳐집니다. 

    라마에서 풀려난 후에

    1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포로를 바벨론으로 옮기는 중에 예레미야도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가다가 라마에서 풀려난 후에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포로를 바벨론으로 옮기는 중에 예레미야도 잡혔습니다. 그런데 39장에 보면 예레미야는 이미 그를 그다랴에게 넘겨서 집으로 데려가게 했다고 나옵니다(39:14). 이것을 해석할 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39장에 나온 말씀은 예레미야에게 일어난 일을 대략적으로 기록하고 40장이 과정을 더 자세하게 기록했다는 해석입니다. 예레미야는 먼저 잡혀서 사슬로 결박되어 끌려가고 있었고(40:1)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명령을 했고(39:11) 예레미야는 그 때 라마에서 풀려나서 그다랴에게로 갔다는 것입니다(39:14; 40:6). 다른 해석은 박윤선 목사님의 해석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19쪽). 

    "예레미야도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가다가". 예레미야는 일찍이 느부갓네살의 명령에 의하여 바벨론 군대의 특별 취급을 받아 안전보장 되어 있었으나(39:14), 그 후 예루살렘이 혼란한 중에 그도 바벨론 군대에게 체포되어 포로들 중의 하나로 바벨론으로 옮기던 중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라마"란 지방에서 해방되었다. "라마"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5마일(8km)쯤 되는 지점이다(참조. 31:15). 

     

    두 가지 해석 중에서 어떤 것을 취해도 괜찮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가 풀려난 곳이 "라마"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 15-17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라마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는 이유는 바벨론에 의해서 잡힌 이스라엘 백성들이 "라마"를 거쳐서 바벨론으로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그들의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일이 예레미야에게 먼저 성취되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라마에서 풀려나서 돌아온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망이 됩니다.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어떤 소망이냐면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라는 소망입니다. 

     

    라마에서 예레미야가 돌아온 사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취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이 영아들을 죽일 때 건짐을 받으신 것입니다(마 2:18).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 죽음에서 먼저 살아나신 이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이들이 다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죽음을 맛보시고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도 장래에 소망을 갖게 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요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은 이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예레미야라고 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마 16:14). 이 말씀도 그냥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라마에서 풀려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계시 운동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라는 말씀을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19-520쪽).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여기 이른바 "말씀"은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가? 이것은 별다른 예언이 아니고 다만 3절 이하에 나오는 사건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예언을 성취시키시는 사건들도 역시 하나님의 계시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에 비추어서 본다면 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가리켜서 예언한 것도 계시이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예언을 다 이루신 것도 계시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서 "말씀"이라고 합니다(요 1:1).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성육신하신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이셨습니다.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셨습니다(요 19:30). 

    이방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 말씀

    2   사령관이 예레미야를 불러다가 이르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곳에 이 재난을 선포하시더니
    3   여호와께서 그가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제 이루어졌도다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

     

    사령관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셨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재난을 당한 이유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루어졌도다"라고 합니다. 사령관 느부사라단은 이방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인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성취를 깨닫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참 놀랍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롬 11:25)" 예루살렘의 함락은 유대인이 우둔하게 되어 순종하지 않음으로 이방인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일이 일어난 사건입니다. 

     

    느부사라단의 말,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

     

    이 구절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20쪽). 

    바벨론 왕의 시위대장은 이런 사상을 어디서 얻었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1) 시위대장은 비록 이방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그런 말을 하였다는 것이다. 2) 이 두 구절에 표현된 내용은 예레미야의 예언의 골자로서 40년동안 거듭거듭 선포되었던 것이니만큼, 유대인은 그것을 암기하리만큼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땅에 침략군으로 처음 온 시위대장도 그 사상을 얼른 섭취할 수 있었겠다.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두워질 때에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시켜서 진리를 고백하게 하여 그들을 부끄럽게 만드시는 사실이다. 요나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가던 중 배 밑에서 자다가 이방인의 경책(警責)을 당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라고 한 말이다(욘 1:5, 6). 

     

    박윤선 목사님의 지적도 옳습니다. 교회가 그릇갈 때에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 사람들을 경책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서에 나온 말씀도 성경 전체로 비추어 보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경륜이 담긴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요나와 그를 살리기 위해서 애쓰며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방인(욘 1:16)이 대조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끝까지 하나님께 항변하는 요나와 하나님께 회개하는 니느웨 백성이 대조됩니다. 이 안에도 바울이 깨달은 하나님의 경륜이 숨어 있습니다. 

    예레미야를 풀어줌

    4   보라 내가 오늘 네 손의 사슬을 풀어 너를 풀어 주노니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거든 가자 내가 너를 선대하리라 만일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거든 그만 두라 보라 온 땅이 네 앞에 있나니 네가 좋게 여기는 대로 옳게 여기는 곳으로 갈지니라 하니라
    5   예레미야가 아직 돌이키기 전에 그가 다시 이르되 너는 바벨론의 왕이 유다 성읍들을 맡도록 세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백성 가운데 살거나 네가 옳게 여기는 곳으로 가거나 할지니라 하고 그 사령관이 그에게 양식과 선물을 주어 보내매
    6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사니라

    사령관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를 풀어줍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합니다. 바벨론으로 가기를 원하거든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거기에 가면 자기가 선하게 대우해 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벨론으로 가지 않기를 원하거든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라고 합니다(4절). 이어서 바벨론이 유다 성읍들을 맡도록 세운 그다랴에게 가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든지 하라고 하면서 예레미야에게 양식과 선물을 주어서 보냈습니다. 예레미야는 세 가지 중에서 그다랴에게로 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6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20-521쪽). 

    여기 기록된 말씀은 예레미야에 대한 안전보장이 얼마나 철저한 것을 보여준다. ... 이방 군인이 이렇게도 주밀하게 예레미야를 보호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로 된 것이다. 그것은 예언 성취이다. 예레미야를 보호할 것에 대한 예언은 1:8, 18; 15:20, 21 등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바벨론 군대로부터도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전방위적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합니다(찬송가 434장).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께 우리 몸과 영혼을 맡기면 그것 자체가 만사형통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요 10:28-29).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생명은 완벽한 보호를 받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다윗의 생명처럼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여있기 때문입니다(삼상 25:29). 

    그다랴가 유대 총독으로, 하지만

    7   들에 있는 모든 지휘관과 그 부하들이 바벨론의 왕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그 땅을 맡기고 남녀와 유아와 바벨론으로 잡혀가지 아니한 빈민을 그에게 위임하였다 함을 듣고
    8   그들 곧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두 아들 요하난과 요나단과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느도바 사람 에배의 아들들과 마아가 사람의 아들 여사냐와 그들의 사람들이 미스바로 가서 그다랴에게 이르니
    9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그들과 그들의 사람들에게 맹세하며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사람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면서 바벨론의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
    10   보라 나는 미스바에 살면서 우리에게로 오는 갈대아 사람을 섬기리니 너희는 포도주와 여름 과일과 기름을 모아 그릇에 저장하고 너희가 얻은 성읍들에 살라 하니라
    11   모압과 암몬 자손 중과 에돔과 모든 지방에 있는 유다 사람도 바벨론의 왕이 유다에 사람을 남겨 둔 것과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그들을 위하여 세웠다 함을 듣고
    12   그 모든 유다 사람이 쫓겨났던 각처에서 돌아와 유다  미스바에 사는 그다랴에게 이르러 포도주와 여름 과일을 심히 많이 모으니라
    13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들에 있던 모든 군 지휘관들이 미스바에 사는 그다랴에게 이르러
    14   그에게 이르되 암몬 자손의 왕 바알리스가 네 생명을 빼앗으려 하여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보낸 줄 네가 아느냐 하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믿지 아니한지라
    15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미스바에서 그다랴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되 청하노니 내가 가서 사람이 모르게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죽이게 하라 어찌하여 그가 네 생명을 빼앗게 하여 네게 모인 모든 유다 사람을 흩어지게 하며 유다의 남은 자로 멸망을 당하게 하랴 하니라
    16   그러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 이르되 네가 이 일을 행하지 말 것이니라 네가 이스마엘에 대하여 한 말은 진정이 아니니라 하니라

     

    7절부터 16절까지는 그다랴가 등장합니다. 그다랴는 바벨론 왕이 유다 땅을 맡긴 사람입니다(7절). 그다랴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갈대아 사람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면서 바벨론의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라고 맹세했습니다(9절). 이 말은 예레미야가 그동안 계속 전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이제 그 말씀에 순종하여 징계를 달게 받고 바벨론 왕을 섬기면 되었습니다. 그다랴는 갈대아 사람을 섬기겠다고 하면서 포도주와 여름 과일을 저장하라고 명합니다(10절). 그 명령대로 했는데 포도주와 여름 과일을 심히 많이 모았습니다(12절). 그러니까 바벨론 왕을 섬기는 것이 맞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백성에게 먹구름이 드리웁니다. 바로 느다냐의 아들 이스라멜 때문에 임하는 먹구름입니다. 그가 그다랴에게 온 것은 그의 목숨을 빼앗기 위한 것이었습니다(14절).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은 "암몬 자손의 왕 바알리스가 네 생명을 빼앗으려 하여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보낸 줄 네가 아느냐"라고 그다랴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스마엘을 죽이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만약 그다랴가 죽으면 유다의 남은 자가 멸망당할 위기에 처하기 때문입니다(15절). 그러나 그다랴는 요하난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41:2).

    나쁜 무화과

    박윤선 목사님은 이 구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21쪽).

    여기에 연속하여 일어나는 일들은, 그때에 그다랴의 치하에 모여든 자들도 극히 무가치한(24장에 예언된 "나쁜 무화과"처럼) 자들임을 알려준다(41:1-43:7). 그러므로 그들이 다 흩어지게 된다. 이것은 24:1-10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거기 있는 예언의 내용은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를 "나쁜 무화과"로 비유한 것이다. 여기 시드기야와 함께 유다에 남아 있던 자들은 결국 세째 번으로 잡혀갔는데(39:1-10), 또 거기서 남은 자들 중에 40:7-12에 기록된 무리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제 이 무리들이 얼마나 "나쁜 무화과"와 같이 악하였던 사실이 13절 이하에 기록되었다. 이 무리들은 그렇게 악한 결과로 인해서 또다시 예언의 말씀대로 흩어지게 된다(참조. 43:4-44:30).

    "들에 있는 모든 지휘관과 그 부하들(7절)". 이들은, 바벨론 군대가 유대인들을 세 번째 포로로 잡아 가는 전쟁으로 인하여, 패배를 당하고 들로 도망했던 군인들과 또 그들을 따라간 사람들을 의미한다. 성경의 기록법은 언제나 정확하여 그들의 이름을 기록함에 있어서 부친의 이름까지 밝힌다(8절). ... 이들의 이름에 있어서 특별히 "이스마엘"이라는 자와 "요하난"이란 자가 초두에 나타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두 사람은 이 무리의 장래 운명을 좌우한 인물들이다. "이스라멜"은 총독 그다랴를 죽임으로 민족에게 화(禍)가 미치도록 하였고(41:2), "요하난"은 하나님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반역하고 무리를 거느려 애굽으로 내려간 자이다(43:7). 이런 악인들의 지도를 받던 그때 무리들은,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나쁜 무화과"의 결과를 맺은 것이다(24:1-10). 

    "너희는 갈대아 사람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면서 바벨론의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9절)" 이 말씀은, 그다랴가 자기를 찾아온 피난민들의 앞길을 열어 준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한 것임을 밝힌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살 길이라고 이미 가르쳐 주셨다(21:8, 9). 그다랴는 의인 아히감의 아들로서(26:24),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유다 총독이 되었으며, 그의 지도 원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을 순종한 것으로서, 남은 백성을 선무(宣撫, 베풀 선, 어루만질 무-옮긴이 주)하는(지방이나 점령지의 주민에게 정부 또는 본국의 본의(本意)를 권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다-옮긴이 주) 귀한 일을 하였다. 이때에 피상적(皮相的)인 애국자들은 덮어놓고 바벨론을 반대해야만 애국자라고 했을 것이지만, 진리에 합당한 애국자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순종하면서 백성을 지도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신본주의(神本主義) 애국자는 하나님 지상주의(至上主義)이고 민족 지상주의자가 아닌 것만큼, 혈기에 속한 피상적인 애국자들 앞에서 반역자로 몰리기도 쉬운 것이다. 

     

    여기서 아히감은 예레미야가 성전 뜰에서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쳐서 예언했을 때 그를 죽이자는 사람들로부터 예레미야를 보호해준 사람입니다(26:24). 그의 아들이 그다랴입니다. 그러므로 그다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을 안심시킨 것은 그의 부친 때로부터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온 것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정의 신앙 교육이 참 중요합니다. 

    신본주의 애국자와 인본주의 애국자

    박윤선 목사님은 신본주의 애국자와 인본주의 애국자를 대조합니다. 신본주의 애국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애국을 하지만 인본주의 애국자는 자기 혈기로 애국합니다. 그런데 자기 혈기에 속한 애국은 진정한 애국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초를 당하고 모든 백성들이 재앙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의도가 선한 정책이라도 그 결과가 악한 것은 그것이 인본주의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공산주의가 바로 그렇습니다. 공산주의는 사람을 선하게 보았지만 그 결국은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고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자본주의는 사람이 악한 것을 인정했습니다. 사람이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 결과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역사 가운데 증명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다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선한 의도로 어떤 정책을 펼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가 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애국자가 딱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래는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이 이어집니다. 

    너희는 포도주와 여름 과일과 기름을 모아 그릇에 저장하고(10절). 이 말씀은 돌아온 피난민들이 전화(戰禍)를 겁낼 필요 없이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식료품을 "그릇에 저장"하는 것은 군대 침략의 우려가 없는 때에 하는 일이다. 총독 그다랴가 이런 안전 보장을 약속한 것은, 그가 예레미야의 사상 계통에 속하여 유다 민족의 진로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귀한 지도자를 살해한 이스마엘의 운동은(참조. 15절) 하나님을 거스리는 악한 행동이다. 그야말로 나쁜 무화과의 열매를 가져오는 행동이었던 것이다(참조. 24장에 기록된 "나쁜 무화과" 예언). 

    모압과 암몬 자손 중과 에돔과 모든 지방에 있는 유다 사람도 바벨론의 왕이 유다에 사람을 남겨 둔 것과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그들을 위하여 세웠다 함을 듣고 ...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들에 있던 모든 군 지휘관들이 미스바에 사는 그다랴에게 이르러(11, 13절). "모압", "암몬", "에돔" 민족은 유다 민족의 원수들이다. 그런 나라들 가운데 피하였다가 돌아오는 유대인들 자신도,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지도를 좋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중에서 총독 그다랴를 죽일 자가 일어났다(참조. 14절). 그들이 그다랴의 치하에 돌아온 것은 잘된 일이었으나, 총독은 마땅히 그들을 잘 감시했어야 되었다. 교회 일에 있어서 이단자(異端者)들의 집단에서 하나님의 교회로 돌아오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치리자(治理者)가 그들에 대하여 너무 안심하거나 방임하면 교회에 해가 돌아올 수도 있다. 

    다른 교리를 가지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지도자들

    원수들의 나라들에서 피하여 오는 사람들을 박윤선 목사님은 이단에서 돌아오는 사람들로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치리하는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그들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지금 한국 교회에서 이단 때문에 일어나는 혼란을 미리 본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것은 다른 교리를 가지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지도자들에게도 확장해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신학이 무엇인지 면밀히 살펴서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한국 교회는 적지 않은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이 이어집니다. 

    암몬 자손의 왕 바알리스가 네 생명을 빼앗으려 하여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보낸 줄 네가 아느냐 하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믿지 아니한지라(14절). 이 말씀을 보면, 요하난은 총독 그다랴에게 총독 암살 계획에 대하여 밀고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1) 예레미야의 사상 계통에 속한 그다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유다의 남은 백성의 살 길을 잘 지도하는 좋은 기회에 마귀가 틈탔다는 것.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에는 마귀도 집회 장소를 만드는 법이다(Veldkamp). 우리 한국 격언에도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좋은 일이 있을 때에 더욱 더 조심해야 된다. 

    2) 그다랴가 그 밀고를 받고도 믿지 않은 것은 잘못임. 사랑은 남이 악하게 나올 때에 그것을 다 아량 있게 덮어 준다. 그러나 사랑은 방위(防衛, 막을 방, 지킬 위- 옮긴이 주)도 한다. 치리자는 단체에 미칠 수 있는 해를 막기 위하여 주위를 잘 살피고 방위를 할 줄 알아야 된다. 그다랴는 이 점에 있어서 무책임하였다.

    3) 이때에 그다랴에게 밀고한 요하난의 인격이 총독 암살을 막으려고 나선 것은 좋으나, 그도 역시 후일에 하나님을 순종치 않는 무리의 지도자가 되고 말았다(43:7). 그리하여 이때에 잡혀가고 남은 백성은 멸망을 피할 수 없었다. 이것도 예레미야의 나쁜 무화과 예언(24장)의 성취이다. 

     

    이 일을 볼 때 그다랴가 예레미야의 말씀을 믿은 것은 좋았으나 예레미야의 예언 전체를 다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쉽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게 멸망 당할 것을 예언했고 그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들에 대한 예언은 무엇이었고 그 예언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를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다랴는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분명 남은 자들은 "나쁜 무화과"가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그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자기는 유다의 총독으로서 어떤 정책을 펴나갈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지혜롭게 행동했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예레미야에게 묻거나 하나님께 나아가 물었어야 했습니다. 이점에 있어서 아쉽습니다. 하지만 경건한 왕이었던 요시야도 바로느고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속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다랴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간 만큼 그 죽음으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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