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31. 17:04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목차
예레미야 42:1-14
찬송가 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극도의 혼란 가운데에서
예레미야는 39장부터 41장까지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이고 불사름을 당할 것이고 시드기야는 사로잡힐 것이라는 예언이 다 성취되었습니다. 또한 유다 땅에 남은 사람들이 썩은 무화과처럼 될 것이라는 예언도 성취되었습니다. 암몬의 왕이 보낸 이스마엘은 그다랴를 죽이고 그와 함께 미스바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함으로 남은 백성들에게 극도의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이스마엘에게 잡혔던 백성을 구출한 요하난은 이제 예레미야에게 나아왔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들은 어찌할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마엘이 바벨론 주둔군도 다 죽였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왕이 이 소식을 들으면 예루살렘으로 다시 와서 그들을 치고 멸망시킬 것 같았습니다. 복수가 두려웠습니다(41:18). 그래서 그들은 애굽으로 피하려고 했습니다(41:17). 그런데 무턱대고 애굽으로 피하는 것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물은 것입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
1 이에 모든 군대의 지휘관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와 백성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다 나아와
2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탄원을 듣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이니
3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모든 군대의 지휘관과 요하난과 여사냐와 모든 백성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나아왔습니다(1절).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백성들은 이제 예레미야가 참 선지자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과는 다른 태도로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2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청했습니다(3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33쪽).
유대인들 중 바벨론으로 잡혀가고 남은 백성이 요하난의 지도를 따라 애굽으로 피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앞장 16-18절에서 보여 준다. 이제 이들이 총동원되어 선지자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자기들을 인도해 주기를 구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들이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인도를 요망(要望, 옮긴이 주)하기는 하면서도, 유대 땅에는 머물러 있지 않으려는 전제하에서 그리한 것이다. 이스마엘이 그다랴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도망한 것은, 결국 바벨론 왕의 노를 격동할 것이라고 그들은 알고 있었다(41:18). 따라서 이들은 가나안 땅에서는 자기들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줄로 너무 깊이 각오하고 있으면서, 어쨌든 외국으로 나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수의 남은 백성이 외국으로 나가지 않고 유다 본토에서는 보존되지 못할 줄로 알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레미야에게 찾아와 말하면서, 자기들을 가리켜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라고도 하였고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라고도 한다. 이들이 이렇게 호소하는 것은, 가나안 땅은 위험하여 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딴 곳으로 피난함으로 소수의 백성이나마 보존할 수 있다는 의도에서 그리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으레 국외로 도피할 방침 안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고방식은 처음부터 잘못이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소욕대로 하기를 굳게 정해 놓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함이니, 처음부터 모순된 것이다.
스스로 설 수 없었던 사람들
박윤선 목사님은 핵심을 지적합니다. 예레미야에게 나아온 백성들은 자기 연민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군대가 와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을 목도했습니다. 또한 이스마엘에 의해서 자행된 학살도 지켜보았습니다. 이제 정말 적은 수가 남았던 것입니다. 이런 적은 수의 사람들이 나름 자치권을 행사하면서 사회를 이루고 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게다가 외적의 침입을 스스로 방어할 수도 없고 치안을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이들은 무정부 상태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이스마엘이 자행한 학살로 똑똑히 목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유다 본토에서 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스스로 죽기를 각오하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대하는 태도
그런데 이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예레미야에게 나아오지는 않았습니다. 들어보고 결정하자는 생각으로 나아온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기를 각오하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설렁설렁 내 마음에 들면 지키고 아니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살 길은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목숨을 바쳐서 지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 복음의 말씀을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하고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남은 백성들이 예레미야에게 구한 것은 복음입니다. "살 길"을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들었으면 죽음을 각오하고 그 복음의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자기가 살려고 하면 죽는 것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살 길을 찾습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들어간 사람 중에서 다시 유다 땅에 돌아올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44:13-14). 이렇게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것입니다. 오히려 죽고자 하여 복음을 붙드는 것이 유일한 살 길입니다.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했으나
다만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의지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말할 때, 하나님을 가리켜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합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인정하고 의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34쪽).
그들은 왜 "우리 하나님"이라는 말은 못했던가? 그것은, 그들도 하나님이 특별히 예레미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계시를 그에게 주시는 참된 선지자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과연 바벨론 군대가 와서 유대인들을 많이 잡아 갔으니만큼, 민중은 예레미야를 권위 있게 생각할 만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 땅에 바벨론 군대가 왔을 때에도 예레미야의 처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종으로서 위신을 지켰다. 그런 전란으로 말미암아 시국이 혼란한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라면 세력에 아부하기도 쉽다. 더구나 바벨론에게 항복하여야 산다는 사상을 가진 예레미야로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유다를 치고 들어온 군대에 의하여 인간적으로 친압(親狎, 친할 친, 익숙할 압-버릇없이 너무 지나치게 친하다, 옮긴이 주)하기 쉬운 것이다. 그가 만일 그리했더라면, 그때에 유대인 사회에서 위신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바벨론에 항복해야 산다고 외쳤고, 그는 끝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인격을 깨끗이 지켰다. 또한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대로 그다랴를 유다 총독으로 세우는, 바벨론의 유대인 선무공작(宣撫工作- 전시나 사변으로 군대가 출병하여 적국의 영토를 점령하였을 때,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을 군에 협력하도록 하거나 적어도 적대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행하는 선전ㆍ원조 따위의 활동, 옮긴이 주) 시대에도,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위신을 지켰다. 그러니만큼, 전후(戰後)에 남아 있는 부패한 유대인들도 우리 본문에서와 같이 그의 지도를 구한 것만은 사실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지 친(親)바벨론 사상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에게 반역자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이런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정치 프레임을 뒤집어 쓰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정치적 프레임으로 말씀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참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정치 프레임에 씌워져서 오해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냐와 같은 거짓 선지자는 자기의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한 거짓 선지자입니다(28:1). 어느 쪽이 진짜인지 구분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시간이 해결해 줍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그 말에 열매가 맺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예언한 그대로 되었고 하나냐가 예언한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 예레미야가 참 선지자임이 드러납니다.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사역자들이 맺는 열매를 잘 보면 그가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이 때에는 예레미야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말이 자기들의 뜻과 맞지 않자 그들은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고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성도들의 병폐입니다. 요새는 정치로 교회가 나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의 틀로 설교를 판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
4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말하리라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요청을 수락합니다. 그는 백성을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요청한 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겠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시라는 말,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에서 그것이 드러납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도구요 하나님께서 위하시는 이들은 백성들이라는 의식이 그 말 기저에 놓여 있습니다. 사역자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역자를 부르시는 이유는 그 교역자를 위해서가 아니요 그 교역자가 돌볼 양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아는 교역자는 절대 성도들 위에 군림하거나 자기를 높일 수 없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구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35쪽).
예레미야는 민중의 요청에 의하여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허락한다. 그는 역시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너희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는 이 말로써 하나님과 그들과의 관계가 계약적인 관계임을 밝혀 주며, 그들로서는 하나님을 멀리 할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까지나 순종해야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박윤선 목사님도 같은 말씀을 합니다. 예레미야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고 한 것은 그들과 하나님께서 계약을 맺은 관계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말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이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때 남은 사람들의 처지를 보면 이 말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사회를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수입니다. 미약한 자들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입니다. 주변 모든 나라가 두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입니다. 철저하게 무력한 사람들입니다. 치안도 두렵고 외침도 두려운 상태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누구냐, 바로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느느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마귀는 이 믿음을 약하게 하려고 발악을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이유는 이런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함입니다. 예레미야는 그것을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너희가 아무리 약할지라도, 아무리 무력할지라도 하나님은 너희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은 너희의 하나님이시라, 이렇게 그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장담하는 백성들
5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6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힘을 얻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이르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라고 맹세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라는 말이 그 뜻입니다. 우리가 맹세하오니 그것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시라는 뜻인 것입니다(5절). 그러면서 재차 순종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번에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면서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라고 합니다. 사실 그들은 순종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한 말에 격려는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35쪽).
그때에 민중은, 이 구절들에 있는 말씀으로써 순종을 약속하되 너무 지나친 말로써 하였다. 곧, 1)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라고 한 것은, 죄인된 자기들의 무능을 인정치 않는 과분한 장담이다. 2)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라고 한 것은, 자기들의 실행력과 여호와 하나님의 진실성을 대등(對等)시키는 교만으로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들의 말을 믿어 주도록 하는 위선적인 언사이다. 죄인된 인간들로서 이런 맹세를 할 수 없다. 3)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라고 한 말도 너무 지나친 자신(自信)이다.
위의 세 가지 표현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으로만 인간이 가능하다는 신앙심은 전연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표현 방식은 언제나 실행과 어긋나는 결과를 가져오나니, 흔히 외식자(外飾者)들이 말하는 방식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을 금하시기 위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4-37)"라고 하셨다.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할 때에도 그가 무엇이나 스스로 장담한 일에 있어서는 늘 실패하였으나, 다만 주님의 판단을 의지하는 겸손으로써 고백한 언사만이 참된 열매를 맺었다(요 21:15-17). 지나친 자기주장은 교만일 뿐 아니라,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아는 스스로 속는 자리에 떨어진다(갈 6:3).
사람은 이렇게 위로든 아래로든 극단에 치우치기 쉽습니다. 자기들을 가리켜서 "적은 무리(2절)"라고 하면서 낮아졌다가도 예레미야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4절)"라고 하니까 금방 교만해져서 장담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겸손은 유교에서 가르치는 겸손과 다릅니다. 유교의 겸손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적은 무리라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말고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이끄실 분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 스스로 장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위로나 아래로나 널뛰지 않습니다.
십일 후에
7 십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
백성이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예레미야가 기도한 지 열흘만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36쪽).
예레미야는 민중의 요구에 의하여 그들의 앞길을 보여 주는 계시를 "십일" 동안 기다렸다. 그 계시는 어찌하여 즉시 임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1) 그때에 해외로 도피하려고 서두르는 민중에게 대하여 적당한 하나님의 처사였다.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으로 가지 않고 유대 땅에 머물러 살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침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시를 순종하는 일이다. 그들은 속속히 어디로 가려고만 위주할 것이 아니라, 기다릴 줄 알아야만 될 것이었다. 2)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알려 줄 것이 너무 중대했기 때문이다. 이런 중대한 일에 있어서는 시간을 잡아 가면서 하나님의 지시대로 해결책을 줄 때에, 그 지도를 받는 자들도 그 일에 있어서 신중한 느낌을 가지고 순종하게 될 가능성이 많아진다.
우리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당할 때에는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서 확신이 없이 동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하다.
이 말씀은 참 깊습니다. 그리고 옳습니다. 사람은 급합니다. 뭔가 빨리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당시 유다의 남은 백성들 입장을 생각해 보세요. 열흘은 황금과도 같은 시간입니다. 애굽으로 곧장 내려갔다면 거의 다 도착했을 시간인 것입니다. 바벨론이 언제 쳐들어 올 지 모르는 상황이고 주변 나라들이 언제 침략해 들어와서 그들을 치고 노예로 잡아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급박한 상황이요 금방 죽을 것 같은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이들이게 열흘의 기다림은 너무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열흘 이후에 응답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그들에게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금방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타이밍이 정확해야 뭔가 기회를 잡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점과 타이밍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진정으로 느긋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다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백성을 불러 모음
8 그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군 지휘관과 백성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다 부르고
9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보내어 너희의 간구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가 이렇게 이르니라
예레미야는 자기에게 왔던 모든 사람을 다 불렀습니다(9절).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것을 알렸습니다(9절). 이렇게 예레미야가 모든 사람을 부른 것은 이 사안이 매우 중대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듣고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 "살 길"을 제시하는 말씀입니다. 즉,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하고 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모든 백성을 빠짐 없이 부른 것입니다.
세우고 ... 심고
10 너희가 이 땅에 눌러 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
하나님의 응답은 백성의 뜻과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이 땅에 눌러 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 땅에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신다고 하십니다. 세우신다는 것은 그들이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제도가 잘 이루어지도록 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들을 심으신다고 하십니다. 심으신다는 것은 그들이 이룬 사회가 안정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나무를 심으면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들이 비록 지금은 적은 무리이지만 점점 장성해서 튼튼한 사회를 이루어 살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쏟아졌고 그 진노를 하나님께서 거두셨기 때문입니다(10절 하).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뭔가 안 됐을 때, 실패했을 때, 또는 좌절을 경험할 때 다시 일어날 생각을 하기 보다는 염세적(厭世的)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을 싫어하고 모든 것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천국에 가면 끝인데, 천국에 가고 싶다, 데려가 달라,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런 마음이 들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에 대한 모든 진노를 그 아드님의 십자가에 모두 쏟아 부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진노는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뜻은 세우시는 것이고 심으시는 것입니다. 실패한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심으신 이상 그것을 뽑아버리거나 헐어버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 이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심으시는 사람들입니다.
약해졌을 때 또 다시 우리를 치고 공격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심으신다고 하신 이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37쪽).
그때 유대인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이 한 마디 말씀을 애굽보다 더 믿어야 되며, 바벨론 군대의 재침(再侵) 가능성을 보여 주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이 말씀 한 마디에 근거하고 안정책을 취해야 된다. 그들 중에 누가 이런 믿음이 있었는가?
바벨론의 왕을 겁내지 말라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두려워하는 바벨론의 왕을 겁내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12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리니 그도 너희를 불쌍히 여겨 너희를 너희 본향으로 돌려보내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을 겁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면서 그들을 구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바벨론 왕의 손에서 그들을 건지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11절).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고 그 결과 바벨론 왕도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본향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하십니다(12절).
성경에서 바벨론 왕의 침략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믿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죽음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겪어도 괜찮은 것은 죽음이 우리를 끝까지 잡아두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부활할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끝까지 가두어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종종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더 두려워합니다. 바벨론 왕을 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이 발휘되어야 합니다. 믿는 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적보다 더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그 말씀을 순종하고 의지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바벨론 왕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잘못되리라
13 그러나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우리는 이 땅에 살지 아니하리라 하며
14 또 너희가 말하기를 아니라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양식의 궁핍도 당하지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들어가 살리라 하면 잘못되리라
하나님께서는 경고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지 않으면 잘못되게 됩니다(13-14절). 즉, 복음을 받지 않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선포는 재앙의 선포를 함의합니다. 복음을 듣고 믿어 복종하면 살 것이지만 듣지 않고 믿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39쪽).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가려는 그때의 민중을 만류시켜 가나안 땅에 머물도록 하시는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순종하는 경우에 받을 구원을 약속하셨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옳지 않은 길에서 돌이키시기 위하여, 그들의 순종에 따르는 모든 축복을 보여 주시는 것이 그의 지도 원리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다른 한 편 그들의 불순종에 따르는 재앙에 대해서도 예고하시는 법이다. 그는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두 가지 방면을 보여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결단을 짓도록 하신다. 그때에 민중의 마음속에는 애굽 땅만이 살기 좋은 평화의 땅인 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애굽 땅으로 들어가 살리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상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는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을 마음에도 두지 않도록 경계하셨다(신 17:16; 사 30:2; 31:1).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는 것은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상이니,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사상을 버려야 한다.
구원은 모든 면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얻습니다. 우리는 이미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나온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 소속입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골 1:13). 그 나라에 걸맞게 사는 것은 모든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른 모든 것을 버리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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