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예레미야 43장 1-13절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백성들

2024. 8. 2. 18:58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목차


    예레미야 43:1-14

    찬송가 525장 자비하신 예수여


    재차 경고하셨지만

    요하난과 남은 백성들은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42:2-3). 하나님께서는 열흘 후에 뜻을 보여주셨습니다(42:7). 하나님께서 보이신 뜻은 애굽에 내려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42:10-12). 애굽으로 내려가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42:18).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재차 경고하셨습니다(42:21-22). 이어지는 43장에는 그들이 순종하지 않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든 오만한 자가

    1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곧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신 이 모든 말씀을 말하기를 마치니
    2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예레미야가 42장에 기록된 여호와의 말씀을 다 전했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오만한 자"라고 합니다. 오만한 자(זֵד)의 원어 뜻은 주제넘고 건방지고 무례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들 중에서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가 주동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름이 맨 앞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요하난이 동조했을 것입니다. 주동을 했던 동조를 했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오만한 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기 전에는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자기들의 뜻과 상반되자 바로 예레미야를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대합니다. 그러므로 "오만한" 사람은 하나님보다 자기 뜻이 앞서고 중요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례한 것이고 주제넘은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43쪽). 

    예레미야가 유다 남은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이 필하자마자 그 남은 백성의 지도자들 층에서 예레미야를 반박하게 되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전한 말을 도리어 거짓이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은 하시지 않았다고 우겼다. 그들의 이와 같은 태도는, 1) 배신행위임.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그들의 갈 길을 하나님께 물어 달라고 하지 않았는가(42:1-2). 2)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실을 부인하는 불신앙의 태도임(2절 끝).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의 육체적 욕심을 따라 하나님을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 있는 악한 사상이다. 하나님을 순종치 않는 심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그의 뜻을 행하려는 자만이 깨닫는다(요 7:17). 유다 남은 백성을 인솔한 요하난과 그 일당은 애굽으로 가려는 것이 저희의 뜨거운 욕심이었기 때문에, 애굽에 가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나서려고 한다. 이런 태도는 말할 수 없이 악한 교만이다. 우리 본문은 저들을 "오만한 자"라고 한다. 

    이 시대에서 오만함은 무엇인가?

    이 시대를 사는 성도는 위의 말씀을 적용할 때 문자적으로 적용하면 안 됩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으로서 우리 안에서 친히 말씀하시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당시 유다의 남은 사람들이 예레미야에게 물었던 것처럼 사람에게 묻지 않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권위로 사람의 양심을 좌우할 수 없습니다(요일 2:27). 정통 교회는 사람의 신앙 양심을 속박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의 신앙 양심을 속박하는 일은 이단이나 사이비가 하는 짓입니다.

     

    예레미야 말씀을 너무 단선적으로 적용하면 안 됩니다. 시대가 다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오만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성도 각 사람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고 친히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구해야 할 것은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그렇지만 혹시 분별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성도를 붙드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게 내려지는 진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진노를 예표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진노가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가득한 인도하심만 있습니다. 결국 승리합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혹시 누가 예레미야 말씀을 가지고 자기가 하나님의 사람인양 행세하면서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한다면 그는 이단이요 사이비입니다. 성도는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당시 시대에는 그것이 옳았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의를 이루신 이 때는 다르게 보아야 합니다. 성도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진노에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성도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나에게 진노하시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는 이유는 첫째,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라도 그 안에 죄성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안에 대해서 옳은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어려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의 잘못이지 하나님의 진노가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잘못하고도 징계가 없으면 그는 버림 받은 자식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징계합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징계하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바로잡고 옳은 데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임하는 어려운 일은 성도를 겸손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합니다. 그 결과 성도의 믿음을 굳게 세웁니다. 

     

    정리하자면, 이 시대를 사는 성도는 누구에게 어찌할까 묻지 않습니다. 묻는 것 자체가 성도 자신 안에 계신 성령님을 만홀히 대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 시대를 사는 성도는 당시 이스라엘처럼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혹시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은 손해가 아닙니다. 성도의 구원을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복입니다. 고난을 가장해서 오는 강력한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것을 잘 깨닫고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시대마다 다르게 적용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시대의 "오만한 자"는 누구일까요? 박윤선 목사님께서 잘 지적하셨듯이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가 오만한 자입니다. 가령 성경 말씀에 오류가 있다고 한다거나 예수님께서 도덕적인 가르침을 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물 위를 걸으셨다거나 불치병을 고치셨다거나 죽은 사람을 살리셨다거나 부활하신 기적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오만의 극치를 달리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그렇게 이성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그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시는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성도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의지하지는 않으나 계시된 성경 말씀의 권위를 인정해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사람이 참된 성도입니다. 

    권위의 위아래를 뒤집음

    3   이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너를 부추겨서 우리를 대적하여 갈대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죽이며 바벨론으로 붙잡아가게 하려 함이라

     

    그들은 바룩이 예레미야를 부추겼다고 합니다. 바룩이 예레미야를 부추긴 이유는 그들을 대적하기 때문인데 곧 그들을 갈대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죽이고 바벨론으로 붙잡아가게 하려고 예레미야를 조종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참으로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44쪽). 

    그들은 여기서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 내용을 예레미야의 제자 바룩이 조작한 말이라 하고, 예레미야는 바룩에게 충동된("부추겨서") 것으로 여겼다. 다시 말하면,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유다 남은 백성으로 하여금 또다시 갈대아인의 손에 붙이도록 하는 바룩의 조작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레미야에게 대한 그들의 생트집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옳은 주장을 하는 지도자를 거짓말로 훼방하는 일이 많다. 그들은 훼방으로 이길 줄 생각하는 자들이다. 시 12:4에 말하기를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와 같은 훼방은 신임될 수 없는 것이다. 바룩은 언제든지 예레미야를 수종드는 자로서, 예레미야의 지도를 따른 자이다. 이 사실은 그가 예레미야의 지시대로 예언들을 기록하여 모든 백성의 귀에 낭독한 사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36:1-10). 그는 이 일 때문에 예레미야와 같이 고난을 당하게까지 되었던 것이다(36:11-19). 바룩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에 예레미야와 함께 하나님의 지도대로 움직였고, 적군의 세력을 이용하는 것 같은 처세를 전혀 하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바룩의 사람이 아닙니다. 게다가 바룩은 예레미야를 수종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권위를 거꾸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소위 성경 비평학자들의 성경해석 방식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이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수종드는 종입니다. 말씀이 이성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비평학자들은 이성을 말씀 위에 둡니다. 그렇게 해 놓고 성경의 저자인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치 바룩이 예레미야를 부추겼다는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이런 죄성은 언제든지 사람 안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바른 순서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이요 그 다음이 그것을 해석하는 책이나 사람입니다. 성경 말씀의 권위를 먼저 믿고 이성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는 것은 본문에 나온 사람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의지함

    4   이에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 지휘관과 모든 백성이 유다 땅에 살라 하시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이들은 "유다 땅에 살라 하시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살 길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살 길은 애굽으로 가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도는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살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복음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살 길이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구하고 찾은 살 길은 살 길이 아니라 필경 죽을 길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44-545쪽). 

    "유다 땅에 살라 하시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그들의 분복(分福)이었다. 그러므로 특수한(사로잡혀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들이 거기서 사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지 900년이나 지난 그때에, 새삼스러이 자진하여 애굽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타락이다. 그들이 옛날에 종살이하던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한 위대한 사건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그들이 거기에 되돌아가는 것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후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타락을 비유한다. 그리스도 신자들이 이 세상을 뜻 붙일 곳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이,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그렇게 생각해야만 되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가서 손해를 보았으며 이삭도 그렇게 되었다. 그 후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애굽의 원조를 바라본 사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죄시(罪視)하셨다(사 31:1-3). 애굽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인간의 정치적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신자들이 이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육체를 위한 비열(卑劣)한 목적으로써 그리한다. 그것은 단순한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밖에 땅에 속한 것을 얻어 보려고 떨어져 내려가는 것에 불과하다. 신자는 마땅히 땅에 속한 것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만 찾아야 되나니, 그것이 단순성 있는 신앙이다.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 남은 백성은 요하난의 그릇된 지도를 받아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것은 유대 땅에 거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큰 죄악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가리켜서 박윤선 목사님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받은 후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타락을 비유한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신자들이 이 세상을 뜻 붙일 곳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는 이 세상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세상"이라는 말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우주를 가리켜서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가리켜서 세상이라고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말씀하는 세상은 두 번째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의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이 애굽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애굽을 잘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애굽은 하나님 없이 자급자족이 가능한 땅입니다. 나일 강이 주기적으로 범람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나안 땅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땅입니다. 비가 내리면 땅이 그 비를 흡수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애굽은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곳이요 가나안은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에서 떠난다는 것은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 의지하기를 그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없이 의로운 것, 하나님 없이 행복한 것, 하나님 없이 즐거운 것, 하나님 없이 기쁜 것이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배제한 채 자기 의를 삼았습니다. 그것도 세상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세상에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신자는 모든 생활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힘 입습니다. 

    거느리고

    5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 지휘관이 유다의 남은 자 곧 쫓겨났던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유다 땅에 살려 하여 돌아온 자
    6   곧 남자와 여자와 유아와 왕의 딸들과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맡겨 둔 모든 사람과 선지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거느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예레미야와 바룩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잡아서 애굽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 선두에는 요하난이 섰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45쪽). 

    이 부분에는 애굽으로 내려간 무리가 어떤 범위의 사람들인지를 보여준다. 6절 끝에 있는 "거느리고(יִּקַּ֞ח)"란 히브리 원어는 잡아감을 의미하는데, 히브리 원문에는 5절 초두에 놓였다. 이것을 보아, 그때 애굽으로 내려 간 사람들은 요하난과 기타 지도자들의 강요에 이끌린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와 바룩은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 죄책(罪責)을 지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귀중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예레미야와 바룩은 비록 몸은 애굽으로 향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보다 우리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상황에도 우리 마음만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못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자유는 성령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보장된 자유입니다. 

    순종하지 아니함이러라

    7   애굽 땅에 들어가 다바네스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함이러라

     

    그들은 곧장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다바네스"는 애굽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있는 곳입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46쪽).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실한지 여부는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과 행동이 모두 일치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사람은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과 행동이 다릅니다. 사람이 진실하지 않아서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볼 때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말이 아니라 행동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말로 "예"하더라도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말로는 "예"라고 했지만 믿지 못한 것입니다. 믿지 못했기 때문에 순종도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 말로 "아니오"하더라도 순종하면 그것은 순종한 것입니다. 말로는 "아니오"라고 했지만 마음에 믿음이 생겨서 그대로 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말로 "예"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즉 믿지 않고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반면 세리들과 창녀들, 즉 죄인들은 말로는 "아니오, 싫습니다"라고 했지만,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즉 믿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마 21:29-32). 

    다바네스에서 임한 여호와의 말씀

    8   다바네스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유다 사람의 눈 앞에서 네 손으로 큰 돌 여러 개를 가져다가 다바네스에 있는 바로의 궁전 대문의 벽돌로 쌓은 축대에 진흙으로 감추라

     

    무리가 다바네스에 도착했을 때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다 볼 때 큰 돌 여러 개를 가져다가 다바네스에 있는 바로의 궁전 대문 축대에 진흙으로 감추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46쪽). 

    유다 남은 백성이 애굽 관문에 들어서자마자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그들이 애굽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 무리의 각성을 촉구하는 기회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애굽에 들어가 살기를 고집한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반드시 임한다는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는 벌써 42:10-18에 일러준 바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백성에게는 경고하실 말씀을 거듭거듭 하시는 것이 상칙(常則)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 백성이 망하는 것을 끝까지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행동 예언을 주신다. 그것은, 그가 예레미야로 하여금 "큰 돌 여러 개를 가져다가 다바네스에 있는 바로의 궁전 대문의 벽돌로 쌓은 축대에" 감추어 두도록 하심이다. 이것은 그 아래 말씀(10절)이 설명한 것과 같이, 바벨론 왕이 애굽을 정복하고 들어와서 바로의 궁전 자리에 자기의 궁전을 세우리라는 예언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언하시는 목적은 그 예언이 성취될 때에 그 사실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행동 예언의 유적을 보고 여호와께서 과연 하나님이신 사실을 믿게 하시려는데 있다. 특별히 애굽에 가서 살던 유다 남은 백성으로 하여금 그때에라도 회개하고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듭 말씀하시는 이유는 죽이고 멸망시키시려 하심이 아니요 살리고 회복시키시기 위함입니다.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사역자를 부지런히 보내셔서 복음의 말씀을 듣게 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리고 구원하시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내 종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10   그리고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종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불러오리니 그가 그의 왕좌를 내가 감추게 한 이 돌들 위에 놓고 또 그 화려한 큰 장막을 그 위에 치리라
    11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
    12   내가 애굽 신들의 신당들을 불지르리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불사르며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요 목자가 그의 몸에 옷을 두름 같이 애굽 땅을 자기 몸에 두르고 평안히 그 곳을 떠날 것이며
    13   그가 또 애굽  벧세메스의 석상들을 깨뜨리고 애굽 신들의 신당들을 불사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내 종"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신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정복자를 종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롬 8:31). 물론 본문은 상반된 내용을 전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장 작은 바이러스도 두렵습니다. 어떤 바이러스가 질병을 일으켜서 나를 죽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길을 가도 두렵습니다. 어디서 무엇이 날아와서 그를 죽일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종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애굽에 와서 애굽을 점령하고 모든 신들의 산당을 불사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애굽을 친 후에 평안히 그곳을 떠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애굽 땅 벧세메스의 석상들을 깨뜨리고 신당들을 불사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시거 신당들을 불사를 것이라는 말씀이 두 번 연거푸 나옵니다. 애굽이 의지하는 신이 헛되다는 것을 알리시겠다는 하나님의 확정된 의지가 그 말씀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46-547쪽). 

    유다 남은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고집스레 애굽으로 가서 거하게 된 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바벨론을 애굽에까지 보내어 그들을 벌하시도록 함이다. 하나님은 강퍅한 자들을 이렇게 따라가셔서 벌하신다. 

    이 예언이 언제 성취되었는가? 히지히(Hitzig)와 그라프(Graf), 덩커(Duncker) 등은, 느부갓네살 왕이 애굽을 정복한 일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요세푸스(Josephus) 사기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지 5년 후(그가 왕이 된 지 23년)에 애굽을 쳤고, 그 왕 호브라(Hophra)를 죽였으며, 애굽에 살던 유대인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갔다고 하였다. 이 역사는 베로수스(Berosus)가 소개한 것이다. 

    오렐리(Orelli)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정복하리라는 예언은 에스겔도 말하였는데, 그것이 성취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성취되었다는 의미의 증거는 요세푸스 사기(史記)에 있다. 그것은 믿기 어려운 증거인 줄 알았으나, 근년에 발굴된 비문(碑文)들이 바벨론 왕의 애굽 정복에 대하여 확언한다. 1) 바로 왕 호브라(Hophra)의 고관(高官)의 비문에 의하면, 수리아 사람들과 북쪽 나라들과 아시아 사람들이 상(上)애굽에 침입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헤로도투스(Herodotus)와 디오도루스(Diodorus)가 바벨론의 애굽 정복에 대하여 침묵한다고 해서 그 사실(바벨론의 애굽 정복)을 부인할 수 없다. 위의 두 역사가는 애굽인들에게서 사료(史料)를 취하였으니만큼, 그 사실에 대하여 말할 재료가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애굽인들은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2) 특별히 느부갓네살 자신의 증거를 주의 깊게 상고할 만하다. 바벨론 비문에 의하면, 느부갓네살 자신이 친히 말한 대로 그가 그의 37년에(주전 568년) 애굽 왕 아마시스(Amasis)를 정복하고 많은 노략물을 가져왔다고 한다.

    "목자가 그의 몸에 옷을 두름 같이 애굽 땅을 자기 몸에 두르고 평안히 그 곳을 떠날 것이며(12절)". 이것은, 느부갓네살이 애굽 땅을 쉽사리 정복하여 자기에게 붙이기를, "목자가 그의 몸에 옷을 두름 같이"할 것을 이름이다. "벳세메스"는 애굽인들이 말하는 대로 "온"이란 땅인데(창 41:45), 나일 강 동편에 있고 멤피스(Memphis)의 북쪽으로 2마일 밖에 있다. 오늘날도 벳세메스에서 높은 주상(柱像)들의 유적이 발견된다고 한다. "주상"은 나무와 쇠로 만든 신상(神像, images)들을 말함이다. 애굽인들의 전설에도 그 나라가 느부갓네살의 정복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 나라 임금이 유대인들을 받아들인 까닭이었다고 한다. 그 나라가 느부갓네살에게 정복된 후 40년 동안 황폐한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무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을 의지하는 것이 곧 애굽의 신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애굽을 치게 하신 이유는 우상을 의지하는 유다의 죄를 끊어버리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이 죄의 뿌리가 뽑힙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사람 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 우상숭배의 죄는 이미 죽은 것이지만 아직 남아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이 우상숭배의 죄는 우리가 죽을 때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의 완성입니다. 죽을 때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고 섬기는 모든 성향이 다 죽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죽음은 곧 우리를 살리는 도구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끝까지 그들을 따라가셔서 그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심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끝내 구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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