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3. 15:27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목차
예레미야 44:1-14
찬송가 395장 자비하신 예수여
애굽의 우상을 멸하시겠다고 하심
요하난은 유다의 남은 자들을 이끌고 예레미야와 바룩을 잡아서 애굽으로 갔습니다. 애굽에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시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43:8-12). 그 경고의 말씀은 애굽의 우상을 다 멸하시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우상숭배의 성향, 즉 죄의 성향을 철저하게 멸하십니다. 우리는 평생 이 죄를 죽이는 싸움을 합니다. 그리고 끝끝내 승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애굽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구체적으로 그들이 범한 우상숭배의 죄를 지적합니다.
예레미야가 애굽으로 간 일
1 애굽 땅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 곧 믹돌과 다바네스와 놉과 바드로스 지방에 사는 자에 대하여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는 요하난에게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애굽에 간 것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경고의 말씀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의지로 애굽으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면 진노하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기에 예레미야는 자기 의지로는 내려올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요하난에 의해서 억지로 끌려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일로 선을 이루십니다. 이 일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애굽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의 악행 중에도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1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49쪽).
"믹돌"이란 곳은 애굽의 동북쪽에 있는 국경 도시인데 지중해에서 멀지 않다. "다바네스"는 애굽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있는 곳이다. "놉"은 멤피스(Memphis)라고 하는 도시인데, 현재는 카이로(Cairo)라고 한다. "바드로스"는 상애굽 지방을 의미한다(나일강 상류, 남쪽-옮긴이 주). 유다 남은 백성이 이 모든 지방에 와서 살았다. 그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을 이때까지 강퍅하게 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신다. 그들의 죄악은, 이 이래 지적되는 바와 같이 우상 숭배 죄였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에 즉시로 내어 버리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며 계속하여 그들을 경고하신다. 그가 이렇게 하시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신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기회를 이용하여 도리어 범죄를 계속한다(롬 2:4-5). 그러나 그는 업신여김을 당하시면서도 끝까지 그들의 회개를 위하여 말씀을 주신다.
업신여김을 당하시는 하나님
박윤선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업신여김을 당하시면서도 계속 말씀하신다고 주석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렇게 업신여김을 당했습니다. 예레미야를 업신여긴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님까지 업신여겼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큰 죄압니다. 이 시대로 하자면 복음을 업신여기는 것이 바로 그런 죄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업신여김을 당하시면서도 그들이 돌아오도록 끝까지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모든 재난을 보았느니라
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예루살렘과 유다 모든 성읍에 내린 나의 모든 재난을 보았느니라 보라 오늘 그것들이 황무지가 되었고 사는 사람이 없나니
3 이는 그들이 자기나 너희나 너희 조상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에게 나아가 분향하여 섬겨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악행으로 말미암음이라
4 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내가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라 하였으나
5 그들이 듣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다른 신들에게 여전히 분향하여 그들의 악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으므로
6 나의 분과 나의 노여움을 쏟아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를 불살랐더니 그것들이 오늘과 같이 폐허와 황무지가 되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있는 하나님 백성들에게 "너희가 ... 모든 재난을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재난이 임했고 그들은 그것을 목도했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2절).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재난을 내리셨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3절). 하나님께서는 바로 재난을 내리지 않으시고 먼저 그들이 돌이키도록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을 끊임없이 보내셨습니다(4절).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계속 우상을 숭배했습니다(5절).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노여움을 쏟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이 폐허와 황무지가 되었습니다(6절). 애굽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다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그토록 강퍅합니다.
이 구절들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50쪽).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거주하는 유다 남은 백성의 우상 섬기는 죄악이 얼마나 강퍅한 것임을 이 부분에서 보여 준다. 그들이 우상 섬긴 죄악으로 인하여 유대 땅이 징벌을 받아 황폐하여진 사실을 보고도(2절) 동일한 죄악을 애굽에서도 범하고 있으니, 그 죄가 더욱 크다.
그들이 유대 땅에 있을 대에 우상을 섬긴 죄악은 이러하였다.
1) 알지 못하는 다른 신에게 분향하였음(3절). 이 점에 있어서 "알지 못하는"이란 말이 중요하다. 곧, "자기(예루살렘과 유다 모든 성읍 사람들)나 너희(애굽에 거하는 유다의 남은 백성)나 너희 조상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긴 것은 큰 죄악이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유다 민족에게 자기를 계시하실 뿐 아니라, 그들과 계약하시고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참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도리어 알지 못하는 신을 섬겼으니, 이는 너무도 사리(事理)에 모순된 행동이다. 어찌하여 아는 것을 버리고, 알지 못하는 것을 택하였을까? 이와 같은 행동은 밝은 것을 어둡다고 하는 강퍅한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말씀하시며 자기를 그 백성에게 알리셨다. 그러나 이방의 우상들은 생명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말을 못하며 사람과 교통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택하여 섬기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단인 것이다. 사람이 다른 일들에 있어서는 깨닫는 것도 있고 진보도 있으나, 종교에 있어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한, 아무리 문명한 사람이라도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무지와 어리석음에 빠진다. 그렇게 되는 원인은, 인류가 범죄한 후에 받은 벌로서 참 하나님을 모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고전 1:21). 그들이 자기들의 죄 값으로 이렇게 되었으니, 이 불행에 대한 죄책을 그들 자신이 져야 한다.
2) 그들이 우상 섬기는 죄악을 범하되,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였다(4-5절). 우리 본문에 "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어"라고 하였다. 여기서 "끊임없이"라는 말은 "일찍이 일어나서"라는 뜻이니, 이 말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간절히 또한 부지런히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신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그들이 끝까지 회개치 않으므로,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 바벨론 군대로 하여금 유다를 정복하게 하신 것이다.
이제 애굽에 와서 거주하는 유다의 남은 백성이, 저희 살던 유대 땅이 황폐함과 적막함을 보고도 애굽 땅에서 또다시 그와 같은 죄를 범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큰 죄악이다. 그들은 아주 멸망당할 위험한 짓을 하고 있다(7절). 그러므로 잠 29:1에 말하기를,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라고 하였다.
우상숭배와 바른 신앙
사람은 언제나 새 것을 좋아합니다. 우상 숭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뭔가 새로운 것이 더 효력을 발휘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신앙은 어떤 효력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나 자신이 목적이고 신은 도구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맞아 떨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든지 자꾸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목적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종이며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존재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목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이 중요합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합니다.
어찌하여
7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어찌하여 큰 악을 행하여 자기 영혼을 해하며 유다 가운데에서 너희의 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젖 먹는 자를 멸절하여 남은 자가 없게 하려느냐
8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손이 만든 것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켜 너희가 가서 머물러 사는 애굽 땅에서 다른 신들에게 분향함으로 끊어 버림을 당하여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저주와 수치거리가 되고자 하느냐
9 너희가 유다 땅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한 너희 조상들의 악행과 유다 왕들의 악행과 왕비들의 악행과 너희의 악행과 너희 아내들의 악행을 잊었느냐
10 그들이 오늘까지 겸손하지 아니하며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 앞에 세운 나의 율법과 나의 법규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7절). 모든 군대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당하는 모든 군사적 승리나 패배는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승리와 패배의 결정적 원인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지 여부입니다.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큰 악을 행하는 것은 자기 영혼을 해하는 것입니다. 불순종은 멸망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스스로를 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라고 두 번 말씀하십니다(7, 8절).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큰 악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 "어찌하여" 그렇게 하느냐라고 하시고(7절), 우상을 만들어 끊어 버림을 당하는 일에 관하여도 "어찌하여" 그렇게 하느냐(8절)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다 땅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한 악행으로 그 땅이 멸망당하는 것을 목도했습니다(9절). 그랬건만 그들은 "오늘까지 겸손하지도 아니하며 두려워하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오늘까지 하나님의 율법과 법규를 지켜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10절). 이에 대하여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51쪽).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애굽에 와서도 우상을 섬기고 있는 일이 얼마나 기막힌 사실임에 대하여 통탄하신다. 이 탄식은 세 가지 질문으로 표현된다(7, 8, 9절). 이 세 가지 질문이 표시하는 뜻은,
1) 그렇게 나아가다가는 아주 다 멸망당하겠으니 기막힌 일이라고 함. 7절에 말하기를, "자기 영혼을 해하며 유다 가운데에서 너희의 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젖 먹는 자를 멸절하여 남은 자가 없게 하려느냐"라고 하였다.
2) 그렇게 나가다가는 하나님 앞에서 "끊어 버림을 당하여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저주와 수치거리"가 된다고 함.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고도 그대로 순종치 않는 자들은, 이방인들 앞에서도 치소거리가 될 만큼 무서운 형벌을 받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라고 하셨다.
3) 그렇게 나아가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와 벌을 받도록(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함으로) 만든 이전 죄악(유다에서 범하던 죄악)을 잊어버린 행동이라고 함.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으랴? 그것은 생각만해도 소름 끼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벌을 받아 애굽에 와서도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겸손할 줄도 모르고, 여전히 같은 죄를 범하며 하나님의 율례를 준행하지 않았다.
전적타락과 전적무능
종교개혁자들은 전적 타락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전적 무능도 가르쳤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 그것이 드러납니다. 만약 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행위를 한다면, 순종의 모범을 보인다면 그것은 그의 능력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언약을 주신 대로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심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하나님의 뜻에 따르거나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멸망을 보고서도 다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오셔서 모든 의를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에게 적용시키셔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했고 영적인 선을 행하기에 전적으로 무능한 것입니다. 이 본문을 도덕적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 백성이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 어떻게 저렇게 깨달음이 없고 배은망덕할 수 있느냐?"라는 시각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은 영적인 소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은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도망치는 자들 외에는
11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여 환난을 내리고 온 유다를 끊어 버릴 것이며
12 내가 또 애굽 땅에 머물러 살기로 고집하고 그리로 들어간 유다의 남은 자들을 처단하리니 그들이 다 멸망하여 애굽 땅에서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이 칼과 기근에 망하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칼과 기근에 죽어서 저주와 놀램과 조롱과 수치의 대상이 되리라
13 내가 예루살렘을 벌한 것 같이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을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벌하리니
14 애굽 땅에 들어가서 거기에 머물러 살려는 유다의 남은 자 중에 피하거나 살아 남아 소원대로 돌아와서 살고자 하여 유다 땅에 돌아올 자가 없을 것이라 도망치는 자들 외에는 돌아올 자가 없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상을 책망하시고 재난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진노의 얼굴로 그들에게 향하셔서 환난을 내리시고 온 유다를 끊어버리실 것이라고 하십니다(11절). 또한 하나님께서 이미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그 말씀을 무시하고 애굽으로 내려간 유다의 남은 자들도 처단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다 멸망 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저주와 놀램과 조롱과 수치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12절). 또한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 사는 자들도 예루살렘을 벌한 것처럼 똑같이 벌하겠다고 하십니다(13절). 유다의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애굽에서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14절). 다만 "도망치는 자들 외에는"이라고 하시면서 이 말씀을 듣고 돌이켜 도망치는 자는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외에는 아무도 돌아올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14절 하).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52쪽).
유대인들이 우상 숭배한 것을 회개하지 않은 죄악으로 인하여 나라는 망하고, 이제 남은 백성으로서 애룹에 와서도 동일한 죄악을 범함에 대하여는, 그들이 아주 멸망하리라는 하나님의 예고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제 이 남은 백성의 멸망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표현된다. 곧, 1) 유다를 끊어 버림(11절). 2) 남은 자들을 처단함(12절 상반). 3) 칼과 기근에 죽어서 저주와 놀램과 조롱과 수치의 대상이 됨(12절 하반).
하나님께서 유다의 남은 백성에 대하여 이렇게 벌하시되 "예루살렘을 벌한 것 같이" 하겠다고 하심은, 그때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또다시 신앙으로 돌아와야 할 것을 깨닫게 함이다. 범죄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도 벌을 받았는데 애굽 땅에서는 벌 받지 않으랴.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한 도성(都城)에도 채찍을 내리셨으니, 이방 땅에서는 더욱 그리하실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과연 이 예언대로 그 후에 바벨론 군대를 애굽으로 보내어 정복하게 하시고, 거기 우거하는 유다의 남은 백성들을 소탕하셨다(참조. 46:12-26).
저주와 놀램과 조롱과 수치의 대상
칼과 기근과 전염병은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백성을 벌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은 사람은 "저주와 놀램과 조롱과 수치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사야 14장에 보면 바벨론 왕이 스올로 가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거기에 보면 스올로 오는 바벨론의 왕을 보면서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사 14:10)"라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저주와 놀램과 조롱과 수치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여 지옥에 들어가서 당하는 형벌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죽어서 끝이라면 저주와 놀램과 조롱과 수치의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죽어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영원히 저주와 놀램과 조롱와 수치의 대상이 됩니다. 이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능히 몸과 영혼을 지옥에 던져 넣으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마 10:28).
도망쳐 나오라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지옥의 고통으로 위협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돌이켜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깨닫고 애굽에서 "도망치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허영시장"이라는 곳이 나옵니다.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순례의 길에 이 시장을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허영시장을 지나가는 크리스천과 믿음은 사람들에게 놀램과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이 시장과 전혀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리스천이 허영시장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우리도 애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얼른 도망쳐 나와야 합니다. 거기에 있다가는 영원히 저주와 놀램과 조롱과 수치의 대상이 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영원히 놀램과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는 방법은 이 땅에서 그것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이 땅에서" 저주와 놀램과 조롱과 수치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허영시장이나 애굽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들과 같은 방식의 삶은 그들처럼 우상을 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상을 버리고 그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 진리를 구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살 길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기억하고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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