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5. 23:19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목차
예레미야 45:1-46:12
찬송가 322장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여호야김 넷째 해
41장부터 44장까지는 유다에 남은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예언대로(24장) 어떻게 썩은 무화과가 되는지에 대해서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들 무리의 지도자였던 요하난은 예레미야와 바룩을 잡아서 애굽에 데리고 갔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의지로 애굽에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애굽에 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애굽에 간 것과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애굽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보내시려고 예레미야를 잡혀가게 하신 것입니다. 애굽에 있는 유다 사람들은 그들이 망한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우상 숭배의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 우상숭배를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시면서 누구의 말이 맞는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45장은 여호야김 넷째 해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룩아
1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 그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2 바룩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3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여호야김 넷째 해는 바룩이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적어서 성전에서 낭독하라는 명령을 받은 때입니다(36:1-6). 바룩은 그 명령을 여호야김 제오 년 구월에 실행합니다(36:9). 그 때 예레미야가 바룩에게 한 말씀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39장) 유다 땅에 남은 백성들은 썩은 무화과처럼 되었습니다(41-44장). 그러므로 이 예언의 말씀은 실현된 역사를 앞 뒤로 감싸고 있습니다. 바룩이 기록한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렇게 예레미야의 모든 예언을 기록한 바룩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위로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룩을 위로하시는 이유는 바룩이 3절과 같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룩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예레미야의 모든 예언의 말씀에 심히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59쪽).
이 구절들을 보아서, 우리는 예레미야서가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불러 준 대로 "바룩"이 기록한 것이다. 바룩은 예레미야의 모든 예언을 기록하는 중에 많이 상심하였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의 모든 예언 내용은 유다 민족에게 재앙이 임할 것을 거듭거듭 말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위의 40:7-44:30까지에 기록된 대로 특별히 유대인들이 거듭거듭 재앙을 받은 것과, 또한 앞으로도 받도록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뒤이어 본장의 이 말씀이 나온 듯도 하다. 바룩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록하면서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물론 그가 동족이 당하는 비극 때문에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못한 사실을 탄식하는 것뿐이다. 바룩이 이와 같은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위로하신다.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4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5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바룩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이라고 말씀하십니다(4절). 네가 슬퍼하는 일이 내가 행한 일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백성만 당하는 재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룩에게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라고 물으시면서 "그것을 찾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면 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룩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노략물은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을 노략물을 얻듯이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시고 우리에게 우리 생명을 노략물 얻듯이 주신 것입니다(참조. 시 68:18; 엡 4:8). 모든 육체가 재난을 당하는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보전됩니다. 바룩에게 하신 말씀은 곧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60-561쪽).
1.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라를 세우기도 하시고 패망케도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는 남이 세운 것을 허시는 것도 아니고, 남이 심은 것을 뽑으시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기에게 속한 것을 기쁘신 뜻대로(거리낌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 아니하고 그의 오묘하신 지혜와 거룩하신 소원대로) 처리하시는 것뿐이다. 신자들도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하지 않고 모든 것을 생각할 때에 마음에 불안을 품게 되는 일이 많다. 욥은 그 무서운 환난을 당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하는 믿음으로써 그 난관을 돌파하였다. 그는 자기의 자녀들과 재산이 환난 가운데서 모두 다 없어진 것을 알게 될 때에 말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하였다.
히브리 원문에는 "나는(אֲנַי)"이란 말이 상반절에만 아니라 하반절에도 있어서 두 번씩이나 "나는"이란 말이 강조된다(히브리어에서는 동사에 주어가 포함된다. 그러므로 주어를 쓴 것 자체가 강조다. 그런데 그런 강조가 두 번씩이나 이루어지고 있다-옮긴이 주). 이것은 하나님 주권을 역설(力說)한 것이다.
2. 온 세상이 죄로 인하여 환난을 당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함. 우리 본문에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4절 끝)이란 말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5절)란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악 때문에 온 세상에 재앙을 내리며 또 심판하실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는 행복을 구할 처지가 못 된다. 이 세상은 죄악으로 인하여 깨어졌고 심판을 받을 것밖에 없으니, 그야말로 장망성(將亡城)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실 때에, 고난은 온 세상에 있는 형제들이 다같이 받는 것인만큼, 잘 참으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벧전 5:29에도 있다. 거기 말하기를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마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라고 하였다. 온 세상이 다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데, 나 개인만은 거기에 참예하지 않겠다고 할 수 없다.
3. 큰 일을 찾지 말라고 함.
여기 "큰 일"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게돌로트(גְדֹל֖וֹת)인데, 큰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의 분수에 지나치는 육체적 평안이나, 행복이나, 영광이나, 권세나, 권능이나, 발전 같은 것을 가리킨다. 인간의 처지에서는 그런 것을 구할 바가 아니다. 그는 도리어 환난 세상에 처하여 믿음으로는 고난을 달게 받으면 족한 줄로 알아야 된다. 그것이 그의 분정(分定)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131:1-3)"라고 하였다.
4. 바룩의 생명 구원을 약속하심
5절에 말하기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하였다. 여기 이른바 "노략물 주듯 하리라"라고 함은, 전쟁시에 위태한 가운데서라도 생명 재산을 빼앗기지 않게 된 것처럼, 아주 위태하여 아슬아슬한 가운데서라도 신자의 영혼의 생명을 구원하여 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 말씀은, 바룩으로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 영혼의 생명이 구원받는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보내시어 구원 운동을 하심에 있어서 전체주의(全體主義)를 원리로 하시지 않는다. 그는 사회를 위주하고 개인을 등한히 하는 식으로 구원 운동을 하시지 않는다. 그는 망한 세상 또는 망할 세상에서 개인의 영혼을 하나씩 하나씩 구출하여 하나님 백성의 단체를 성립시켜 가신다. 그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며 찾으신다. 주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하여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가시는 목자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위하여 죽으시기도 하셨지만, 그 백성 하나하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고전 8:11에는 신자 한 사람을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개인주의로 사는 것이 합당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개인의 영혼 구원으로도 만족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개인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합당하게 힘쓰면 다른 사람들의 영혼 구원에도 유익하게 되는 법이다. 사람이 자기 영혼이 어떻게 된 것도 알지 못하고 남의 일을 걱정할 때에는, 자기 영혼도 구원받지 못하고 남들도 구원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역자들은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도 실상 자기 영혼의 구원의 부요(富饒)를 위하여 한다. 히 13:17에 말하기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바울도 복음을 전하는 동기가 자기 자신이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하였다. 고전 9:23-27에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하였다.
박윤선 목사님의 말씀은 참 은혜롭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대로 첫째,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둘째, 온 세상이 죄로 인해서 환난을 당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만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사람의 분수에 지나치는 육체적 평안이나 행복이나 영광이나 권세나 권능이나 발전 같은 것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분수에 맞게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넷째, 우리 생명이 노략물을 얻듯이 구원 받았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바벨론의 침략에도 바룩의 생명이 구원 받은 것처럼 죽음이 우리를 쏠 때에 우리 생명이 보전된다는 것에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온 땅에, 모든 육체에
바룩에게 말씀하시기를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내용이 나옵니다. 처음 나오는 나라는 애굽입니다.
이방 나라들에 대하여
1 이방 나라들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46장에는 이방 나라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65쪽).
"이방나라들에 대하여(עַל־הַגּוֹיִֽם)"란 문구가 있어서, 여기서부터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 유다 민족과는 관계가 없는 말씀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예언들의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성경 말씀은 그 어떤 부분이든지 모두 다 계시사적(啓示史的)이고 구원사적(救援史的)이다. 열국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들도 실제에 있어서 그때의 유다 민족과 관계되어 있다. 문맥상으로 보아도 윗장(44장)에, 유다의 남은 백성이 하나님보다도 애굽을 좋게 여겨, 가나안 당에 머물라는 하나님의 권면을 배척하고 애굽에 내려가 살면서 범죄하였다. 이제 거기에 있어서 본장(46장)에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저렇게 의지하던 애굽이 역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로 말미암아 패배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세계 열방에 관계된 사건들도 교회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벨드캄프(Veldkamp)는 말하기를, "예루살렘(교회)은 하나님의 모든 생각에 있어서 중심이 되어 있다. 그것을 둘러싸고 그의 생각이 움직이신다. 세계 역사는 구원 역사에 수종들고 있다. 우리는 선지서를 읽음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모스크바나 베를린이나 파리나 워싱턴이나 제네바가 중심이란 사싱을 버려야 한다. 정치나 핵무기 회담등이 이런 곳에서 좌우되는 듯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세계 중심지도 언제든지 예루살렘이다"라고 하였다. 벨드캄프의 이 말은, 오늘날 세계 모든 움직임이 하나님의 교회(예루살렘으로 상징된)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지향하고 그것들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초대 역사를 생각해 볼 때 역시 이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간 사건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브라함 자손이 애굽에 가서 종살이 하기 위한 순서를 밟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창 15장). 이렇게 택한 백성의 역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요셉이 먼저 애굽으로 갔고, 그 뒤에 그때의 세계에 풍년과 흉년이 교대하여 들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애굽에는 양식이 있게 되었고, 가나안 땅에는 양식이 핍절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야곱의 자손들)들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우리가 이 역사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 자손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때에 택함을 받지 못한 가나안의 일곱 민족은 무슨 영문인지 알지도 못하고 흉년을 겪었다. 요컨대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사의 성취를 위한 사건에 종속되는 모든 일을 겪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할 수 있다. 곧, 불신 세계의 모든 사건들도 결국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구원 운동에 종속되어 움직인다는 것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스스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중심으로 역사를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역사의 주인공들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깨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행하시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지난 시점에서는 반드시 그 사건의 의미가 밝히 드러납니다. 믿는 자는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사람은 그래야 합니다.
애굽에 관한 것이라
2 애굽에 관한 것이라 곧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유브라데 강 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한 애굽의 왕 바로느고의 군대에 대한 말씀이라
먼저 애굽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애굽 왕 바로느고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한 것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66-567쪽).
애굽 왕 바로느고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패할 일을 예레미야가 미리 내다보고 이 아래 예언한다. "느고(נְכֹה)"는, 역사가 마네토(Maneto)에 의하면, 애굽 제26조(朝)의 여섯째 임금이었는데 프삼메티쿠스 1세(Psammetichus 1)의 아들로서 주전 611-595년까지 왕위에 있었다고 한다. 느고가 요시야 왕 말년에 유브라데까지 정복하기 위하여 진군하는 중 팔레스타인에 이르매, 요시야 왕은 그로 더불어 항전하다가 죽임이 되었다(왕하 23:29). 그는 여호아하스라는 유다 왕을 폐하고 엘리야김을 세워 유다를 자기 속국으로 만들었다. 그 뒤에 그는 다시 군대를 거느리고 유브라데를 향하여 수리아로 진군하였고, 필경 유브라데 강가에 있는 갈그미스에 이르렀다. 이때에 느부갓네살의 항전으로 인하여 그(느고)의 군대는 패배를 당했다(주전 606년)(참조. 왕하 23:29 이하).
"갈그미스"는 그발 하수(河水)와 유브라데 강과의 교차점에 있는 도시로서 그때의 요새지였다. 지금은 그 도시가 폐허로만 남아 있는데, 현대의 아라비아 사람들은 아부 프세아라(Abu Pseara)라고 부른다.
예레미야가 바로느고의 갈그미스 패전에 대하여 예언한 때로 말하면 애굽이 극도로 강하던 시대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애굽이 멀지 않아서 패전하게 될 것을 내어다 본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성경 말씀은 이렇게 초인간적인 밝음으로써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벨드캄프(Veldkamp)는 말하기를, 예레미야의 이와 같은 예언들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한 말씀만 아니라 세계를 위한 말씀을 가지고 계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세계 모든 역사를 결정한다. 세계 민족들의 장래는 정치가들의 회의에나, 군대의 강력이나, 과학이나, 공업의 발달에 매인 것이 아니다. 다만 주님의 말씀이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 그리스도께서 천지의 권세를 받으셨다.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예언했고, 사도들은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救贖)을 받은 교회는 이 세계에 대하여 구경꾼이 아니다. 교회는 기도와 복음 증거로 이 세계의 지도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 교회는 세계의 심판을 예언하는 기상조(氣象鳥)와 같다. 교회는 새로운 세계(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광의 세계)를 지향한 선구자들이다"라고 한다.
70인 역은 46-51장을 25장 13절 뒤에 놓습니다. 그리고 25장 1절을 보면 "여호야김 넷째 해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라고 합니다. 즉, 그 말씀이 여호야김 넷째 해에 임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예언의 말씀은 여호야김 넷째 해에 아직 바로느고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하기 전에 임한 것입니다. 그 때는 애굽이 굉장히 강한 때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야김은 바로느고에 의해서 세워진 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친 애굽 정책을 폈습니다. 나중에 느부갓네살 왕이 다시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쌀 때까지 애굽을 의지한 것입니다.
강력한 무기도 강한 용사도
3 너희는 작은 방패와 큰 방패를 예비하고 나가서 싸우라
4 너희 기병이여 말에 안장을 지워 타며 투구를 쓰고 나서며 창을 갈며 갑옷을 입으라
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본즉 그들이 놀라 물러가며 그들의 용사는 패하여 황급히 도망하며 뒤를 돌아보지 아니함은 어찜이냐 두려움이 그들의 사방에 있음이로다
6 발이 빠른 자도 도망하지 못하며 용사도 피하지 못하고 그들이 다 북쪽에서 유브라데 강 가에 넘어지며 엎드러지는도다
애굽 군대는 당시 세계 최강이었습니다. 그들은 최첨단 무기로 무장했습니다. 작은 방패, 큰 방패, 기병, 투구, 창, 갑옷 같은 무기로 전쟁에서 패하는 법이 없었습니다(3-4절).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패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두려움이 그들의 사방에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5절). 두려워서 도망치는데 도망치지 못하고 다 엎드러질 것이라고 하십니다(6절). 이 구절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68-569쪽).
여기 기록된 모든 무기들은 그 시대에 가장 유력하게 사용되던 것들이다. 애굽은 군비(軍備)에 있어서 그 시대에 첨단(尖端)을 걸으면서 교만하였다. 특별히 바로느고는 요시야 왕을 죽이고 유다를 속국으로 만든 뒤에 자기 나라를 대적할 자가 없는 듯이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 도전적으로 말씀하신다. 곧, 교만하게 군사 동원을 하려면 해 보라고 하신다. 그러나 이 말씀 가운데는, 아무리 그래 보아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약 4:6, 참고 잠 16:18).
애굽이 아무리 그 많은 무기와 군사를 동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벌써 그 나라가 패할 것을 내다보신다(5절 초두). 1) 그 나라의 "용사"들이 "두려워"하여 패전함(5절). 용사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보통으로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간섭의 결과인 것이다. 기드온의 적은 군대 300명 때문에 미디안의 무수한 군인들이 도망한 것은 하나님의 간섭으로 된 것이었다(삿 7:2-23). 2) "발이 빠른 자도 도망하지 못하며 용사도 피하지 못하고(6절)" 이것도 역시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다는 말 없는 설명을 가지고 있다. 이 예언과 같이 애굽은 과연 갈그미스에서 주전 605년에 패전을 당하였다.
애굽은 나일 강이 불어남 같고
7 강의 물이 출렁임 같고 나일 강이 불어남 같은 자가 누구냐
8 애굽은 나일 강이 불어남 같고 강물이 출렁임 같도다 그가 이르되 내가 일어나 땅을 덮어 성읍들과 그 주민을 멸할 것이라
9 말들아 달려라 병거들아 정신 없이 달려라 용사여 나오라 방패 잡은 구스 사람과 붓 사람과 활을 당기는 루딤 사람이여 나올지니라 하거니와
애굽 군대는 무서운 군대입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마치 강의 물이 출렁임 같습니다. 나일 강이 불어남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땅이든 점령하려고만 한다면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7-8절). 말들과 병거들과 구스 사람과 붓 사람과 루딤 사람을 동원해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9절). 그러나 그것은 애굽의 교만이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69쪽).
여기서도 3, 4절에서처럼 애굽이 그 강한 군대를 가지고 교만해진 기세를 진술한다. "나일 강이 불어남". 나일 강은 해마다 넘쳐서 모든 평원을 적시므로 농사를 가능하게 만든다. 이렇게 강이 넘치는 것처럼 애굽은 유브라데 강까지 군대를 동원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게 그 나라의 교만이 지적된다. "강의 물이 출렁임 같고 ... 자가". 이 문구를 개역하면 "물이 강들처럼 동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Calvin). 이것은 물이 빨리 흐름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비유이다. 나일 강은 하루에 이르러 물결이 매우 거칠고 빠르다. 이것은 애굽 군대의 위력을 비유함이다. "구스 사람", "붓 사람", "루딤 사람". 이들은 이민족들이다. 애굽에서 외국인들을 고용병(雇傭兵)으로 사용한 일이 있다. 그리고 "루딤"은 아프리카 족속인데(창 10:13), 같은 이름을 가진 아시아 족이 아니다. 위의 말씀은, 그때에 침략국 애굽이 군국주의(軍國主義)를 가지고 열국 앞에서 위세를 떨친 광경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하면, 그때에 애굽이 얼마나 군비의 세력을 믿고 무엇이나 다 할듯이 교만하게 덤빈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이와 같은 위세를 여기 진술하실 때에, 애굽이 제아무리 군사의 강력을 믿고 덤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신다. 시 20:7-8에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라고 하였다.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
10 그 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 칼이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를 넘치도록 마시리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북쪽 유브라데 강 가에서 희생제물을 받으실 것임이로다
애굽 군대는 자기들의 승리를 믿고 싸움터로 기세 좋게 달려갈 것이지만 그 날은 그들이 패하는 날입니다. "그 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에게 원수 같는 보복일"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느고가 유다의 임금 요시야를 죽인 일에 대한 보복일이라는 뜻입니다. 요시야는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유다 민족을 옳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많은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개혁은 바로느고에 의해서 중단되었습니다. 그 결과 유다는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복하신다는 뜻입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70쪽).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북쪽 유브라데 강 가에서 희생제물을 받으실 것임이로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희생제물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희생입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70쪽). 이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는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보복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이방 나라들이 아무리 세력을 얻어 교회를 핍박한다 할지라도, 택한 백성은 그것을 두려워할 것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필경 그 백성을 신원하여 주시기 때문이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70쪽).
처녀 딸 애굽이여
11 처녀 딸 애굽이여 길르앗으로 올라가서 유향을 취하라 네가 치료를 많이 받아도 효력이 없어 낫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처녀 딸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애굽이 평안한 가운데 곱게 자란 딸과 같기 때문입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 지방인데 유향이 많이 나는 곳입니다. 유향은 약으로 쓰입니다. 이것은 시적인 표현으로 유향으로 치료를 해도 낫지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71쪽).
12 네 수치가 나라들에 들렸고 네 부르짖음은 땅에 가득하였나니 용사가 용사에게 걸려 넘어져 둘이 함께 엎드러졌음이라
애굽의 수치가 나라들에 들렸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애굽이 전쟁에서 패한 것이 굉장히 치명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모든 나라에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애굽은 이 전투 이후로 쇠망의 길로 접어 들었습니다. "네 부르짖음은 땅에 가득하였다니"는 전쟁으로 인한 그 나라의 고통이 너무 클 것이라는 뜻입니다. "용사가 용사에게 걸려 넘어져 둘이 함께 엎드러졌음이라"는 말씀은 애굽 군대가 바벨론 군대에게 쫓겨 허둥지둥 도망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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