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30. 14:59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목차
예레미야 41:1-18
찬송가 515장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썩은 무화과 예언
40장부터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것을 본 바벨론 군대의 사령관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그것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40:3).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 밝히 보고 깨닫는 눈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유대인들은 복음을 배척하고 이방인은 받아들이는 것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 땅은 그다랴에게 맡겨졌습니다. 그에게 다른 나라에 흩어져 있었던 유다 사람들이 모였습니다(40:11-12). 그러니 그들은 썩은 무화과들이었습니다(24장 참조). 41장은 그 이후의 일을 다룹니다.
함께 떡을 먹다가
1 일곱째 달에 왕의 종친 엘리사마의 손자요 느다냐의 아들로서 왕의 장관인 이스마엘이 열 사람과 함께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이르러 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41장은 일곱째 달에 일어난 일을 다룹니다. 느부갓네살을 연원으로한 기록에서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었습니다(왕하 25:8). 그 후 두 달 지난 일곱째 달이 바로 1절의 일곱째 달입니다(왕하 25:25; 1절). 그러니까 이 일은 그다랴가 총독이 되어 다스린지 두 달 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다랴를 죽인 이스마엘은 왕의 종친 엘리사마의 손자요 느다냐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장관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열 사람이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인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왕의 종친, 즉 왕손이었기 때문에 그다랴와 함께 식사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27쪽).
여기 "왕의 종친(זֶּ֣רַע הַ֠מְּלוּכָה)"이란 히브리어 원어는 실상 왕손이라는 뜻이다. 이스마엘이 유다의 왕손이었으니만큼 그때의 집권자였던 그다랴를 없애버리려고 한 것이다. 그릇된 세습주의자(世襲主義者)들의 사고방식에는, 왕위(王位)는 언제나 왕손이 물려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떡을 먹다가". 이것은, 그들이 총독 그다랴의 대접으로 음식을 먹던 중에 있었다는 말이다. 음식 대접을 받던 중에 그 대접하는 주인공을 살해하는 것은 살인 중에도 가장 악한 방법이다(요 13:18). 유다 민족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고, 그 남은 자들 중에서 이런 악한 일이 또 연출되는 것은, 그야말로 예레미야의 예언 중에 "나쁜 무화과" 예언의 성취를 말하는 역사적 사건이다(24장). 예레미야는 39-41장까지, 특별히 그 예언 성취를 보여 주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하여 말한다. 특히 40:7-41:18은 그 남은 백성이 심히 불행 가운데 빠질 사실을 보여 준다.
그다랴를 칼로 쳐죽였고
2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와 함께 있던 열 사람이 일어나서 바벨론의 왕의 그 땅을 위임했던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칼로 쳐죽였고
3 이스마엘이 또 미스바에서 그다랴와 함께 있던 모든 유다 사람과 거기에 있는 갈대아 군사를 죽였더라
이스마엘과 함께 있었던 열 사람이 그다랴를 칼로 죽였습니다(2절).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대로 그들은 식사를 대접 받는 자리에서 호의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이스마엘은 그다랴와 함께 있던 모든 유다 사람과 거기에 있는 갈대아 군사도 죽였습니다(3절). 살육을 벌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28쪽).
이스마엘 일당이 그다랴와 그의 지지자들과 갈대아 군사들을 일시에 죽인 사실은, 그때의 정부를 전복시킨 내란 죄악인 동시에 바벨론을 대적하는 행동이다. 그것은 결국, 그때의 유다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에 대하여 반역한 큰 죄악이다. 이스마엘이 이런 행동을 취한 것은, 유다 민족의 평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정권욕으로 감행한 것이다. 우리가 이 부분 기록을 보고 알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민중의 평안을 목적하지 않으면서 개인의 사욕을 위하여 정권을 장악하려고 활동하는 자들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 말씀은 특별히 정치가들이 전감(前鑑, 앞 전, 거울 감-옮긴이 주)으로 기억해야 할 금과옥조(金科玉條)이다.
박윤선 목사님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르는 자와 자기 사욕으로 정권을 장악하려고 하는 자를 구분합니다. 그런데 지도자를 뽑는 입장에서는 이 둘을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욕으로 정권을 장악하려는 자도 겉으로 보기에는 백성들의 평안을 위하는 자처럼 비치기 때문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정치에 이것을 적용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교회정치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런 구분은 교회에서 지도자들 세울 때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더라
4 그가 그다랴를 죽인 지 이틀이 되었어도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더라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죽인 사건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미스바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28쪽).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죽인 지 "이틀이 되었어도" 그 정보가 나가지 못하도록 된 것을 보니, 그가 사람을 무척 많이 죽인 사실이 드러난다. 이것이야말로 유다 땅에 남은 백성의 멸절을 의미할 정도의 큰 살육이 아니었는가고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레미야는, 유다 땅에 남아 있는 백성을 "나쁜 무화과"에 비유하여 예언하였다(24장).
미스바에 정말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그다랴가 세워진 것을 보고 평안을 바라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피난민들입니다. 이스마엘은 그 모든 사람을 다 죽인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아무 의심없이 그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생활하는 중에 영문도 모른채 칼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참한 살육이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한 대로 된 일이었습니다(24장).
이런 비참한 일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이 이렇게 되도록 하신 것일까요? 이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답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생뿐만 아니라 영원을 주관하신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다랴와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 그들 개인들에게 비참한 일이었는가 하면 그것은 모르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죽음 이후를 어떻게 처분하실는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후 일어나는 비참한 일들을 보지 않고 먼저 이 세상을 뜬 것은 그들에게 유익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이 일을 계획하셨다고 하더라도 이 일은 이스마엘이 저지른 악행입니다. 그다랴가 제대로 방비하지 못한 결과로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좋은 무화과과 나쁜 무화과 비유를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으로 잡혀간 자들을 좋은 무화과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24:5-7). 그들은 하나님의 땅에서 쫓겨난 자들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볼 때 그들은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지 않고 죽음을 통과하게 됩니다. 죽음을 통과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십니다(24:6).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아오게 하십니다(24:7).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거듭남이라고도 하고 부활이라고도 합니다. 새 생명을 얻은 자만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즉 죽음을 통과한 사람만이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새 생명을 누가 받았느냐, 이방인들이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떨어져 있었던 자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들이 중생의 은혜를 힘입어 새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반면에 바벨론을 피한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죽음을 면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았으므로 새 생명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스스로 떠나서 애굽을 의지한 사람들입니다(24:8).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구원을 바란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24:9-10). 이렇게 보면 당시 유대인들이 당한 무참한 일은 지금도 역사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포함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습니다(롬 11:25-26).
수많은 사람을 죽임
5 그 때에 사람 팔십 명이 자기들의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에 상처를 내고 손에 소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로부터 와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나아가려 한지라
6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들을 영접하러 미스바에서 나와 울면서 가다가 그들을 만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가자 하더라
7 그들이 성읍 중앙에 이를 때에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기와 함께 있던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을 죽여 구덩이 가운데에 던지니라
그 때에 80명의 사람들이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로부터 여호와의 성전으로 나아가려고 했습니다(5절). 이스마엘은 그들도 죽이려고 계략을 꾸몄습니다. 즉 그들을 울면서 영접한 것입니다(6절). 그는 그다랴에게 가자고 하고서는 성읍 중앙에 이르렀을 때에 그들을 죽여서 구덩이 가운데에 던졌습니다(6절 하-7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29쪽).
이 말씀을 보면, 이 "팔십 명"은 유다의 멸망을 슬퍼하는 표시를 가지고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성전으로 나아오는 도중이었다. "몸에 상처를 내"는 것 같은 일은 하나님의 율법에 금지되어 있다(레 19:28; 신 14:1).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이 그렇게 한 것은, 그때 유다 사회가 벌써부터 지도자들의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무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하등의 정치적인 색채를 가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마엘이 이들을 죽이려고 착수했으니, 그의 계획은 그 땅의 사람을 모조리 죽이려는데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니만큼 그 땅의 사람들은 벌써 많이 죽임을 당했을 것이 추측된다.
이스마엘 일당은 이들을 죽이려는 계획으로, 그들의 동지라는 의미에서 그들과 같이 슬퍼하며 우는 체 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을 꾀어 결국 살해했으니, 그들이야말로 간교한 살인마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악한 무리가 그 땅의 남은 백성을 휩쓸었으니, 예레미야의 "나쁜 무화과" 예언(24장)이 그대로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암몬 족속과 이스마엘
예레미야는 이스마엘 일당이 왜 그 땅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명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추측할 따름입니다. 40장 14절에 보면 요하난이 이런 말을 합니다. "암몬 자손의 왕 바알리스가 네 생명을 빼앗으려 하여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보낸 줄 네가 아느냐" 또한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이스마엘은 모든 백성을 사로잡아서 암몬 자손에게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렇게 행동한 것은 암몬 자손의 왕 바알리스가 사주한 것일 수 있습니다. 바알리스는 그를 시켜서 그 땅을 어지럽게 하고 거기 백성들을 잡아오라고 한 것입니다. 암몬과 모압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울 때 그들을 해하려고 한 전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 때에 그들을 길에서 영접하지 않았고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서 그들을 저주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네 평생에 그들의 평안함과 형통함을 영원히 구하지 말지니라"라고 명령했습니다(신 23:4-6). 이처럼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이었습니다. 또한 에스겔 25장 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는 암몬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 성소가 더럽힘을 받을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이스라엘 땅이 황폐할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유다 족속이 사로잡힐 때에 네가 그들에 대하여 이르기를 아하 좋다 하였도다(겔 25:3)
암몬 자손은 이렇게 이스라엘이 가장 어려울 때를 틈타서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암몬은 하나님 나라의 대적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49:1-2; 겔 21:28; 25:3, 5; 암 1:13; 습 2:9). 하나님의 백성이 징계를 당할 때 그들이 고통 당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거나 그들을 더 고통스럽게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대로 갚아주십니다.
역적이면서 도적이었음
8 그 중의 열 사람은 이스마엘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밭에 감추었으니 우리를 죽이지 말라 하니 그가 그치고 그들을 그의 형제와 마찬가지로 죽이지 아니하였더라
80명 중에 열 사람은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마엘에게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주겠다고 하고 죽임당함을 면했습니다. 이스마엘 일당은 살인자인 동시에 도적이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29쪽).
이것을 보면, 이스마엘 일당은 옳은 정치에 대한 역적들일 뿐만 아니라 겸하여 물질을 탐하는 도적들이다. "우리가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밭에 감추었으니". 곧, 그들이 여기 명세(明細, 밝을 명, 가늘 세, 분명(分明)하고 자세(仔細)한 내용(內容)- 옮긴이 주)된 식료품들을 밭 가운데 있는 어떤 웅덩이 속에 감추어 두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 식료품을 이스마엘에게 뇌물로 제공하고 죽임을 당하는 데 이르지 않았다. 이 기사(記事)도 그때가 무법천지(無法天地)였음을 보여준다.
박윤선 목사님은 그 때가 무법천지였다고 잘 주석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정부가 있고 행정이 이루어지고 사법체계가 돌아가는 사회에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 덕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땅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거두어졌습니다. 철저한 심판이 행해진 것입니다. 심판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동안 받았던 은총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나라와 법체계와 질서가 하나님의 은혜였음이 이스마엘의 악행으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은혜에 감사하며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의 최후
9 이스마엘이 그다랴에게 속한 사람들을 죽이고 그 시체를 던진 구덩이는 아사 왕이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을 두려워하여 팠던 것이라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가 쳐죽인 사람들의 시체를 거기에 채우고
10 미스바에 남아 있는 왕의 딸들과 모든 백성 곧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위임하였던 바 미스바에 남아 있는 모든 백성을 이스마엘이 사로잡되 곧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들을 사로잡고 암몬 자손에게로 가려고 떠나니라
9절에서는 이스마엘이 사람들을 던진 구덩이가 남유다의 아사 왕이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을 두려워하여 팠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이스마엘은 남은 모든 백성을 사로잡아서 암몬 자손에게로 가려고 했습니다(10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30쪽).
여기서는 1) 그때에 이스마엘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보여 줌(9절). 그가 죽인 시체들을 모두 다 "구덩이"에 던졌다는 것이 이 뜻이다. 이 구덩이는 유다 아사 왕이 이스라엘 왕 바아사를 두려워하여 팠던 것이다(왕상 15:22; 대하 16:6). 그러니만큼 그것은 상당히 큰 것이었음을 추측케 한다. 2) 많은 사람을 사로잡아 감(10절). 그것은 우리 본문에, "느부사라단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위임하였던 바 미스바에 남아 있는 모든 백성을 이스마엘이 사로잡되"라는 말이 알려 준다.
아사의 행적은 열왕기상 15장과 역대하 16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왕 바아사가 사람들이 자기에게 왕래하지 못하도록 라마를 건축할 때 아람 군대에게 돈을 주어 북이스라엘을 치게 했습니다. 바아사는 그것을 막기 위해서 공사를 중단했고 아사는 라마에서 바아사가 건축하려고 했던 모든 건축 자재들을 가져가다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했습니다. 그 때 아사는 그곳을 요새화 하기 위해서 구덩이를 팠던 것입니다. 이 일은 300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아사가 잘못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아사를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그 땅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대하 16:7-9). 이것은 시드기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그의 아들들이 그의 눈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의 눈은 뽑히는 비참한 일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이처럼 비참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적을 방비하기 위해서 만든 구덩이가 시체 구덩이가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으십니다(눅 18:27).
기브온 큰 물 가에서
11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군 지휘관이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행한 모든 악을 듣고
12 모든 사람을 데리고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싸우러 가다가 기브온 큰 물 가에서 그를 만나매
13 이스마엘과 함께 있던 모든 백성이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던 모든 군 지휘관을 보고 기뻐한지라
14 이에 미스바에서 이스마엘이 사로잡은 그 모든 백성이 돌이켜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로 돌아가니
15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여덟 사람과 함께 요하난을 피하여 암몬 자손에게로 가니라
열 사람이 살아서 이 일을 전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스라엘이 한 악행을 요하난이 들었습니다(11절). 요하난은 모든 군대를 대동해서 이스마엘과 싸우려고 나아가서 큰 물 가에서 그를 만났습니다(12절). 그 때 이스마엘과 함께 있던 모든 백성은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는 군 지휘관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암몬으로 끌려가서 노예로 처참한 꼴을 당할 뻔 했는데 구원을 받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요하난에게로 돌아갔고(14절) 이스마엘과 여덟 사람은 암몬 자손에게로 피했습니다(15절). 이스마엘과 함께 있던 열 사람 중 두 사람은 전쟁에서 전사했거나 백성들에게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브온 큰 물가는 예루살렘에서 9.6km 북쪽에 있는 저수지입니다.
애굽으로 가려고
16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던 모든 군 지휘관이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죽이고 미스바에서 잡아간 모든 남은 백성 곧 군사와 여자와 유아와 내시를 기브온에서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서
17 애굽으로 가려고 떠나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김함에 머물렀으니
18 이는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바벨론의 왕이 그 땅을 위임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죽였으므로 그들이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더라
요하난과 그의 군대는 자기들에게 온 모든 백성과 감께 애굽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기브온에서 남쪽으로 9.6km 가면 예루살렘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다시 남쪽으로 9km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기브온에서 남쪽으로 18km정도 내려간 것입니다. 남쪽으로 간 이유는 남쪽에 있는 애굽으로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갈대아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피신하려고 했습니다(18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31쪽).
"요하난"은 정의감이 강한(13-15절) 용사요, 또한 애국심이 열렬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 이 부분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하여 예언하신 대로 바벨론에게 항복할 생각은 그에게 없었으며, 애굽으로 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는 인도주의적인 애국자는 진정한 애국자가 아니니, 결국 그도 실패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이스마엘만 합당치 않은 자가 아니라, 요하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유다 민족의 말로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24장) 그 남은 백성까지 더욱 불행하여지는 장면에 떨어진다. 선한 지도자 그다랴는 암살을 당하고, 이스마엘은 남은 백성을 모조리 살해하는 악행을 하였고, 요하난도 결국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았다. 요컨대 본장의 역사적 사실은 24장의 예언 성취라고 할 수 있다.
...
정의감이 강하고 용감한 지도자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민중을 지도하지 않는 자라면, 그도 악인들과 마찬가지로 민중을 불행하게 만든다(11-18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지도자는 때때로 반역자라는 혐의를 받는 일이 있더라도 그가 과연 참 지도자이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은 민족적으로 굴욕을 당하는 것 같아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애굽으로 도망하는 것보다 형통한 길이다. 민족의 참된 지도자는 국가도 초월하고 민족도 초월하고 혈통도 초월하여 오직 하나님 지상주의(至上主義)로 일관한다. 바벨론에게 항복하고 그 나라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인데, 어찌하여 요하난은 이 명령을 버리고 애굽으로 피하려 하였던가? 그는 정의감과 용맹을 갖춘 인물이지만, 민중을 그릇되게 인도하여 망하게 하였다(43:7).
교회의 지도자를 세울 때
박윤선 목사님의 지적이 옳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를 세울 때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잘 속습니다. 사람이 도덕적으로 바르게 보이고 선하고 옳게 보이면 지도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특히 목사를 청빙할 때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세우는 것은 요하난과 같은 사람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유교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유교적으로 옳은 사람이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백성이 당하는 괴로움으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옳게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사람은 반역자라는 혐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지도자는 결과적으로 백성을 평안하게 합니다. 그가 오해를 당할 수는 있지만 그 열매가 선한 것입니다. 반면, 요하난 같은 지도자는 그 개인은 옳게 보여도 백성은 고통을 받습니다. 이것은 참 미묘합니다. 그래서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높은 지도력을 가진 사람들 중에 요하난 같은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이것도 한국 교회가 하나님께 긍휼을 구해야 하는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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