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예레미야 39장 1-18절 | 예언의 성취와 에벳멜렉의 구원, 우리의 구원

2024. 7. 28. 11:45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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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예레미야 39:1-18

    찬송가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드기야의 불순종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를 은밀히 불러서 자기가 어떻게 될지를 물었습니다. 물었지만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바벨론에게 먼저 항복한 유다 포로들을 두려워했고(38:19) 고관들을 두려워했습니다(38:25). 그러나 정작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했더라면 다른 모든 두려워하던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가장 큰 병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길이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38:17).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39장에 나옵니다. 

    1년 6개월의 기회와 40년 동안의 예언

    1   유다의 시드기야 왕의 제구년 열째 달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모든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치더니
    2   시드기야의 제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성이 함락되니라 예루살렘이 함락되매

     

    예루살렘 성은 2년 만에 함락되었습니다(1-2절). 바벨론 군대는 시드기야 왕 제구년 열째 달부터 공격했고 성은 제십일년 넷째 달에 함락되었습니다. 시드기야에게는 항복할 수 있는 시간이 1년 6개월이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1년 6개월을 그에게 기회로 주신 것입니다. 이 1년 6개월 동안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와 가까이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예레미야는 부지런히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38장에서만 해도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와 따로 만나서 하나님의 명확한 뜻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무수한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15쪽). 

    여기서부터 예레미야는 자기 예언이 온전히 성취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다. 다시 말하면, 본장에서부터 41장까지는 예언의 말씀보다 역사적 사실들을 많이 기록했으니, 얼핏 보면 이 부분은 아무런 영적 교훈이 없는 하나의 역사적 문집인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실상 이 부분은 예언 성취의 정확성을 보여 주나니, 우리는 이 점을 주목하면서 읽어야 된다. 예레미야는 40년 동안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게 패망하리라는 예언을 거듭거듭 말하여 왔다. 그런데 이제 바벨론 군대는 와서 18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다가 그 성의 함락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자연 법칙을 어길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들은 하나님의 예언 성취도 막을 수 없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박윤선 목사님은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지적합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40년 동안 거듭해서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40년은 긴 시간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40년이 지나면 40세가 됩니다. 장성하는 나이가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토록 긴 시간 동안 같은 예언을 했습니다. 그 시간은 요시야부터 시드기야까지 왕이 다섯 번 바뀐 시간입니다. 이 때에 정치적으로 수많은 변화와 격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 이루어졌습니다. 애굽 군대가 출정해서 바벨론 군대가 잠시 후퇴했을 때에도 예레미야는 그 예언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역사가 되었습니다. 

    예언의 성취

    3   바벨론의 왕의 모든 고관이 나타나 중문에 앉으니 곧 네르갈사레셀과 삼갈네부와 내시장 살스김이니 네르갈사레셀은 궁중 장관이며 바벨론의 왕의 나머지 고관들도 있더라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바벨론 점령군 지휘관들이 중문에 앉았습니다. 3절에서는 그 중에 특별히 세 사람의 이름을 기록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16쪽).

    "중문"은 예루살렘 성 전체를 감시할 수 있는 중요한 문이다. 그들이 아직 성중에 들어가지는 않고 먼저 성 안의 모든 형편을 감시하기 위해여 "중문"에 앉은 것이다. 이 사실은 1:15 상반절의 성취이다. 거기 말하기를, "내가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라고 하였다. 

    네르갈사레셀과 삼갈네부와 내시장 살스김. 이 이름들은 모두 다 바벨론 식의 것으로서, 유다 민족이 바벨론 세력에게 장악(掌握)된 사실이 밝혀진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들을 먼 나라에서 예루살렘에 오도록 하신 사실이 있음을, 우리가 기억해야 된다. 

     

    박윤선 목사님 말씀대로 1장 15절에 하나님께서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을 부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러면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행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들이 죽음을 통과함으로 정결해지도록 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죽음을 허락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이 임하는 것은 우리의 죄가 정결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망하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정결하게 해서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죽음은 부활로 가는 과정입니다. 재앙 중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전능하십니다. 

    낱낱이 성취되는 예레미야의 예언

    4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모든 군사가 그들을 보고 도망하되 밤에 왕의 동산 길을 따라 두 담 샛문을 통하여 성읍을 벗어나서 아라바로 갔더니
    5   갈대아인의 군대가 그들을 따라 여리고 평원에서 시드기야에게 미쳐 그를 잡아서 데리고 하맛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로 올라가매 왕이 그를 심문하였더라
    6   바벨론의 왕이 리블라에서 시드기야의 눈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의 모든 귀족을 죽였으며
    7   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고 사슬로 결박하였더라
    8   갈대아인들이 왕궁과 백성의 집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었고
    9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자기에게 항복한 자와 그 외의 남은 백성을 잡아 바벨론으로 옮겼으며
    10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그 날에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더라

    시드기야 왕은 항복하지 않고 도망갑니다. 끝까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라바로 도망을 갔지만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얼마 못 가서 즉, 여리고 평원에서 잡혔습니다. 잡혀서 느부갓네살에게로 끌려갔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그가 보는 데서 그의 아들들과 유다의 모든 귀족들을 죽였습니다. 이들은 어쩌면 그로 하여금 항복하지 못하도록 한 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을 죽인 후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고 사슬로 결박했습니다(4-7절). 그리고 예루살렘 성이 불사름을 당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8절). 사람들은 사로잡혀서 끌려가고 빈민만 그 땅에 남아서 포도원과 밭을 받았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만 남은 것입니다. 4-10절은 앞에 나온 예레미야의 예언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16쪽). 

    이 부분에서는, 시드기야 왕과 예루살렘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여 준다. 시드기야 왕에게 된 일들이 예언 성취로 된 것은 1) 그가 도망하되 밤에 두 담 샛문을 통하여 도망한 것(4절). 이것은 에스겔이 예언한 대로 되었으니, 그가 말하기를 "무리가 성벽을 뚫고 행장을 그리로 가지고 나가고 그 중에 왕은 어두울 때에 어깨에 행장을 메고 나가며(겔 12:12)"라고 하였다. 2) 그물에 걸리듯이 바벨론 군대에게 붙잡힘(5절). 이것도 역시 에스겔의 예언대로 되었으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또 내 그물을 그의 위에 치고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겔 12:13)"라고 하였다. 3) 그가 바벨론 왕 앞에 와서 심문을 당함(5절 하). 이것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되었다. 렘 34:3에, "네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손에 넘겨져서 네 눈은 바벨론 왕의 눈을 볼 것이며 그의 입은 네 입을 마주 대하여 말할 것이요 너는 바벨론으로 가리라"라고 하였다. 본장 5절에도 역시 그런 말씀이 있다. 4) 그의 눈이 뽑힘(7절). 이렇게 될 것은 겔 12:13 끝에 예언되어 있으니, 그가 바벨론에서 죽기까지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 것이다("그가 거기에서 죽으려니와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 땅을 보지 못함은 눈이 뽑혔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도시가 불사름이 된 것과 시민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것도 역시 예언 성취이다(9절). 이 사실에 대한 예언들은 4:20; 5:17, 19' 6:8, 21, 26' 7:15, 20, 33, 34; 8:3, 10; 9:7, 11, 16; 10:21; 11:23; 12:12, 14, 17; 13:9, 24; 15:1-4; 16:4, 13; 17:27; 19:3, 9, 11; 20:4, 5; 21:10; 38:18, 23에도 있다. 

     

    주석 말미에 예레미야서의 수많은 구절이 나열됩니다. 그만큼 예레미야는 40년 동안 여러 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전하는데 왔다갔다 바뀌지 않고 일관되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레미야를 선대하는 적국이자 이방인들

    11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사령관 느부사라단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2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
    13   이에 사령관 느부사라단과 내시장 느부사스반과 궁중 장관 네르갈사레셀과 바벨론 왕의 모든 장관이
    14   사람을 보내어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서 데리고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넘겨서 그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매 그가 백성 가운데에 사니라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군대의 사령과 느부사라단에게 예레미야를 선대하라고 명령했습니다(11-12절). 느부사라단은 느부갓네살이 말한 대로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서 데리고 나와 그를 집으로 가게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역설적이게도 바벨론의 침략으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예레미야를 선대한 것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정보가 중요합니다. 수많은 정탐이 오고갔을 것입니다. 단 1년 6개월의 정탐 뿐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때부터 활동했습니다. 그러니까 40년 동안 같은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 말씀은 느부갓네살과 바벨론 군대와 관련된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것을 모를리 없습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의 성취를 보고 하나님의 사람을 선대했습니다. 그를 신적인 사람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끝까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앞으로 펼쳐지는 사건을 보아도 그들은 끝까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유대인들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어찌보면 예견된 일입니다. 

     

    이 구절들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17쪽). 

    여기서는 그 전란(戰亂)중에서도 예레미야는 보호를 받으리라고 한 예언이 성취된 것을 말한다. 1:8에 말하기를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하였고, 렘 15:21에는 말하기를,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라고 하였다(참조. 15:11). 

     

    박윤선 목사님이 인용한 구절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는 사람들로부터 예레미야를 보호하신다는 구절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명확하게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예레미야는 바벨론 군대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동족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했습니다. 자기 동족이 그를 죽이려고 시도하고 실행했을 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어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오히려 적국인 바벨론 군대는 예레미야를 선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는 배척을 받으셨으나 이방인들에게는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했으나 이방인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에벳멜렉의 구원과 우리의 구원

    15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6   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난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 날에 네 눈 앞에 이루리라
    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
    18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

     

    15-18절은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가 아직 감옥 뜰에 갇혔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에벳멜렉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이 재난을 받을 것이고 에벳멜렉이 그것을 볼 것이지만(16절) 에벳멜렉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17절).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18절).

    에벳멜렉의 구원

     

    이 말씀은 하박국 말씀의 성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이스라엘 중에 있는 의인이든 악인이든 다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의인과 악인은 비교 개념에서 나온 의인과 악인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더 의인이냐, 더 악인이냐 그런 개념인 것입니다. 그런데 비교적 의인이라고 불리는 자도 악인도 다 바벨론의 침략으로 멸망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중에 진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셨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진짜 의인은 교만하지 않고 믿는 사람입니다. 바벨론이 침략했을 때 의인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바로 에벳멜렉입니다. 바벨론의 침략과 하나님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간 것과 그들을 흩은 것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볼 때 죽을 때 구원을 받는 사람은 누구냐가 딱 나옵니다. 죽을 때 구원을 받는 사람은 믿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냐면 노략물을 얻음 같이 생명을 얻어 구원을 받습니다. 죽음을 통과하여 얻는 생명이기에 그 생명 얻은 기쁨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기쁨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이처럼 기쁜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구절들을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17쪽). 

    여기서는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구원하여 준 "에벳멜렉"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된다. 그것은 바벨론으로 말미암은 전화(戰禍)가 예루살렘에 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18절). 이 말씀은, 에벳멜렉이 그 위험한 전쟁 중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로 구원을 받아 그 기쁨을 구사일생(九死一生)의 경우와 같이 될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것은 에벳멜렉이 구스인에 내시라는 것입니다. 그가 이방인에 고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구원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것이 미리 성취된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구원이 바로 에벳멜렉이 받은 구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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