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예레미야 37장 11-21절 | 오해 받고 박해 받는 예레미야

2024. 7. 25. 23:47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목차


    예레미야 37:11-21

    찬송가 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시드기야의 기도부탁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가 기도를 부탁한 것은 그의 계획에 따라서 바벨론 군대가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한 일에 하나님께서 재가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자기 성공을 하나님께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바벨론 왕을 섬기라고 하셨지만 그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재앙을 면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도와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은 이교도와도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바벨론 군대가 다시 와서 예루살렘을 점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7:8).

    베냐민 땅으로 가다가

    11   갈대아인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매
    12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에서 백성 가운데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그리로 가려 하여
    13   베냐민 문에 이른즉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먀의 아들인 이리야라 이름하는 문지기의 우두머리가 선지자 예레미야를 붙잡아 이르되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그 때는 바벨론 군대가 잠시 예루살렘을 떠났던 때입니다(11절).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으로 갔습니다. 베냐민 땅에서 분깃을 받으려고 간 것입니다(12절). 그런데 그런 예레미야를 이리야라고 하는 문지기가 붙잡았습니다. 붙잡은 이유는 예레미야가 바벨론 군대에게 항복하려고 간다는 것이었습니다(13절). 여기서 베냐민 문은 예루살렘의 북쪽 문입니다(38:7; 슥 14:10). 이 문은 에브라임 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왕하 14:13; 느 8:16).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북쪽 문으로 나가는 것을 북쪽으로 떠난 바벨론 군대에게 항복하러 간다고 오해한 것입니다. 칼빈은 "백성 가운데 분깃을 받으려고"를 "백성 중 고요히 거하려고"라고 해석합니다. 그가 고요히 거하려고 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레미야를 핍박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마침 바벨론 군대가 떠났기 때문에 애굽을 의뢰하는 유대인들은 예레미야를 대적하기가 쉬웠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피해서 예루살렘에서 나가서 고요히 지내려고 한 것입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96쪽). 

     

    이리야라고 하는 문지기가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라고 한 것은 거짓된 누명(陋名)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97쪽).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거짓된 자들에게 이런 누명을 쓰는 것이 보통이다. 그때에 유다 민중은 친애굽주의로 흘러서 바벨론을 대적하려고만 하였다. 그러나 바벨론 군대는 실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셨던 것이다. 그러니만큼, 예레미야는 바벨론 군대를 반대하지 않았다(21:8-10). 그가 그런 입장을 취하기는 저렇게 신본주의(神本主義) 처지에서 였다. 그도 유다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사랑하는 방법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이었다. 그는 그 민족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만 바로 될 줄 알았다. 

    민족 배반자로 오해 받음

    14   예레미야가 이르되 거짓이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고관들에게로 끌어 가매

     

    예레미야는 이리야에게 그 말은 거짓(שֶׁקֶר)이라면서 항변합니다. 예레미야 입장에서는 참 억울했을 것입니다. 그는 민족의 배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바로 민족을 참으로 위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리야는 듣지 않고 그를 잡아서 고관들에게 끌어 갔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97쪽).

    예레미야는 이리야가 자기에게 씌우는 누명을 사실과 반대된다고 지적한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떠나는 것은 개인의 생명 구출을 위하여 바벨론 군대에게로 건너서려는 비루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에게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했으나(21:9; 38:2), 그것은 유다 나라가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는 자기 혼자 살려고 구차스러운 행동을 취할 자는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한 것이다. 

    당시 지도자들의 무법함

    15   고관들이 노여워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을 옥으로 삼았음이더라

     

    고관들은 분노하여 예레미야를 때렸습니다. 그렇게 하고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습니다. 그 집은 감옥으로 사용되었었습니다(15절).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방백들이 무죄한 예레미야를 때리고 감금한 사실을 보면, 그때에 민중을 지도하던 그들이 얼마나 무법(無法)하고 부패하였던 사실을 볼 수 있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97쪽).  

     

    뚜껑 씌운 웅덩이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뚜껑 씌운 웅덩이에

    16   예레미야가 뚜껑 씌운 웅덩이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17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이끌어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이르되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이르되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

     

    예레미야는 뚜껑 씌운 웅덩이에 들어가서 여러 날 있었습니다.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16절). 그렇게 갇혀 있던 예레미야를 꺼내준 것은 시드기야 왕이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사람을 보내서 예레미야를 나오게 하고 왕궁으로 불러왔습니다. 불러와서는 예레미야에게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라고 비밀히 물었습니다. 그 때 예레미야는 있다고 하면서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라고 전했습니다. 예레미야로서는 정말 전하기 싫은 말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스러웠던 웅덩이에 또 던져질까 두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거기에서 어둠과 축축함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어쩌면 공황 장애를 겪었을 수도 있습니다(20절). 그런데도 예레미야는 죽음을 무릅쓰고 시드기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로 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합니다. 자기 생명은 그 다음인 것입니다.

    악한 왕 시드기야

    박윤선 목사님은 시드기야 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97쪽).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를 석방하고 그에게 하나님의 계시 유무를 물어 본 태도는 그가 방백들보다는 선량한 면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대하 36:11-13) 시드기야 왕을 악한 왕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을 보면, 그는 선량한 방면이 있으면서도 인격이 유약(柔弱)하여 악한 신하들에게 좌우되었음이 분명하다. 

    시드기야가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계시 유무를 물어본 것은 순종할 결심으로 그리한 것보다 다만 미로(迷路)에 빠져서 아무런 결단성도 없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물어본 것뿐이다.

    1) 이런 의미에서 그는 또다시 이교도의 태도를 취한 것이다. 회개함으로 생활을 돌이키는 일은 없이 단순히 공포심으로만 미래의 일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하나의 점술자와 같이 취급하는 잘못이다.

    2)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육적 감금을 당하여 자유하지 못하는 자가 된 사실을 보는 동시에 시드기야는 죄악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유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포로인 것을 볼 수 있다. 사실상 영적으로 말하면 자유인은 시드기야 왕이 아니고 선지자이며, 갇힌 자는 선지자가 아니고 왕이다(Veldkamp). 왕이 얼마나 두려움에 사로잡혔던가! 그가 예레미야를 면회하되(17절) "비밀히"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왜 비밀히 하였을까? 그것은 예레미야를 박해하는 신하들을 두려워 한 까닭이다. 그는 왕이면서도 이렇게 수하의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의인 예레미야를 접촉하는데 있어서 "비밀히" 하였다. 누구든지 그 자신이 의를 사모하면서도 의에게 투신(投身)하지 않는 자는, 늘 이렇게 비겁한 자가 되어져서 두렵지 않은 것까지도 두려워하게 된다. 의에 투신하는 자만이 담대하다. 잠 28:1에 말하기를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라고 하였다. 

    시드기야 왕의 물음에 대한 예레미야의 답변은 또다시 담대하게 나온다. 이번에도 그는 그때 지도자들이나 일반 백성이 듣기 싫어하는 예언을 전과 같이 거듭 말한다. 특별히 시드기야 왕의 신상에 임할 직접 위헙으로써 경고를 발한다. 이것은 물론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는 일국의 왕으로서는 듣기 싫어할 말이다. 그때의 지도자들은 이런 말을 다 듣기 싫어하셨다(참조. 38:1-4).

    거짓과 진실

    18   예레미야가 다시 시드기야 왕에게 이르되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
    19   바벨론의 왕이 와서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나서 시드기야게게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무슨 죄가 있길래 옥에 가두었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벨론 왕이 와서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냐고 합니다(19절). 그들의 예언은 틀리고 자기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거짓을 전한 것이 죄입니다. 진실을 전한 것은 죄가 아닙니다. 진실을 전한 예레미야는 옥에 갇혔지만 거짓을 전한 선지자들은 옥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옥에 갇히는 기준은 자기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하느냐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상은 심판을 받아 마땅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자기를 변호하는 것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99쪽). 

    이 구절들은 예레미야 자신의 변호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때에 성직자의 자신 변호도 그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성직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도 이런 의미에서 자기변호를 하신 때가 있다(요 18:23). 선지자는 이런 변호를 함으로 그가 선포한 예언의 정당성을 내세운다. 

    내가 거기에서 죽을까 두려워하나이다

    20   내 주 왕이여 이제 청하건대 내게 들으시며 나의 탄원을 받으사 나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 내가 거기에서 죽을까 두려워하나이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탄원합니다.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시기를 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예레미야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구덩이에 던져져서 뚜껑이 닫힌 채로 여러 날을 지냈습니다. 그 경험은 혼돈과 흑암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이런 죽음의 공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499쪽). 

    여기서 그(예레미야)는 죽음을 기피하는 심리를 충분히 나타냈다. 이것은 선지자가 초자연 사역을 하는 동시에 자연적 심리도 가진 사실을 보여 준다.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이었다(약 5:17). 하나님의 사람이 구차하게 생명을 아끼는 것은 옳지 않으나,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도 하나님의 창조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도 하남의 영광을 나타내는 방면이 있다. 예레이야가 아직도 하나님의 사명을 완필하지 못한 줄 아는 한, 이제 그가 요나단의 집에 다시 갇혀 거기서 죽고 마는 것은 그의 원할 바가 아니었다(참조. 빌 1:23-24). 그러므로 우리는 이때에 예레미야가 죽기를 두려워한 태도를 낮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의 이와 같은 태도를 도리어 꾸밈이 없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예레미야의 생명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21   이에 시드기야 왕이 명령하여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 두고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매일 떡 한 개씩 그에게 주게 하매 성중에 떡이 떨어질 때까지 이르니라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머무니라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의 간청을 들어줍니다. 그를 감옥 뜰에 두고 매일 떡 하나씩을 그에게 주게 했습니다(21절). 예레미야는 갇혀 있었기 때문에 생명이 보호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풀려났다면 그는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갇혀 있으면서 식량을 공급 받았기 때문에 그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을 버리시는 것 같으나, 도리어 그 방법으로 오묘하게도 그들을 보호하신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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