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예레미야 38장 1-13절 |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유대 고관들과 그를 건진 내시이자 구스인인 에벳멜렉

2024. 7. 26. 15:06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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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예레미야 38:1-13

    찬송가 586장 어느 민족 누구게나


    38장 본문의 문맥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 덕분에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드기야 왕을 사용하셔서 예레미야를 보호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감옥 뜰에 있으면서 매일 떡 한 덩이씩을 받아 먹었습니다(37:21). 비록 그는 갇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계속 전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은 재앙의 말이었습니다. 애굽 편에 서서 바벨론에 결사 항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레미야는 눈엣가시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불명예스러운 이름들

    1   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와 셀레먀의 아들 유갈과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는 말을 들은즉 이르기를

     

    1절에는 예레미야를 제거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스바댜와 그라댜와 유갈과 바스훌이 그들입니다. 여기에는 그들의 아버지들 이름까지 나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려고 한 주동자들입니다. 이름이 오고 오는 세대가 열심히 읽는 성경에 기록되었지만 너무나 불명예스럽게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있는 책에 우리 이름이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들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03쪽).

    여기 기록된 네 방백들은 시드기야 왕의 심복 분자들이다(참조, 5절). "셀레먀의 아들 유갈과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은 벌써 21:1과 37:3에 각각 나타나 있다. "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사스훌의 아들 그다랴"는 다른 데엔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이 둘째 사람 그다랴가 바스훌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니 이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때리고 감금하기까지 하였던 바스훌인 듯 하다(20:1-2). 

    이들이 예레미야의 말을 청취(聽取)한 동기는 바리새인들처럼 그를 고발하려는 것이었다.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혔으나(37:21) 계속적으로 예언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을 보면 예레미야는 갇힌 중에도 영적으로 충분히 자유하였다. 하나님의 종은 갇힐지라도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갇히지 않는다(딤후 2:9).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마음 자세여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는 우리 마음이 좋은 밭이 되기를 구해야 합니다. 뿌려진 말씀을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간직하고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그 결과는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나 중심으로 말씀을 들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겠다는 태도는 그 중심에 이미 나 자신이 앉아 있는 태도입니다. 말씀이 중심이 아니고 내가 중심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자의 태도입니다. 1절에 나온 그들이 그랬습니다. 이런 태도로 말씀을 듣는다면 하나님 나라에 있는 책에 우리 이름이 좋게 기록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이유 

    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는 노략물을 얻음 같이 자기의 목숨을 건지리라
    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의 내용이 2-3절에 나옵니다. 이 말씀은 21장 9-10절의 말씀과 거의 똑같습니다. 1절에 나온 방백들은 이 말씀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자기들의 생각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2-3절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04쪽). 

    이 말씀은 21장 9-10절 말씀과 거의 유사하다. 이것을 보면, 예레미야는 이런 마을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번번이 하였다. 1) 그러므로 그 말씀대로 될 때에 그것을 보는 자들이 예언 성취임을 의심할 수 없다. 2) 회개치 않는 자들이 들어야 할 말은 그 회개치 않는 동안 언제든지 같은 말일 것이다. 

    "그는 노략물을 얻음 같이 자기의 목숨을 건지리라"라고 한 말씀은 잃을 뻔한 생명을 건짐받았기 때문에 기쁨도 클 것을 가리킨다. 

     

    예레미야가 똑같은 말씀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반복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말씀을 계속 주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회개하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그만큼 사랑하시고 그만큼 그들이 회개하고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겔 18:23; 33:11). 만약 계속 같은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온다면 속히 그 길에서 떠나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 사랑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 생명의 건짐을 받습니다. 노략물을 얻음 같이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큰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재난을 두려워하여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함

    4   이에 그 고관들이 왕께 아뢰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위에 나온 네 사람은 시드기야 왕에게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가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않고 재난을 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레미야를 무고히 고발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레미야처럼 백성의 평안을 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한 것은 그것이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을 대적하는 자들이 백성의 재난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즉 자기들이 백성의 재난을 구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이 고발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정확하게 적용됩니다. 누군가를 고발할 때에 우리는 이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 말에 나도 걸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04쪽).

    이 말씀을 보면 저 "고관들"은 확실히 예레미야를 오해하였다. 위의 예레미야의 예언은 실상 백성의 해(害)를 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그들에게 임할 환난을 경고함으로 그들이 회개하는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전화(戰禍)가 만류되어 평안케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의 의도를 정반대로 오해하였다. 언제든지 죄책(罪責)을 지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자들은 이런 유익한 경고를 저주와 같이 생각한다. 이런 오해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곧, 그들이 죄 때문에 징계를 받게 된다는 그 말씀 앞에서, 죄책은 안 지고 선지자가 예고한 징벌을 좋지 않게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런 경고를 듣고 회개하는 자가 축복을 받는다. 회개는 영광에 이르는 길이요, 결코 떨어지는 길이 아니다. 잠 28:13에 말하기를,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라고 하였다. 

     

    박윤선 목사님도 똑같이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까지도 잘 말씀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이유는 그가 자기의 죄책을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정하지 않지만 자기들에게 재난이 올 것을 두려워합니다. 만약 의인이라면 재난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재난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스스로도 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도 회개는 안 하고 재난만 두려워하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재난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 재난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재난이 두렵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할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악한 시드기야

    5   시드기야 왕이 이르되 보라 그가 너희 손 안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하는지라

     

    시드기야 왕은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라는 말에 동조합니다. 그는 참 유약한 왕이었습니다. 시드기야는 신하들도 두려워하고 바벨론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두려워할 분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사자같이 담대해집니다. 시드기야는 그런 면에서 악한 왕입니다. 인간적인 모습도 보이고 불쌍한 모습도 보이지만 그는 굉장히 악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불신앙의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만홀히 여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05쪽). 

    본절에는 시드기야 왕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지도대로 따르지 못한 불신앙의 원인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이러하니 곧, 1) 그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였음. 그는 자기 수하에 있는 고관들도 두려워하였다. 2) 그는 무책임하였음. 일국의 왕으로서 정당한 권리도 행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지자의 생사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다. 곧 그는 의인을 살리는 일에 정당한 직권(職權)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마치 빌라도가 군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준 것과 같다(요 19:16). 

    진리와 의에 대하여 무관심한 자들은 하나님을 신앙하지 못한다. 그들은 언제나 신앙적으로 서지 못하고 형편을 따라 이렇게 혹은 저렇게 기울어지고 만다. 

     

    박윤선 목사님도 똑같이 말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진리와 의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믿는다고 하면서 진리와 의에 굳게 서지 못하고 형편에 따라 좌우로 치우친다면 그는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불신자일 수 있습니다. 형편에 따라서 좌우로 치우치는 이유는 그 중심에 자기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자기 자신이 있는 사람은 우상숭배자요 불신자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매일 스스로를 죽이는 싸움입니다. 내가 중심에서 자꾸 내려오는 싸움입니다. 매일 회개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구덩이 진창 속에 빠진 예레미야

    6   그들이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렸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 속에 빠졌더라

     

    예레미야는 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시드기야 왕에게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있는 뚜껑 씌운 웅덩이에 다시는 보내시기 말기를 간청했습니다(37:20). 그런데 그는 또 다시 다른 구덩이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예레미야를 가둔 것이 아니고 그를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진 것입니다(4절,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들은 예레미야를 진창 속 구덩이에 던져 넣어서 거기에서 굶어 죽게 할 작정이었습니다(9절).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만약에 누가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자기 자신이 그 중심에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05쪽). 

    "구덩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보르(בּוֹר)이니 이것은 요나단의 집에 있었던 지하실 감옥(37:15)이 아니고 본래 물이 있었던 깊은 구덩이였는데 그 때에는 물이 말라서 속에 진창이 남아 있었다. 근동(近東) 지방에서는 물을 저축하기 위하여 이런 구덩이를 파두는 풍속이 있었다. ...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그 때 진창이 예레미야의 목에까지 올라왔다고 한다.애 3:55, 57에 보면 그가 그 구덩이에서 기도했는데, 그 때에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혀서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라"라고 하셨다.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3장 55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같은 장 57절에는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때에 맞게 응답을 주십니다. 급박한 상황에 따라서 빨리 응답을 주시기도 하고 하나님의 때에 맞추셔서 천천히 응답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다만 여기에서 그 타이밍은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에 따라서 행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의 원칙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날 예레미야에게 찾아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신 것은 예레미야에게 피할 길을 주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말씀을 듣고 좀더 인내함으로 구원을 바랐을 것입니다. 그 시험을 능히 감당할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사랑으로 행하십니다.  

     

    예레미야 38장, 예레미야, 에벳멜렉

    내시이자 구스인인 에벳멜렉

    7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이 그들이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그 때에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
    8   에벳멜렉이 왕궁에서 나와 왕께 아뢰어 이르되
    9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성 중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에서 굶어 죽으리이다 하니
    10   왕이 구스 사람 에벳멜렉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는 여기서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죽기 전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
    11   에벳멜렉이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 곳간 밑 방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헝겊과 낡은 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구덩이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밧줄로 내리며
    12   구스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이 헝겊과 낡은 옷을 당신의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에 대시오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매
    13   그들이 줄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낸지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

     

    생명이 위험했던 예레미야를 구한 인물은 내시이자 구스인으로서 이방인인 에벳멜렉(7절, 12절)입니다. 여기에 복음이 담겨있습니다. 원래 고자와 이방인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 고자(신 23:1)와 이방인이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 56:4, 6). 이 예언은 신약시대에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때에도 이미 먼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와 있는 고자와 이방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에벳멜렉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따르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에벳멜렉은 예수님 때, 즉 신약시대, 이 시대를 미리 보여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506-507쪽). 

    구스 사람 에벳멜렉의 선행에 대하여(7-13절)

    1. 그는 그때에 유대인들이 그렇게 종교적으로 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일개 외국인으로서 여호와의 참 종교에 충성하였다(7, 8절). 사람은 흔히 환경의 부패에 따라서 부패해지기 쉬운 것인데, 그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2. 그는 모든 악한 방백들이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를 박해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외국인으로서 담대하게 그들을 정죄하고 예레미야를 구출하기로 나섰다(9절). 그 방백들을 가리켜 악하다고 단언하는 것은 여간한 용감이 아니다. 

    3. 그는 예레미야를 구출함에 있어서 각근(恪勤)히 친수(親手)로 하되 주의 깊게 하였다(11-13절). 그가 "헝겊과 낡은 옷"을 예레미야의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 대라"고 한 것은 예레미야의 몸이 상하지 않도록 한 주의 깊은 처사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여호와의 참 종교에 관련된 이방인들의 신앙 행위를 종종 본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자선 행위(눅 10:30-37), 열 문둥이 중 하나인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 행위(눅 17:11-19), 구스 내시의 열심 있는 신앙(행 8:26-40), 가이사랴의 고넬로의 신앙(행 10:1-30), 백부장의 신앙(마 8:5-13), 사마리아 여자의 신앙(요 4:1-29), 수로보니게 여자의 신앙(마 15:21-28) 등이다. 

    유대인들의 불신앙 판에 이상하게도 신앙의 독보(獨步)를 걷는 이방인이 나타난 것은, 1) 여호와의 종교를 조상 때부터 소유하고도 그대로 믿지 아니한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며, 2) 그 귀한 생명의 종교가 결국 유대인들에게 보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혜택을 더 많이 끼칠 것을 예언하기도 한다. 많이 받았으나 교만하여 순종치 않는 자는 결국 빼앗기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원리이다. 마 20:16에 말하기를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고 하였다(참조. 마 21:43). 

     

    에벳멜렉(עֶבֶד מֶלֶךְ)은 "왕의 종"이란 뜻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사람을 곳곳에 두시고 적당한 때에 그를 사용하십니다. 그는 시드기야와는 대조됩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았지만 에벳멜렉은 하나님만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시드기야 왕도 유다의 고관들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의 왕은 불신자요 우상숭배자였지만 고자요 이방인이었던 에벳멜렉은 신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도 이 말씀 안에 예언적 성격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많이 받았으나 교만하여 빼앗기는 사람이 우리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많이 받으면 그것이 귀한 줄을 모르게 됩니다. 귀한 줄을 모르면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 안에 심긴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항상 감사하며 하나님께 순종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 순종 안에 에벳멜렉처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순종도 포함될 수 있으나 매순간의 작은 순종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런 순종을 계속하는 사람은 결정적인 순종도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떠오르는 잘못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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