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예레미야 50장 1-10절 | 바벨론에 대한 예언, 약탈하는 자마다 만족하리라

2024. 8. 14. 19:27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목차


    예레미야 50:1-10

    찬송가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바벨론에 대한 예언

    이방 나라에 대한 마지막 예언은 바벨론에 대한 것입니다. 바벨론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이 50장과 51장에 나옵니다. 당시 바벨론은 천하를 제패(制覇)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멸망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바벨론은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세력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세력을 다니엘서는 짐승으로 표현합니다. 그런 표현을 요한계시록도 사용합니다. 이 짐승은 어떤 정치적 세력이기도 하고 영적 세력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가장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죄와 사망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인 아닌 사람이 없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죄와 사망세력은 여전히 굳건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은 이미 패배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예레미야처럼 바벨론의 멸망, 즉 죄와 사망세력의 멸망을 미리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전파하라 공포하라 

    1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바벨론과 갈대아 사람의 땅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라
    2   너희는 나라들 가운데에 전파하라 공포하라 깃발을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

     

    여호와께서는 온 우주를 다스리십니다. 그 다스림을 지금은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계십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기 때문에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를 다 주관하십니다. 바벨론 같은 큰 제국의 흥망성쇠도 우리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바벨론을 멸망시키실 것인데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택하신 백성들을 때문입니다(4절).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나라들 가운데 전파하라 공포하라 깃발을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라고 하십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시는 이유는 첫째, 이 소식이 그만큼 놀라운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바벨론이 망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바벨론이 함락되는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둘째, 이 소식이 택하신 백성들에게는 복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반복해서 전해져야 합니다. 전파하고 공포하고 깃발을 세우고 숨김이 없이 공포해야 합니다. 죄와 사망세력이 패배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생명이 사망을 삼켜서 이겼다, 이런 복음이 숨김이 없이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벨과 므로닥

    "벨"은 "주인, 제왕"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바알"과 같은 뜻을 가집니다. "바알"도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고유명사라기 보다는 직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바벨론에서는 "므로닥" 즉 마르둑이라는 신을 주인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벨"과 "므로닥"은 같은 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벨론은 "므로닥"을 "주인"으로 섬긴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가 함락되고 그 도시의 주인이었던 벨, 므로닥은 수치를 당하고 부서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시면서 그 우상 신에 대한 심판을 가장 먼저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622쪽). 

    바벨론 멸망을 예언하는 데 있어서 첫 머리에 이런 우상들이 부서질 것을 선언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우상 숭배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할 터인데, 그 대신으로 우상을 섬기는 것은 죄악의 근본이 된다. 여기서도 우리가 또다시 기억할 것은 우상 숭배가 구약시대에는 손으로 만든 형상으로 표현되었으나, 신약시대에는 무형(無形)하게 심령 속에서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 활동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탐심이다(골 3:5). 

    그 땅으로 황폐하게 하여

    3   이는 한 나라가 북쪽에서 나와서 그를 쳐서 그 땅으로 황폐하게 하여 그 가운데에 사는 자가 없게 할 것임이라 사람이나 짐승이 다 도망할 것임이니라

     

    이 구절에 대해서는 박윤선 목사님이 잘 설명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 주석, 622쪽). 

    여기 "북쪽에서" 나오는 "한 나라"는 메대 바사를 의미한다. 바벨론이 처음에 고레스로 말미암아 정복되었을 때에는 피해가 적었다. 그러나 후에 바벨론이 반역했으므로 다리오 왕이 이를 다시 진압할 때엔 그곳을 아주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 예언은 실현되어서 당시 화려했던 바벨론은 지금까지 황폐하게 남아 있습니다. 아무도 사는 자가 없는 황무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와 연합하라

    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유다 자손도 함께 돌아오되 그들이 울면서 그 길을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5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라 하리라

     

    바벨론이 받는 심판은 택하신 백성의 회복으로 연결됩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이 함께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오는 목적지는 하나님의 땅, 하나님의 품입니다. 흩어졌다가 돌아오는 이미지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이미지입니다(겔 37:12-13).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이 죽음이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생명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는 울면서 돌아옵니다. "그들이 울면서 그 길을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회심할 때 자기의 죄를 통회하면서 울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무엇이든 "여호와께" 구하게 됩니다. 믿는 우리는 모든 좋은 것을 다 하나님께만 구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들은 삶의 목적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삶의 목적은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것을 "영적 광복"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목적은, 보다 행복한 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연합하려는 영적 광복을 위한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이렇게 거룩하게 되는 것이 귀하다. 그들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 소망이 없는 것 같았으나, 이제 뜻밖에 해방을 당하고 보니, 저희를 백성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계약의 영원성이 다시 기억에 떠오르게 된다. 

    내 백성은 양 떼로다

    6   내 백성은 잃어 버린 양 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언덕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

     

    하나님의 백성은 잃어버린 양 떼 같았습니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했습니다. 여기서 목자들은 정치 및 종교 지도자들을 뜻합니다. 산으로 돌이키게 했다는 것은 우상을 섬기러 이 산, 저 산을 다니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는 사람으로 하여금 쉬지 못하게 합니다.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김으로 언제나 만족을 얻지 못하고 이 우상에서 저 우상으로 끊임없이 많이 섬겼다. 언제나 우상 숭배는 거짓된 것인만큼 영적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니다. 

     

    참된 만족은 영적 만족입니다. 우상은 여러 육체적 만족을 가장해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문제는 지도자들이 그런 유혹으로 양떼를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육체적 만족을 위한 삶은 참된 안식을 얻지 못하는 삶입니다. 참된 안식은 우리의 참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마음의 쉼은 바로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그러므로 참된 안식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우상에게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죄하다

    7   그들을 만나는 자들은 그들을 삼키며 그의 대적은 말하기를 그들이 여호와 곧 의로운 처소시며 그의 조상들의 소망이신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인즉 우리는 무죄하다 하였느니라

     

    여기서 "그들"은 6절의 양떼들을 가리킵니다. 그 양떼를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을 삼켰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치고 그들을 유린하고 그들을 약탈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들이 여호와 곧 의로운 처소시며 그의 조상들의 소망이신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인즉"이라고 합니다. 즉 자기들이 하나님 백성을 치는 이유가 그들의 범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범죄 때문에 자기들이 그들을 취하는 것이니 자기들은 "무죄하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천하 사람들이 다 알 만큼, 그들의 죄에 대한 책망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강퍅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때에는 하나님의 벌을 면할 수 없다. 

    본절에 나타난 말씀을 보아서 이스라엘의 원수들도 범죄하고 있었다. 그 죄는 그들의 교만이다. 그들이 유대인들의 죄를 노래 삼아 말하면서, 자기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한다. 그들은, 저희들 자신이 예루살렘 정복에 나서게 된 것이 하나님의 도구로써 그리하게 된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마땅히 자기들도 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겸손하게 예루살렘 정복을 실행했어야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범죄함으로 "여호와 곧 의로운 처소"이신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도구로 바벨론이 쓰였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이라고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 정확하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우리는 무죄하다"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바벨론 가운데에서 도망하라

    8   너희는 바벨론 가운데에서 도망하라 갈대아 사람의 땅에서 나오라 양 떼에 앞서가는 숫염소 같이 하라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계속 양 떼에 비유하십니다.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라고 하십니다. 양 떼에 앞서가는 숫염소 같이 신속하게 빠져나오라고 하십니다. 바벨론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남으로 무덤문을 열고 바벨론에서 이미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 거듭남은 부활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셨습니다. 

    그를 약탈하는 자마다 만족하리라

     

    그 약탈하는 자마다 만족하리라

    9   보라 내가 큰 민족의 무리를 북쪽에서 올라오게 하여 바벨론을 대항하게 하리니 그들이 대열을 벌이고 쳐서 정복할 것이라 그들의 화살은 노련한 용사의 화살 같아서 허공을 치지 아니하리라
    10   갈대아가 약탈을 당할 것이라 그를 약탈하는 자마다 만족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북쪽에서 올라오는 큰 민족의 무리는 메대와 바사입니다. 그들이 와서 바벨론을 대항하고 쳐서 정복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화살이 바벨론 군대를 정확하게 맞출 것이라고 하십니다(9절). 그렇게 해서 갈대아, 즉 바벨론이 약탈을 당할 것이고 바벨론을 약탈하는 자마다 만족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하자면, 우리는 죽음에서 큰 유익을 얻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약탈합니다. 죽음이 우리를 약탈하지 못하고 우리가 죽음을 약탈합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죽음을 약탈할까요? 죽음은 그 세력을 발할 때마다 믿는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합니다. 장례식이 열릴 때마다 많은 이들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죽음을 보고 그 마음이 동해서 구원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장례절차 가운데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렇게 해서 사망은 약탈됩니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이 가장 강한 그 때 죽음에게서 믿음이 발생합니다. 이런 약탈은 만족을 줍니다. 우상은 만족을 주지 못해서 사람이 쉴 수 없게 하지만 죽음은 그것을 대면하는 사람에게 참된 만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함으로 만족을 줍니다. 아무도 죽음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믿는 우리는 죽음을 약탈하면서 생명으로 한걸음씩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놀라운 역설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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