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욥기 9장 17-35절 | 죄인인 것을 인정하며 중보자를 바라보는 욥

2023. 11. 13. 14:55성서유니온 매일성경/욥기

목차


    욥기 9:17-35

    찬송가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욥은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을 높였습니다(9:15-16). 이어서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치셨다고 합니다.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17절)" 욥은 마치 폭풍이 몰려와서 자기를 치는 것처럼 정신이 없습니다. 욥기 1장과 2장을 보면 정말 폭풍처럼 재난이 밀려닥칩니다. 바다 한 가운데 배가 산과 같은 파도와 거센 비바람에 정신 없이 떠밀려 가는 것처럼 욥은 그런 재앙을 받았습니다. 그런 재난 한 가운데 앉아 있을 때 욥의 아내는 욥에게 험한 말을 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친구들이 와서 욥, 네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냐면서 욥의 상처를 더욱 깊게 했습니다. 욥이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까닭 없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욥은 이런 상황에서 그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합니다. 아내나 친구들을 탓하지 않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나를 폭풍처럼 치셨고 내 상처를 깊게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욥의 태도는 본받고 싶은 태도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남탓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귀한 태도입니다. 

    숨 막히는 괴로움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18절)" 욥은 숨 쉬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괴로움이 점점 차올랐습니다. 괴로움을 담는 그릇이 있다면 욥의 그릇은 괴로움으로 가득찼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렇게 몰아가셨다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렇게 몰아가실 때 자기는 전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19-20절)" 하나님께서 강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기의 의를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할 수 있는 인생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면 옳습니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정죄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스스로 정죄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온전하다마는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21-22절)" 여기 온전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말은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자기가 완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자기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지킬 수 있는 수준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욥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수준에 있어서 최고의 수준을 보였습니다. 그는 그 큰 재앙을 받고 있음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온전한 자기를 멸망시키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욥은 연단된 믿음, 즉 증명된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는데도 죽음은 더 가까워지고 회복과 생명과 즐거움은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욥의 심정은 하나님께서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같이 멸망시키시는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23절)" 이 말은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무죄한 자는 아무 죄가 없는 자가 아니고 절망적인 상황에 들어갈 정도로 죄를 짓지 않은 자를 뜻합니다. 가령 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는데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지 않은 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것이 욥이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는 지금 폭풍처럼 몰아친 재난을 받을 죄를 짓지 않았는데 그런 재앙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재난을 당하는 자기 입장에서 보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의 절망적인 상황을 그냥 두시고 비웃으시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적인 표현으로서 하나님께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매일성경 | 욥기 9장 17-35절 | 죄인인 것을 인정하며 중보자를 바라보는 욥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세상이 악인의 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24절)" 이런 것을 경험하고 보니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간 것 같은 일이 많이 보입니다. 그런 불의한 일도 보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욥기 1장과 2장에서 일어난 일이 사실 욥이 이 구절에서 말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의 말을 듣고 욥을 그에게 넘기셨습니다. 사탄이 얼마나 악한지 아시므로 제한을 두셨습니다. 하지만 넘기신 것은 맞습니다. 이 일은 너무 오묘한 일입니다. 욥은 그 일의 결과를 자기 몸으로 다 당하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원인을 알지 못합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의 승리와 영광을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십자가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악인의 손에 넘기시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시는 것 같이 일하신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승리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불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당하는 일을 진술하는 것입니다.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나의 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먹이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25-26절)" 게다가 욥이 보기에 자기가 죽을 날이 가까워보입니다. 회복되어 복을 얻을 희망이 없습니다. 자기 생명이 빠르게 단축되는 것이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욥은 스스로 뭔가를 해 볼 생각을 했지만 그것도 헛수고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불평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27-29절)" 스스로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얼굴 빛을 고치고 즐거운 모양을 낸다고 하더라도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현대 자기계발서에 일침을 가합니다. 자기계발서대로 해서 효과를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헛된 일인 이유는 그렇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죄를 처리할 수 없습니다. 죄가 처리되지 않으면 결국 망하게 됩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헛된 수고입니다.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내가 눈 녹은 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30-31절)" 아무리 깨끗한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씻을지라도 사람의 죄는 없이할 수 없습니다.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사람 위에 걸쳐있는 옷도 사람을 싫어합니다. 사람이 그토록 더럽기 때문입니다. 옷은 더러운 사람의 수치를 가려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스스로 죄를 없이하려는 노력은 아무 성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이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중보자를 바라보는 욥

    욥은 중보자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32-33절)"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가 바로 중보자입니다. 욥은 중보자가 없음을 한탄하면서 중보자가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수 없으니 누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계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하나님의 의로 사람에게 덧입혀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중보자이십니다.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34-35절)" 만약 중보자가 있다면 욥은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말할 수 있습니다. 중보자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욥은 그런 중보자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중보자의 의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욥의 믿음은 이렇게 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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