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욥기 8장 1-22절 | 빌닷의 뼈아픈 말, 하나님 나라의 반전

2023. 11. 11. 08:51성서유니온 매일성경/욥기

목차


    욥기 8:1-22

    찬송가 395장 자비하신 예수여


    수아 사람 빌닷 

    욥의 말을 듣고 수아 사람 빌닷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1절)" 수아는 에돔에 가까운 곳입니다. 그두라에게서 난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서 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이 있습니다(창 25:2). 빌닷에 대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쓴 학자 올브라이트(Albright)는 원시 아람 사람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빌닷이라는 이름은 욥기에만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다만 누지에서 발견된 토판 문서에는 이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 토서판들은 중요합니다. 발견된 3,500개의 서판이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시대의 풍속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의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사실일 것이라는 개연성이 증명되었습니다. 이것은 성경 비평학이 한창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 했던 주장을 뒤엎는 발견이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욥을 꾸짖음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바람과 같겠는가(2절)" 욥은 친구들에게 실망한 자의 말, 즉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이 바람과 같다고 했습니다(6:26). 즉 자기의 바람과 같은 말을 잡아 꾸짖어 무엇을 하겠느냐라는 뜻입니다. 욥은 그렇게 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6:27-30). 이 말을 받아서 빌닷은 욥의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다고 합니다.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면 욥의 말이 맞지만 빌닷은 그것이 거센 바람 같아서 꾸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3절)"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를 굳게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이 당한 환난은 하나님의 정의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욥에게 가장 뼈아픈 말을 함

    "네 자녀들이 주께 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에 버려두셨나니(4절)" 그러면서 욥에게 굉장히 뼈아픈 말을 합니다. 그것은 욥의 자녀들이 그렇게 죽은 것은 그들이 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욥의 사정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정을 모르고 던지는 말은 듣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욥도 그 자녀들 열 명이 왜 그렇게 한 순간에 죽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선하심을 노래할 뿐이었습니다. 자녀를 잃고 심대한 영혼의 고통을 겪고 있는 욥에게 빌닷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습니다. 영원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욥의 자녀들이 죽은 것은 하나님께 크게 영광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욥이 그 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예배하고 찬양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승리하셨습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일에 대해서 빌닷은 함부로 말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매일성경 | 욥기 8장 1-22절 | 빌닷의 뼈아픈 말, 하나님 나라의 반전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면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6-7절)" 빌닷이 모르는 일을 함부로 말했다고 해서 그의 말의 내용이 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 구하고 청결하고 정직하면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맞는 말입니다. 다만 욥처럼 청결하고 정직하고 또 욥처럼 하나님을 찾고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기를 간절히 간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욥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지만 아직 하나님의 돌보심과 평안을 누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욥에게는 죽음이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사정을 모르면서 원칙을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인 집회에서의 설교는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심방 설교는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7절)" 소발의 이 말대로 욥은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께 크게 복을 받습니다. 문제는 이 말이 지금의 욥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시작은 작고 미약합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시작으로 큰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자연을 보아도 그렇고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겨자씨는 작지만 그것이 자라면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나무가 됩니다. 이 말씀은 시작하는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그래서 개업하는 집에 말씀 액자를 선물로 줄 때 많이 등장하는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진리를 담고 있지만 욥에게는 오히려 고통을 안겨주는 말이었습니다. 

    전통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이 그림자와 같으니라)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8-10절)" 빌닷은 전통에 호소합니다. 전통은 옛 사람들이 이미 연구하고 밝혀 놓은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을 잘 살피고 공부하면 거기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욥이 전통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에게 일어난 일은 전통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선조들이 지혜로웠어도 욥과 같은 특별한 케이스에 대해서까지 다 기록해 놓고 교훈을 주고 있지는 못합니다. 전통은 일반적인 원리와 지혜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깊이 생각해보고 자기에게 적용해야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보통 일반적인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욥이 당한 일은 일반적인 범위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크게 잘 자라는 것 같이 보여도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11-12절)" 빌닷은 전통에 유의하지 않는 자를 왕골과 갈대에 비유합니다. 뒤에 보면 전통에 유의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와 같습니다(13절). 왜냐하면 선조들의 전통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왕골과 갈대는 물기를 머금은 진펄과 같은 곳에서만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이 풀들은 하루가 다르게 쭉쭉 뻗어 자랍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금방 말라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들은 선조들의 교훈에서 벗어나 위만 보고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업에서 이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사업이 잘 되니까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다가 갑자기 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말씀과 교회의 고백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13-15절)" 항상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조들의 가르침을 중히 여기는 이유는 그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고백도 경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신자의 어머니로 주셨습니다. 즉 신자가 성장할 수 있도록 교회를 사용하셔서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통에서 떠난 자들이 이단을 만듭니다. 이단은 번성하는 것 같으나 어느새 말라있습니다. 그들이 희망하고 믿는 것이 하나님과 상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배우는 일에 있어서 성경말씀과 선조들이 성경을 해석해 놓은 귀한 자료를 참고하는 것은 균형잡힌 믿음을 갖게 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빌닷의 말이 욥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욥은 전통을 경시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지도 않았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희망하거나 믿거나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외식하는 자들과 이단의 결말

    "그는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 동산에 뻗으며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그 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그  기쁨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에서 나리라(16-19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을 희망하고 믿고 의지하는 자는 금세 사라져 버립니다. 16절에 나오는 동산은 누가 울타리를 쳐서 가꾼 곳을 의미합니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꾸신 곳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소의 원형입니다. 이것을 감안할 때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에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가 있을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동산, 즉 이스라엘에서 종교적으로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가지가 동산에 뻗어 있었습니다. 그 뿌리는 돌무더기도 뚫고 들어가 깊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뽑혔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11절에 나오는 왕골과 갈대가 외식하는 사람을 나타낸다고 하였는데 20절까지 문맥을 보면 그 말씀이 맞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나 믿는 척하는 사람, 즉 외식하는 사람도 교회에서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고 그 영향력을 크게 발할 수 있습니다. 이단도 그런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곧 뽑힙니다. 

    하나님 나라의 반전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20-22절)" 외식하는 사람과 반대되는 사람이 바로 순전한 사람입니다. 빌닷의 말은 욥이 외식하는 사람이 아니냐, 하는 것인데 욥은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욥에게는 웃음과 즐거운 소리가 채워졌습니다. 욥을 미워하는 자, 여기서는 그의 친구들이 그런 자들인데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욥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하나님께 벌을 받아 악인처럼 장막이 없어졌을 것입니다. 빌닷은 욥이 외식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 말을 했으나 반전은 망해서 앉아 있는 욥이 순전한 자였고 아직 복을 유지하고 있는 빌닷이 오히려 악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반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그 말이 자기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글이 유익하셨다면 구독과 공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