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욥기 6장 1-30절 | 엘리바스의 말에 대답하는 욥, 정당성을 더 강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음

2023. 11. 9. 10:35성서유니온 매일성경/욥기


욥기 6:1-30

찬송가 86장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


 

욥의 괴로움이 얼마나 무거운지

엘리바스의 말에 욥이 대답합니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25절)" 욥은 엘리바스의 말이 옳은 말이라고 합니다. 그 내용이 옳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욥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옳은 말이라고 다 선하지는 않습니다. 욥은 자기 괴로움이 얼마나 큰 가를 한탄합니다.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1-2절)" 여기서 파멸은 재앙, 재난이라는 뜻입니다. 욥의 괴로움과 그가 당한 재앙을 저울에 달아볼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 무거울 것이라고 합니다. 욥이 느끼는 괴로움은 그토록 무겁고 컸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다는 것은 말이 빠르게 나갔다는 뜻입니다. 경솔하다는 말의 원어는 루와(לוּעַ)입니다. 이 말은 삼키다라는 뜻입니다. 삼킨다는 말에서 함부로 말한다는 뜻이 파생되었습니다. 또한 충격을 받아 휘청거리다, 말을 더듬다라는 뜻도 가집니다. 그러므로 말이 경솔했다는 말은 함부로 말했다는 뜻이 아니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말이 빠르게 나가면서 말을 두서없이 더듬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공기로 가득찬 풍선에 압력을 가해서 누르면 풍선이 펑하고 터지듯이 욥을 누르는 그 고통의 압력과 무게가 너무 커서 욥의 입에서 말이 빠르게 나간 것입니다. 욥은 자기 말을 듣고 그 말을 잡고 욥을 죄인인 것처럼 말하는 엘리바스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것 같습니다.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26절)"

하나님께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의뢰함

욥은 자기가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4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화살을 쏘셔서 자기에게 박혔다고 합니다. 자기의 영이 하나님의 독을 마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을 적으로 간주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셨으니 이 고난을 끝내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하나님께 자기의 소원을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9절)" 욥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 생명을 해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에는 그런 권한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생명을 거두시기를 소원하여 구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렇게 죽는 것이 오히려 자기에게 위로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10절)" 욥은 구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비참한 상황에 빠져 있으면서도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기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찬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행했지만 자기도 놀랐을 것입니다. 자기의 믿음이 자기에게도 증명되었습니다. 욥의 믿음이 참된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욥은 그 안에서 구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죽는 것을 소원함

욥은 고통 가운데 있지만 위로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들나귀가 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5절)" 엘리바스의 말 중에는 욥에게 위로가 되는 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들나귀가 풀이 없어서 우는 것처럼, 소가 꼴이 없어서 우는 것처럼 위로 받지 못한 욥은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6-8절)" 엘리바스의 말은 위로가 되기는 커녕 아무 맛이 안 나는 싱거운 것을 먹는 것처럼 역했습니다. 마치 꺼리는 음식물 같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려서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줄 것인가 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의 소원은 다른 것이 아니고 죽어서 안식을 얻는 것이었습니다(9-10절). 

기다릴 기력도 없음

엘리바스는 욥을 위로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욥은 자기는 기다리거나 참을 기력이 없다고 합니다. "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쇠겠느냐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11-13절)" 욥은 지금 누구보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엘리바스가 말한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욥이 당한 고통이 너무 막심하기 때문에 욥은 믿음을 지키는데 모든 기력을 다 쏟고 죽을 것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그에게 희망을 가지라는 것은 위로가 안 되었습니다. 오히려 가혹하게 느껴지는 말이었습니다. 

 

매일성경 | 욥기 6장 1-30절 | 엘리바스의 말에 대답하는 욥, 정당성을 더 강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음

엘리바스의 말은 욥에게 위로가 되지 못함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14-15절)" 그러면서 엘리바스의 말에 동정이나 사랑이 없음을 한탄합니다. 사막의 개울은 금방 지나가고 마릅니다. 그들이 그런 개울처럼 변덕스러워서 그냥 지나가고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함을 탄식합니다. 혹시 사막에 추위가 닥쳐서 개울이 얼어있어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금방 마른다고 합니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추어질지라도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대상들은 그들의 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16-20절)" 그렇게 쉽게 마르는 물을 의지하는 사람은 낭패를 당합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대상들, 데마의 떼들, 스바의 행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그런 사람들이 어리석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친구들의 위로가 헛되고 의지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당시 일어나는 일에 비유한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섣부르게 판단하는 이유

욥은 친구들의 마음을 간파합니다. 친구들은 욥이 당한 고통을 보면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21절)"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적의 정체를 모르면 더 두려운 법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면 두렵지 않습니다. 해결책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바스가 욥이 죄를 지어서 그렇게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냐라고 하는 것은 욥이 당한 환난의 정체를 빨리 정의내리려는 시도입니다. 왜 그렇게 하였느냐 하면 두렵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자기들도 그런 화난을 당할까 너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섣부른 진단는 더 큰 화를 부릅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자초지종을 듣지도 않고 섣부르게 욥이 당하고 있는 환난만 보고 판단한 우를 범했습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랑과 두려움은 반대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은 사랑의 말이 아니고 두려움의 말이었습니다. 

망했다는 것 때문에 책망을 받는 욥

"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 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22-25절)" 이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욥이 뭐라고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말했습니다. 말 자체는 옳은 말이었지만 욥에게는 고통을 가중시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욥을 책망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책망 받을 일을 하지 않은 욥은 망했다는 것 때문에 책망을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위로하러 온 친구들은 욥에게 위로가 아니라 고통을 더 크게 안겨주고 있습니다. 

정당성을 더 강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음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 넘기는구나(26-27절)" 엘리바스의 말은 고아를 제비 뽑으며 친구를 팔아 넘기는 것 같은 말이었습니다. 욥은 고아보다 더 참혹한 처지에 들어가 있었는데 그런 욥을 꾸짖을 생각만 하니 그것은 고아를 제비 뽑는 것 같은 무자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자기의 정당성을 한층 더 강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28-30절)" 욥은 자기의 정당성을 한층 더 주장하기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다고 합니다. 욥이 망해서 재에 앉아서 기와로 몸을 긁고 있을지라도 이전의 욥과 지금의 욥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그는 의인이었고 지금도 그는 의인입니다. 지금의 욥이 오히려 더 깊은 사람입니다. 그 믿음이 연단을 받아 증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그의 겉모습만 보고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냐라고 했으니 욥은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는 고통 중에서 의를 주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