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욥기 7장 1-21절 |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은 시간이지만

2023. 11. 10. 10:11성서유니온 매일성경/욥기

목차


    욥기 7:1-21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고난이 끝나기를 바라는 욥

    욥은 고난의 끝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 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이 품꾼의 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1-3절)"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도 저녁의 쉼을 바랍니다. 품꾼도 삯을 기다립니다. 힘든 시간의 끝에는 쉼과 보상이라는 달콤한 시간이 있습니다. 욥은 지금 여러 달째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 고통이 언제 끝나서 달콤한 쉼과 보상의 시간이 다가올까 하며 욥은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밤은 고달픕니다. 밤에도 쉴 수 없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4절)" 질병에 걸리면 낮보다 밤에 더 아픕니다. 밤에 찾아오는 통증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뒤척인다고 합니다.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5절)" 욥은 쉴 틈 없이 아팠습니다. 종기 때문에 재에 앉아 있으면서 기와로 몸을 긁고 있으니 재가 온 몸에 묻었고 피부는 자꾸 터졌습니다. 이런 고통이 밤에는 더 심했습니다. 

    베틀의 북보다 빠른 시간

    "나의 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6절)" 욥은 자기 날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다고 합니다. 베틀은 옷감을 짜는 도구입니다. 옷감은 날실과 씨실을 어긋나게 엮어서 짭니다. 그럴 때 계속 왔다갔다 하는 것이 베틀의 북입니다. 북은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씨의 꾸리를 넣고 북바늘로 고정시켜 날의 틈으로 왔다갔다하게 해서, 씨를 풀어 주어 피륙이 짜지도록 하는 배같이 생긴 나무통" 베를 짤 때 보면 자꾸 위 아래로 왔다갔다 하는 것이 베틀의 북입니다. 욥의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왔다갔다 하는데 베틀의 북보다 훨씬 빠르게 간다고 합니다. 욥은 그렇게 빠르게 가는 시간 안에서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희망은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어떤 열매가 있다는 기대감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기가 고통을 당하는 그 시간이 어떤 열매를 거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은 다릅니다. 

    인생이 의미없는 것 같지만

    고통을 당할 때에는 인생이 아무 의미없이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베틀의 북이 왔다갔다 하면서 옷감이 나오는 것처럼 뭔가가 만들어집니다. 욥이 당하는 고통은 아무 의미없는 고통이 아닙니다. 뭔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는 고통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허송세월을 하는 것 같은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의미를 이루십니다. 베틀의 북이 왔다갔다 하는 것은 옷감을 짜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로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인생으로 선한 일을 이루십니다.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욥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자기가 모르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42:3 참조). 그런데 모르는 것을 말하는 중에도 그 안에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하루하루 가는 것을 베틀의 북에 비유한 것입니다. 베틀의 북은 헛되이 왔다갔다 하지 않습니다.  

     

    매일성경 | 욥기 7장 1-21절 |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은 시간이지만

    고통의 순간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음

    "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7절)" 욥은 자기 생명이 한낱 바람과 같다고 합니다. 고통의 무게는 무겁고(6:3) 생명의 무게는 한낱 바람처럼 가볍다고 합니다. 이 말은 아무도 욥을 귀하게 여기거나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욥의 삶이 사람들에게 중하게 여겨지지 않고 가볍게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자기의 시간이 허무하게 지나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교훈을 베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삶이 아니고 사람들의 꺼림을 받고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기가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하면서 희망이 없음에 대해서 탄식합니다. 고통의 순간에는 그 결말이 어떨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습니다.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가깝고 행복은 멀기에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8-10절)" 욥의 생명은 바람처럼 가볍기 때문에 그는 금방 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행복보다 죽음을 더 바라고 있습니다(15절). 죽음은 가깝고 행복은 기다리기 너무 벅차기 때문입니다(7절). 그러면서 자기 처지를 스올로 내려가는 인생에 비유합니다. 스올로 내려간다는 것은 죽는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는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의 집과 처소도 곧 그를 잊습니다. 이렇게 죽음은 인생을 허무로 돌아가게 합니다. 

    말로라도 고통을 호소하지 않으면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11절)" 여기서 불평은 원어로 씨아흐(שִׂיחַ)입니다. 이 말은 불평하다라는 뜻 외에도 노래하다, 말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욥이 자기의 괴로움을 계속 말하겠다는 뜻입니다. 말으로라도 자기의 괴로움을 토로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12절)" 여기서 바다와 바다 괴물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관리하시는 것들입니다. 바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인 혼돈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바다 괴물은 그 혼돈과 죽음을 초래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에 제한을 두시고 특별하게 관리하십니다. 욥은 이런 지식을 따라서 하나님께 토로하기를 자기가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세상에 해를 끼치는 존재도 아닌데 왜 이런 고난으로 자기를 지키시는가 토로합니다. 

    잘 때에도 영혼의 고통이 밀려옴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주께서 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13-14절)"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키시는데 어떻게 지키시냐면 밤에도 그냥 두시지 않고 두렵게 하심으로 지키신다고 합니다. 자면서 잠시라도 고통을 잊으려고 하는 순간 꿈으로 놀라고 환상으로 두려움이 임하는 것입니다. 욥은 육체적 고통도 큰 고통이지만 무엇보다도 영적인 고통을 크게 당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고통을 당하는데 욥이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잠시도 놓아두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욥은 그것 때문에 굉장히 숨이 막혔습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15절)"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뼈를 깎는 고통 같았습니다. 숨이 막혀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자기를 놓아달라고 간구합니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은 헛 것이니이다(16절)" 욥은 다시 한 번 자기의 시간이 헛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자기를 놓으시기를 구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손에서 놓여 죽으면 이 고통이 끝나리라 기대하는 것입니다. 욥이 그렇게 구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믿음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고통 중에 신음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변치 않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17-18절)" 욥은 사람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사람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가만두시지 않으시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욥은 고통 중에서 인생의 의미를 다시 깊게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고 다루시는지를 뼈속 깊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20절)" 하나님께서는 욥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욥을 붙들고 계시는데 침 삼킬 동안도 놓지 않으십니다. 욥은 그것을 고통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고통스러우나 평안하나 모든 순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붙들고 계십니다. 고통의 순간에 그것을 더욱 현저하게 느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그렇게 붙드시고 놓지 않으시는 것은 고통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그 끝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거기까지 사람의 의식이 확장되고 하나님을 아는 깊이가 깊어지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 때문에 더 고통스럽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 끝을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당할만한 시험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어찌하여라고 부르짖는 욥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20절)" 욥은 자기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느냐고 반문합니다. 사람의 죄는 그 사람을 죽입니다. 하나님께는 해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죄 때문에 무력하게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두고 보실 수 없으셨습니다. 사람의 범죄는 사람만 죽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범죄는 하나님께 심각한 해를 끼쳤습니다.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무한 고통의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욥의 고통은 그러한 예수님의 고통과 닮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욥이 당하는 고통은 그의 죄에 상응하는 고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예수님처럼 "어찌하여"라고 부르짖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21절)" 욥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이런 극심한 고통을 받아야 하는 그 이유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이나 어찌하여라고 하면서 부르짖습니다(20-21절). 그러면서 허물을 사하여 주시고 죄악을 제거해 주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지금의 욥에게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고 계십니다. 그것도 몇 달 동안 그렇게 욥을 고통 가운데 가두어 놓으셨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욥은 하나님께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글이 유익하셨다면 구독과 공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