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호세아 11:1-12 |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2024. 11. 29. 21:30성서유니온 매일성경/호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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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호세아 11:1-12

    찬송가 570장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


    10장과 11장 맥락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징계를 선언하셨습니다(10:10).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계는 만민이 모여서 그들을 치는 것입니다(10:10 하). 그들은 여호와를 찾아야 했지만(10:12) 스스로를 믿고 의지했습니다(10:13). 그 결과는 내부로부터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10:14). 다른 것이 그들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우상 숭배가 그들을 망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10:15). 즉 자기의 죄가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렘 31:30). 

     

    이제 11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들로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1절). 이스라엘은 언약을 파기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8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뜻하신 것은 10장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최족 목적은 회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망하여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신다고 하십니다.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9-11절). 

    내가 사랑하여

    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는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는데 그들을 아들로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4:22).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을 애굽 왕 바로가 보내주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4:23).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셨습니다.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기 때 헤롯의 위협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을 가셨다가 돌아오셨습니다. 그 사건을 가리켜서 마태는 오늘 본문인 호세아 11장 1절을 이루신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마 2:15).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당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당하시는 일의 모형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미가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애굽에서 불러내셨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돌아오기는커녕 그들은 점점 멀리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서 바알을 숭배했습니다(2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들로 양육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릴 때에 걸음을 가르치고 당신님의 팔로 안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각종 제도를 세우시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치시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기틀을 세워 잘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발전하면서 그들은 우상 숭배로 확 치우쳐갔습니다.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우상은 헛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무지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무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줄로 그를 이끄셨는데 이 줄은 사랑의 줄이라고 하십니다(4절). 이것은 마치 가축을 그 주인이 이끄는데 주인이 가축을 사랑하여 이끌듯이 그렇게 이끄셨다는 뜻입니다. 이 주인은 너그러워서 그 가축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셨습니다. 멍에를 벗기시고 그 앞에 먹을 것을 두셨습니다. 10장 11절에 나오는 타작 마당에 잘 길들인 암소처럼 대접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이런 세심한 사랑과 배려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으면서도 배은망덕하여 우리를 뛰쳐나가려고 했습니다(5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5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그런 모습은 마치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려고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애굽을 의지했습니다. 또한 앗수르를 의지했습니다. 지금 주인이 자기를 얼마나 귀하게 대접하는지 모르고 자꾸 우리를 뛰쳐나가려고 한 것입니다(4, 5절). 그 결과는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되는 것입니다(5절 하).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니까 칼이 임합니다. 칼이 성읍들을 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빗장을 깨뜨리고 무서운 정벌을 받은 것은 "그들의 계책" 때문입니다. 여기서 계책이라는 말(מוֹצָאָה)을 직역하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꾸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까 칼이 그들을 삼키게(אָכַל) 된 것입니다. 

     

    그들은 끝끝내 하나님에게서 물러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을 듣고 일어나는 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7절).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싫어하여 하나님에게서 떠나갔던 이스라엘은 결국 칼로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멍에를 메고 비참한 노동을 하는 압제를 받게 된 것입니다(10:11).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10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11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렇게 뛰쳐나간 에브라임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야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8절).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들을 붙드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가 불심판을 받아 무너질 때에 함게 무너진 도시들입니다(신 29:23).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 즉 이스라엘을 그렇게 멸망 가운데 방치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하나님의 마음이 돌이키고 하나님의 긍휼이 불붙듯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돌이켰다고 하는 말(הָפַךְ)은 물리적으로 돌았다는 뜻입니다. 즉 일관되게 가던 길을 돌아서 가는 모양을 뜻합니다. 마음이 돌았다고 하심으로 마음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던 마음, 심판을 내리시던 마음이 바뀌셔서 긍휼의 마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님의 마음의 변화를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상황에 따라서 마음을 이리 저리 바꾸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셨기 때문에 상황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신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마음이 바뀌셨다고 하시는 것은 마치 아버지가 자식의 곤란한 형편을 보고 징계를 내리던 마음이 바뀌어서 긍휼의 마음이 되는 것과 같다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내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어서 진노에서 긍휼로 전환하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마음을 바꾸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긍휼을 우리에게 내리시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시고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십니다(9절).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이십니다. 즉 그들 가운데 계시는 거룩하신 분, 즉 사람과 다르신 신, 하나님이시기에 진노를 내리시지 않으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앞에서 마음을 바꾸셨다고 말씀하셨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 아니시고 계획하신 대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은 에브라임이 진노 가운데 멸망 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돌이키는 것입니다(10절). 

     

    하나님께서는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서쪽에서부터 떨며 올 것입니다(10절).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애굽으로 피신 갔던 자들도 돌아오고 앗수르로 잡혀 갔던 자들도 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은 떨며 올 것인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떤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에 두려워하면서 떤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맛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엄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체험적으로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이지 그들이 망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자처럼 소리를 내신다고 하는데 사자의 소리는 멀리서도 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멀리 있는 자들도 그 소리를 듣고 돌이킬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계시록 5장 5절은 예수님을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비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백성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11절). 여기서 그들의 집은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땅입니다. 사람이 어디에서 나서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는 질문에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시고 은혜가 풍성하신지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이 가장 복된 곳임을 깨닫습니다. 

     

    11절은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로 끝맺습니다. 여호와는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뜻하신 바는 반드시 이루신다는 뜻이 "여호와"라는 이름 안에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11절까지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마치 어떤 서류에 이름으로 서명을 하듯이 서명을 하신 것입니다.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12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선지서는 여러 곳에서 회복을 약속한 다음 다시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문체를 사용합니다. 12절은 그들의 현 상황을 다시 지적합니다.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하나님을 에워쌌습니다. 즉, 사람은 항상 이렇게 하나님께 거짓된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유다는 정함이 없습니다. 조금 나은 유다도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이렇게 갈팡질팡합니다. 믿을 이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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