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5. 07:00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호세아
목차
호세아 6:1-11
찬송가 446장 주 음성 외에는
5장 마지막 문맥
5장 마지막에서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과 유다를 탈취하시기를 사자가 사냥감을 움켜가는 것처럼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5:14). 그렇게 하시고 사자가 자기 굴로 돌아가듯이 당신님의 장소로 돌아가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5:15). 이어지는 6장에서는 회개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매로 치시고 약을 발라주시는 아버지처럼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1절은 "오라(לְכוּ֙)"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오는 말이 "우리가 돌아가자(וְנָשׁ֣וּבָה)"입니다. 이 말은 5장 15절의 하나님께서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אָשׁ֙וּבָה֙)"라는 말씀과 상응합니다. 동사 두 개가 똑같이 나옵니다. 그 동사는 가다라는 뜻의 할라크(הָלַךְ)와 돌아가다라(שׁוּב)는 뜻의 슈브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가시고 당신님의 장소로 돌아가신 것처럼 자기들도 길을 가서 자기들의 장소로 돌아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머물러야 하는 곳은 바로 여호와 앞(אֶל־יְהוָ֔ה)입니다. 이 장면은 마치 아버지에게 매를 맞은 아들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서 계신 방으로 가서 자기 잘못을 고하는 장면과 같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자와 같이 찢으시고 움키셨지만 본래 그것은 여호와께서 뜻하신 바가 아니라,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니 여호와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가면 도로 낫게 하시길 것이고 상처에 약을 바르고 싸매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식이 징계를 당한 후에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하신 것이라, 이렇게 깨닫고 아버지에게 나아가는 모양입니다.
이틀 후에, 셋째 날에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세아는 단계적인 회복을 말씀합니다. 이틀 후에 자기들을 살리시고 셋째 날에 자기들을 일으키신다고 합니다. 이런 단계적인 회복은 에스겔 37장에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는 장면에도 나옵니다. 먼저 마른 뼈가 살아나고(겔 37:7-8) 그 다음에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갑니다(겔 37:10). 그렇게 해서 그들이 극히 큰 군대가 됩니다.
이런 두 단계의 회복은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먼저 유다는 고레스 왕 때 포로 신분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처음 회복입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 오시고 믿는 자들에게 성령님이 내려 오셨습니다. 이것이 둘째 회복입니다. 천국도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천국이 이미 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극치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천국이 극치에 이르고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들의 죽은 몸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두 단계의 회복을 말씀합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이 말씀이 충만하게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말씀이 부활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43쪽).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징계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단시일 내(短時日內)로 회복하실 것을 가리킨 듯 하다. 곧,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 갔던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놓여나서 돌아오게 될 것을 의미한 듯하다. 그러나 퓨세이(Pusey)는, 이것이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말씀이라고 한다. 반 켈데렌과 키스펜(Van Geldren En Gispen)은, 이것이 간접적으로 확실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켰다고 한다.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의 재생(再生)은 그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배경으로 하나니, 여기 이른바,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라"라고 한 말씀이 그 뜻이다.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합한 충만한 생(生)을 이름이다.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 서서 살까? 그는 생명이 충만한 자이다. 이 말씀을 보아서도 상반절(上半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킨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사셨으므로 그를 믿는 자들이 살게 되었다(요 14:19).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강하게 추구하자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여호와 앞에서 사는 것은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요 17:3). 3절은 "그리고 우리가 알자(וְנֵדְעָ֣ה)"로 시작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사는 것은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안다고 할 때 그 모양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강하게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얼마나 아름다우신지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져서 그 지식을 강하게 추구하고 나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의 원어를 직역하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향해서 좇아가자(נִרְדְּפָ֗ה לָדַ֙עַת֙ אֶת־יְהוָ֔ה)"입니다. 여기서 좇아가다라는 말(רָדַף)은 "추격하다, 뛰어서 따라가다"라는 말로 강한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여호와 앞에서 사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 앞에서 사는 삶이 무엇이냐 할 때에 그 삶은 바로 여호와를 아는 삶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강하게 추구하는 삶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아름다우신지, 그 공의와 사랑이 얼마나 신비한지, 등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알아도 알아도 더 알고 싶고 더 깨닫고 싶어집니다. 한 번 알고 끝이다, 또는 복음을 들어서 아니 이제 됐다, 또는 주일에 한 번 말씀을 들었으니 이제 6일 동안은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살겠다,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끝이 없는 이유는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라는 말씀에 담겨있습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 아침이 밝을 때 빛이 비추듯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은 무한히 계속됩니다. 그것은 적당한 때에 내려서 땅을 적심으로 풍성한 소출을 얻게 하는 이른 비(גֶּשֶׁם 파종을 위해 겨울에 내리는 비)와 늦은 비(מַלְקוֹשׁ 추수 전 봄에 내리는 비) 같습니다. 여기서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신다는 말씀은 속죄의 은혜를 베푸시고 그 다음으로 성령님을 부어주셔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뜻도 됩니다(욜 2:23, 28 참고).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4절부터는 하나님의 책망이 나옵니다. 이 책망은 문맥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선지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문체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44쪽).
4절부터는 위의 말씀과 아무런 문맥상 연락이 없이, 이스라엘의 고치기 어려운 죄상(罪相)을 진술한다. 그러나 사상적(思想的)으로 여기에 나오는 말씀들이 그 순서에 있어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선지자들은 흔히 장래의 소망을 말한 뒤에 그 상대한 민중의 현실에 돌아와서 책망하는 일이 많다. 이사야도 그렇게 장래의 소망을 말씀하고서(사 2장) 민중의 죄악을 꾸짖었다(Pusey).
앞에서 에브라임과 유다, 즉 하나님의 백성은 찢기고 상한 상태로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매를 맞고 뉘우친 모양으로 아버지께 나아가듯이 그렇게 나아간 것입니다(1절). 그런 백성들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마치 아버지께서 자식을 보면서 탄식하시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에브라임와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이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너희가 도로 낫고 고쳐지겠느냐,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 아무런 방도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탄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탄식은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탄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회복시키실 뜻과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고치시고 그들에게 성령님을 부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만 택하신 백성이 죄 때문에 상하여 하나님께 돌이켰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가슴을 치시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사람이 고통 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함께 탄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라고 탄식하신 것은 그들의 인애가 너무 쉽게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인애는 원어로 헤세드(חֶסֶד)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헤세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44쪽).
여기 이른바 "인애"는 히브리 원어로 케세드(חֶסֶד)이니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사람을 사랑함이다(Keil & Delitzsch). 이 "인애"야말로 신자가 하나님을 위하여 가질 경건의 시금석(試金石)이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모든 다른 덕행들을 거론(擧論)함보다 이 한 가지를 그 강령으로 든다. 이스라엘은 그 경건에 있어서 너무도 견실성이 없다. 그들은 극히 피상적(皮相的)이었다. 그들의 경건은 아침 구름이 태양의 올라옴과 동시에 급히 사라지는 것과 같이 천단(淺短)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람 수준의 인애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또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이란 정말 얕고 짧은 것입니다. 사람의 수준이 그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부으셨습니다.
치고 죽였노니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으시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죽었음을 인식하고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라고 할 때 쳤다는 말(חָצַב)은 "잘랐다, 새겼다"라는 뜻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말을 가리켜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훈련시키신 것이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45쪽). 이렇게 볼 수도 있지만 이 말은 쳐서 죽였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옛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이 말에서 "내 심판"은 원어로 "당신의 심판들"입니다. 여기서 심판이라고 번역된 말은 재판, 또는 정의라고 번역되는 미슈파트(מִשְׁפָּט)입니다. 이 미슈파트는 하나님의 의가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 적용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현이 되는데 특별히 사람들의 옛사람이 죽음으로, 그렇게 해서 그들이 회개함으로 구현이 됩니다. 그것은 마치 빛이 앞을 비추며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사람이 그렇게 회개하고 성령님을 받으면 참된 사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인애, חֶסֶ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랑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생제사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사람 수준에서 드리는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번제도 원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이것도 사람 수준에서 드리는 것, 비록 그것이 그 사람 전부를 불살라 드리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사람 수준의 것은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깊이 깨달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실상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요일 4:8).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친밀한 교제를 원하셨습니다.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도 친밀한 교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 깊이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깨달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은 생명임을 깨달았어야 합니다. 그 생명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깨달아 알아서 하나님을 아는 것임을 깨달았어야 합니다.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경작하게 하시고 각종 나무의 모든 실과를 주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금하신 것은 아담과 교제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깊으신 뜻을 깨달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강하게 추구하면서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고 하나님을 알아갔다면 그는 선을 누리면서 선악을 구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죄를 범함으로 악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 반역을 범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도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에덴, 즉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풍요를 누리면서 살았지만 하나님 말씀을 깊이 셍각하고 깨닫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기쁨을 누리지 못하니까 다른 기쁨을 찾아서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께 반역을 범했습니다. 그렇게 반역을 범하면서 자꾸 희생제물을 가져오고 번제를 드렸습니다(6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길르앗과 세겜과 제사장
8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9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8절의 길르앗은 도피성 중 하나입니다. 그 성은 제사장들의 도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성은 제사장에 의해서 참된 보호가 있어야 하는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 되었습니다. 억울한 죽음이 계속되는 고을 즉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찬 고을이 되었습니다. 9절에 나오는 세겜도 도피성입니다. 이곳의 제사장들도 살인을 범하는 강도 떼처럼 행동했습니다.
이렇게 도피성 두 곳을 말하는 것은 제사장들의 죄를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6절). 이 말씀을 이루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자기 직임에 충실했다면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백성에게 부지런히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자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자기 직임을 수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해서 자기 직임과 반대로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해서 자기들이 거하는 곳에 사랑(인애)이 가득하게 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피 흘림과 살인과 사악이 가득하게 했습니다.
심판과 회복의 동시성
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11 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가증한 일은 우상숭배입니다. 이 우상숭배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인해서 행해졌습니다. 여로보암은 제사장을 아론의 자손에서 택하지 않고 일반 사람들 중에서 택해서 세웠습니다. 그들은 자기 직임이 어떠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 우상 숭배를 자행했습니다. 그렇게 에브라임은 음행했습니다(10절). 나중에 그들의 종교는 바알 신앙과 혼합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어 철저하게 더러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유다에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어떤 때와 연관됩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키실 때입니다. 사로잡힘을 돌이키신다는 것은 회복시키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추수라는 것은 심판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는 심판이 정해진 때인데 회복의 때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신비를 나타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무한 진노를 쏟으신 심판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십자가는 온 이스라엘의 죄가 다 사해진 회복의 현장입니다. 이 말씀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글이 유익하셨다면 구독과 공감(❤️) 부탁드립니다.
'성서유니온 매일성경 > 호세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일성경 | 호세아 5장 1-15절 | 스스로 속는 자의 비극, 좀과 썩이는 것과 사자 (5) | 2024.11.24 |
---|---|
매일성경 | 호세아 4장 1-19절 | 이스라엘의 심각한 사회상과 제사장들의 죄, 그리고 우상숭배 (6) | 2024.11.23 |
매일성경 | 호세아 2장 14절 - 3장 5절 |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6) | 2024.11.22 |
매일성경 | 호세아 2장 1-13절 | 하나님께서 가시로 길을 막으실 때 (4) | 2024.11.21 |
매일성경 | 호세아 1장 1-11절 |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 이 이름들에 담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1) | 2024.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