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 호세아 5장 1-15절 | 스스로 속는 자의 비극, 좀과 썩이는 것과 사자

2024. 11. 24. 07:00성서유니온 매일성경/호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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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호세아 5:1-15

    찬송가 274장 나 행한 것 죄뿐이니


    4장 문맥

    하나님께서는 4장에서 이스라엘의 사회상을 지적하셨습니다(4:1-3). 이스라엘 사회가 극도로 악해진 이유는 제사장이 타락했기 때문이었습니다(4:4-10). 제사장은 평소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쳤어야 했지만 그 직임을 잘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지식이 없어 망하게 되고(4:6) 우상 숭배에 빠져들었습니다(4:11-18).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4:17-19). 그들을 그냥 버려두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 것이었습니다(4:17, 19). 

    그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1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들으라고 하십니다. 원어를 보면 제사장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특정한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리키는 제사장들은 4장에 나오는 제사장들인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자기 직임을 세속직업처럼 생각한 제사장들입니다. 이스라엘이 범한 우상 숭배의 죄악은 이들에게 먼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 제사장들아" 들으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스라엘 집과 왕의 집은 깨달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깨달으라는 말(קָשַׁב)은 "귀를 기울이다, 주의를 집중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바로 "귀를 넓히다, 잘 듣다"라는 뜻의 말(אָזַן)이 나옵니다. 주의를 집중해서 잘 들으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회는 제사장도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거기에 말씀에 주의를 집중하라고 해야 하고 또 잘 들으라고 해야 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말이니 잘 들으라는 뜻이기도 하고 이들이 말씀을 잘 못 듣기 때문에,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반복하는 것입니다. 

    미스바와 다볼

    여기서 왜 미스바와 다볼을 이야기하는지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38쪽). 

    "미스바"나 "다볼"은 새 사냥이 성행(盛行)되는 곳이다(Delitzsch). 이 문구는, 선지자 호세아의 시대에 제사장이나 왕족이 이슬아ㅔㄹ 백성에게 새를 잡는 올무나 그물처럼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뿌데(Budde)에 의하면, "미스바"와 "다볼"은 그 때에 이교화(異敎化)한 지방들이라고 한다(Van Gelderen En Gispen). 

    위의 어느 해석을 취하든지 그 때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백성을 종교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잘못 지도한 것만은 확실하다.

    살육죄

    2   패역자가 살육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그들을 다 벌하노라

     

    1절에서는 "올무"와 "그물"이 나왔습니다. 이 올무와 그물은 새를 잡든지, 아니면 짐승을 잡는 용도로 쓰이는 것들입니다. 2절은 그들이 짐승을 잡아서 그것들을 도살했다고 합니다. 살육죄라고 번역된 말(שָׁחַת)은 "파괴하다, 도살하다"라는 뜻입니다. 1절의 해석과 연결해서 보면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집과 왕의 집이 살육을 벌였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짐승을 잡듯이 백성을 잡아서 그들의 피를 흘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히 패역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나라에 공의와 정의와 인애를 뜻하셨습니다. 제사장과 지도자와 왕을 세운 것은 하나님 나라에 공의와 정의와 인애를 이루라고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심히 패역하여(שָׂטָן), 즉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과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행하여, 반역하여 백성을 살육했습니다. 그 죄에 깊이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וַאֲנִ֖י) 그들을 다 벌하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나"라는 인칭대명사를 쓰심으로 특별히 당신님께서 친히 벌하심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셨지만(מוּסָ֥ר) 그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벌하노라라는 말(מוּסָר)은 "꾸짖는다, 징계한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안다

    3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

     

    3절은 "나(אֲנִי֙)"로 시작합니다. 여기 인칭 대명사는 강조하기 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안다, 에브라임을!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숨기려고 했습니다. 금송아지를 섬기면서 그것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라고 거짓 선전을 했습니다(왕상 12:25-33). 그 거짓이 사람을 속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강조하시면서 "내가 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재차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음행은 그 속성상 은밀하게 진행됩니다. 그러면서 들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 속에 숨은 죄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딤전 5:24-25).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4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죄가 무서운 것은 그것이 그것을 범하고 있는 그 사람을 스스로 속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으면 하나님께 돌이킬 마음을 먹지 못하게 됩니다. 회개하지 못하는 이유는 음란한 마음 때문입니다. 음란한 마음은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여기 음란한 마음에서 마음은 원어로 루아흐(רוּחַ)입니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 "숨결, 바람, 영"이라는 뜻입니다. 이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기가 속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제일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곧 자기가 의롭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여호와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고 계시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는 항상 자기의 의로움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음행의 영이 떠나가기를, 정결한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면서 회개할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혹시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속고 있는 죄가 있다면 스스로는 깨달을 수 없으니 알려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밝히 알려 주실 것입니다. 알려 주실 때에 우리는 깨닫게 하심에 감사하며 바로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지적해 주신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응답했다

    5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

     

    자기가 의로운 줄 아는 사람은 교만합니다. 역시나 5절에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다고 합니다. 이 말을 직역하자면 "그리고 응답했다(וְעָנָ֥ה),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의 얼굴 안에서"입니다. 교만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것에 반드시 뒤따릅니다. 여호와를 아는 사람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높으심을 알면 자기 자신의 죄와 부정을 더 깊이 알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얼굴을 들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음행의 영이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고 감히 하나님께 얼굴을 듭니다(눅 18:11, 13 참조). 그것이 교만이 그의 얼굴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 죄에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넘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제사를 지내도

    6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
    7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

     

    그들은 자기들을 사로잡고 있는 음행의 영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아가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의"로 나아오는 교만한 자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잆어서 나아오는 사람들만 받아주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그 길"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여기 정조를 지키지 않았다는 말(בָּגַד)은 하나님께 숨기고, 하나님을 속이고 배반했다는 뜻(To act treacherously, to deal deceitfully, to betray)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와 함께 있는 듯했지만(בַּיהוָ֣ה 여호와와 함께) 여호와를 속였습니다.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나와서 제사한다는 것 자체가 여호와를 속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적법한 자식을 낳지 않고 아주 낯선, 이상한 아이들(בָנִ֥ים זָרִ֖ים)을 낳은 것입니다. 즉, 경건한 자손을 낳은 것이 아니고 전혀 경건하지 않지만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는 아주 이상한 자식들을 낳은 것입니다. 나중에 유대인들은 우상을 숭배하지는 않았지만 율법을 우상숭배처럼 지켰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가르침으로 아주 이상한 종교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안에서 눈이 어두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 당하도록 했습니다. 

     

    호세아는 "그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라고 합니다. 이 말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40쪽). 

    여기 "새 달"이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호데쉬(חֹ֖דֶשׁ)이니 칼빈(Calvin)은 이것이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문구의 뜻은 이스라엘이 단시일(短時日) 안에 망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델리취(Delitzsch)는 이것이 달마다 지내는 제연(祭宴, 제사 제, 잔치 연)의 때를 의미한다고 하였다(삼상 20:6, 29; 사 1:13, 14). 이 해석이 옳다면 저들의 외식적인 "새 달"의 예배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기는커녕 멸망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새 달은 새 시대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새 시대가 오면 그들이 행했던 외식이 가득한 제의와 성전 예배는 폐하여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성전을 폐하셨습니다. 그리고 주후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서 성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대교의 유산, 즉 구약 시대의 제의는 사라져버렸습니다. 

    기브아 라마 벧아웬

    8   너희가 기브아에서 뿔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나팔을 불며 벧아웬에서 외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

     

    7절에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게 삼키는 모양이 8절부터 이어집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그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40쪽). 

    "기브아"와 "라마"는 유다와 이스라엘과의 국경 가까이 있는(유다에 속한) 높은 지대로서 전쟁 신호(戰爭信號)를 하기에 적당한 곳들이다(수 18:28, 25). 그리고 "벧아웬"은 벧엘이니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장소이다. 

    "나팔"과 "호각"을 이 장소들에서 분 것은, 앗수르의 침략이 벌써 이스라엘 지경을 넘어서 유다에까지 범접(犯接)한 사실을 알려주는 신호이다.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 이것은 유다(베냐민은 남방 유다의 대표 족속)도 지금 침략을 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벌하는 날에

    9   벌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폐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반드시 있을 일을 보였노라
    10   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

     

    새 달에 있을 심판(7절)은 벌하는 날에 있을 심판(9절)입니다. 벌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폐할 것입니다. 7절은 이것을 가리켜서 "그들과 그 기업을 삼키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반드시 있을 일이라고 하십니다. 심판은 정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이셨습니다. 먼저 그 종 선지자에게 보이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10절은 유다 지도자들을 고발합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큰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19장 14절에서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신명기 27장 17절에서 그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이렇게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하시고 모든 백성은 아멘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유다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파수하여 드리지 않고 우상 숭배와 타협한 일이 있음을 가리킨다"고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40쪽). 이것을 현대 교회에 적용하면 진리의 경계표를 옮기는 것인데 이것도 큰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므로 

    11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받는도다

    12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11절에서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사람의 명령은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워 놓고 숭배하게 한 명령을 뜻합니다(왕상 12:25-33). 그 결과 그들은 학대와 재판의 압제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학대를 받았다는 것은 "압제를 당했다(עָשׁ֥וּק)"라는 뜻이고 재판의 압제를 받았다는 것은 직역하면 "정의가 깨어졌다(רְצ֣וּץ מִשְׁפָּ֑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뜻을 따르면 뒤따르는 결과입니다. 사람의 뜻이 겉으로 보기에는 선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을 따르다보면 정의가 깨어지고 압제가 성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유교적인 윤리 도덕을 강조하는 것이 이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가르치지 않고 도덕을 가르치기 시작하면 겉으로는 점잖고 멋있고 좋아보일지라도 신앙 생활이 메말라가고 성도들은 영적 활기를 잃어버리기 시작합니다. 율법주의가 그들을 누르고 압제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좀과 썩이는 것처럼 작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냥 무턱대고 주시는 분이 아니고 정해 놓으신 법칙에 따라서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선을 구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좋은 것 같으나 그것이 그 안에서 좀이 먹고 썩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선이 이루어지도록 정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좀은 천천히 파괴시키는 것이고(욥 13:28) 썩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41쪽). 

    앗수르로 가서

    13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셔서 고난을 당하자 에브라임은 자기의 병을 깨달았습니다. 유다도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습니다. 에브라임이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고쳐달라고 한 것은 역대하 28장 16-21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아하스가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도와 달라고 했는데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그에게 이르러 돕지는 않고 오히려 아하스를 공격했습니다. 고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처를 더욱 심하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야렙 왕이라는 것은 앗수르 말로 크다라는 뜻이라고 하면서 그저 큰 왕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고 박윤선 목사님은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41쪽). 

    사자 같고

    14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15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14절은 왜냐하면(כִּ֣י)으로 시작합니다.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도 고칠 수 없는 이유는 "내가(אָנֹכִ֤י)" 곧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에게 사자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위에서(12절) 좀과 썩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파괴하는 것이지만 사자는 대놓고 파괴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중적입니다. 먼저 안에부터 서서히 좀이 먹고 썩어갑니다. 그러다가 때가 이르면 노골적인 파괴가 일어납니다. 곧 앗수르가 침공해서 나라를 망하게 하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가는 것입니다(움켜 갈지라 ... 탈취하여 갈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질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죄를 뉘우칩니다. 뉘우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15절을 직역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걸어갈 것이다. 나는 돌아갈 것이다. 나의 장소로" 그렇게 하고 뒤에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 까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장소로 돌아가신다는 것은 마치 사자가 움키고 탈취한 후에 자기의 굴로 돌아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전적부패와 전적무능

    사람은 좀이나 썩이는 것이 안에서부터 파괴할 때에는 눈치채지 못하다가 갑작스럽게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어리석음이고 무능입니다. 하나님의 길에서 떠난 순간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해야 합니다. 그런 지혜와 영적인 감수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지혜와 영적 감수성이 있으려면 사람이 자신의 전적 부패를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전적 무능도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좀과 썩이는 것이 이미 기본값으로 내재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곧 자기 의가 없어야 하고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람의 지혜로 자기가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가장 위태한 지경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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