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2. 07:00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호세아
목차
호세아 2:14-3:5
찬송가 299장 하나님 사랑은
교회의 개혁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논쟁은 법정 다툼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이스라엘 나라를 뜻하는데 적용하자면 현대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자식들, 즉 신자 개개인은 교회가 음란해서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자꾸 교회 안에 있는 우상숭배를 제거해야 합니다(2:2).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합니다(Ecclesia Reformata semper est reformanda).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실 것입니다(2:6-13).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하나님께서는 앞 구절에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벌을 주실 때에 그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그것을 말씀했습니다.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2:7)" 그렇게 돌아온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타일러서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25쪽).
이것은, 애굽에서 모세로 말미암아 인도되어 나온 이스라엘이 광야를 경유할 동안 하나님의 교양(敎養)을 많이 받게 된 사실을 회상(回想)케 한다. 호세아 때의 이스라엘 나라도 모세 때의 경험과 같이 광야의 고생과 같은 체험을 통하여 회개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여기 이른바 "말로 위로하고"라는 말의 히브리 원어 띠빠르티 알리빠하(דִבַּרְתִּ֖י עַל לִבָּֽהּ)를 번역하면 "그 여자의 마음에 말했다"라는 뜻이니 곧, 위로한 것을 가리킨다.
"타일러"라는 말(פָּתָה)의 원 뜻은 "유혹하다, 설득하다"입니다. 여기서 "그를" 유혹한다고 하는데 "그"는 2장 13절, 바로 앞 절에 나오는 그녀를 가리킵니다. 즉 바알들을 따라갔다가 벌을 받은 이스라엘 나라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여성 명사로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바알들을 따랐다가 고난을 받음으로 비로소 하나님께 다시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제야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하는 것입니다(2:7). 그러므로 유혹하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시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과할 때 비로소 눈이 뜨입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는 눈이 생깁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칼빈을 인용해서 "진실한 신자들도 징계를 받기 전에는 지혜로워지지 않는다"라고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25쪽).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다우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이런 지혜는 그냥 얻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설득해 주셔야(פָּתָה) 얻어집니다.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하나님을 따라가서 거친 들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도를 다시 배운 후에(14절 해석 참조)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포도원을 먼저 주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는 눈이 생긴 다음, 하나님의 도가 구구절절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를 배운 다음에 포도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포도원은 산업과 그에 따르는 소득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분정하신 산업을 다시 받아 이룰 수 있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아골 골짜기로
그 때에는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문"이 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26쪽).
"아골 골짜기"는 길갈과 여리고 북편(北便)에 있는데(수 7:26),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간의 죄 때문에 패배(敗北)를 당하였다(수 7장). 이 지명(地名)은 여기서 은유(隱喩)로 사용되었으니, 이골 골짜기처럼 곤란케 될 이스라엘 나라로 (회개의 결과로) 소망의 문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리델보스(Ridderbos)는, 여기 아골 골짜기는 신약의 골고다를 연상(聯想)케 한다 하고, 그것이 십자가를 예표(豫表)한다고 까지 말한다(Van Geldern En Gispen).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아골 골짜기는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소망의 문입니다. 그 소망의 문으로 들어갈 때 택하신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속의 은혜에 무한 감사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26쪽).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곧, 이스라엘 나라가 그 때에(하나님께서 구속의 은혜를 베풀 때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감사히 받는 태도를 취하게 되리라는 말씀이다(Delitzch). 이것은, 신약 교회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태도를 예언한다. 이는 마치 모세 때에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은혜를 감사한 것과 같을 것이라고 한다(출 15장).
아골 골짜기는 실패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실패의 장소가 소망의 문이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죽이셨습니다. 피를 흘려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실패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놀라운 승리이자 성공입니다.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님을 가리켜서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0:7).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0:9).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응답합니다(요 10:4). 그렇게 어렸을 때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마치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셨듯이 구원 받은 백성은 예수님을 목자로 알고 응답하며 따라갑니다.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16절에서 "너"는 이스라엘 나라를 가리킵니다. 즉 지금 시대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는 어린 양의 신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향해서 나의 남편이라고 합니다. 16절은 교회 시대에 성취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 종교와 바알 종교를 혼합했습니다. 바알은 "남편", 또는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바알에게도 남편이라고 일컫고 여호와 하나님께도 바알이라고 하면서 주인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렇게 혼합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 그런 혼동은 더 이상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다른 것을 주로 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포로로 잡혀갔을 때부터 성취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포로로 잡혀간 것이 우상 숭배 때문임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 그들은 우상 숭배를 철저하게 금했습니다. 즉, 그들은 "바알들"을 섬기지 않고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만 섬겼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만 섬깁니다. 이 예언은 이렇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8절에 나오는 "그 날"은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이루어질 천국의 극치를 가리킵니다. 그 날은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이 사람을 해하지 않는 날입니다. 땅에서 활과 칼이 없어지고 전쟁이 없어지는 날입니다. 땅에 누워 있어도 전적으로 안전한(לָבֶֽטַח) 날입니다. 이렇게 볼 때 완벽한 안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그 어떤 곳에서도 완벽한 안전을 보장 받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19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그 날에는 우리 주님께서 이스라엘 나라와 장가 들어 영원히 사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나라는 계시록에 나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계 21:2).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어린 양의 신부입니다(계 21:9-10). 어린 양의 신부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너"는 우리가 소속된 보편 교회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교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공의
우리가 영원히 살 때에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צֶדֶק)와 정의(מִשְׁפָּט)와 은총(חֶסֶד)과 긍휼히 여김(רַחַם)입니다. 여기서 공의(צֶדֶק)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 정하신 바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에게서 모든 좋은 것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하십니다. 아름다우십니다. 그런 것들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공의입니다.
정의
정의(מִשְׁפָּט)는 공의가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에서 적용되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실생활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선하게 적용되어 드러나는 것이 정의입니다.
은총
은총(חֶסֶד)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마 약속하신 대로 그것을 주시는 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시는 이유는 그 백성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택하셨고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대로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하여 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롬 5:8).
긍휼히 여김
긍휼히 여김(רַחַם)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든 것을 체험하시고 아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연약함을 다 체험하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당하는 고통뿐만 아니라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외로움, 고독, 사랑, 등 모든 것을 체험적으로 아십니다. 이렇게 상대방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결혼 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남편으로서 아내의 모든 연약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능히 아내를 보호하시고 도우실 수 있으십니다.
진실함
20절에는 진실함(אֱמוּנָה)으로 장가 드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진실함은 "아멘(אָמַן)"과 동족어입니다. 즉, "믿을만하다, 신실하다"라는 뜻입니다. 신실함은 부부관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러한 신실함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곧 영생입니다(요 17:3). 여호와를 아는 것에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삶에서 풍성한 생명을 어떻게 누릴 수 있느냐, 곧 여호와를 앎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무한히 아름다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아는 여정은 무한히 아름다운 분을 알아가며 경험하는 극히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그 어떤 황홀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황홀한 여정인 것입니다.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21-22절은 응답한다는 말(עָנָה)이 반복됩니다. 이 응답은 15절에도 나옵니다. 15절에는 "응대하기"라고 나오는데 같은 단어입니다.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께 응답하면 놀라운 회복이 일어납니다. 그 회복은 여호와의 응답입니다. 여호와께서 응답하실 때에는 자연 만물에도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응답하십니다. 그러면 하늘이 땅에 응답합니다(21절 하). 그러면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합니다(22절). 이스르엘은 더이상 살육의 장소가 아니게 됩니다. 응답의 장소가 됩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26-27쪽).
"이스르엘"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벌하신 지명(地名)으로 이름 준, 이스라엘 나라의 별명(別名)이다. 1:4 해석 참조. 여기 이 이름이 관설된 이유는, 벌 받았던 자를 아주 버리시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역설(力說)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회개는 모든 것을 회복시킵니다. 특별히 죄로 망한 자리를 회복시킵니다. 저주를 복으로 바꿔버립니다. 자연 만물이 사람에게 호의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택한 백성을 위하게 됩니다. 회개는 이토록 좋은 것입니다.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23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그를 이 땅에 심고"라고 할 때 "내가 나를 위하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이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구원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긍휼히 여기지 않으리라 하실 때 괴로우셨던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실 때 기뻐하십니다.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실 때 마음 아파하셨던 하나님은 "너는 내 백성이라"라고 하실 때 크게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에 힘입어서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라고 응답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신약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로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백성 아닌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방이 구원을 받아 돌아온 것입니다(롬 9:24-26).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2장 23절에서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3장 1절에 아주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이런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호세아 선지자는 경험하여 알았습니다. 곧 그의 아내 고멜이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 여자를 여호와께서는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아픈 사랑인가를 몸소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건포도 과자를 즐긴다고 하는 것은 "바알 우상 종교의 마력(魔力) 있고 감성적(感性的)인 의식을 상징(象徵)한다"라고 박윤선 목사님은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29쪽).
"여호와의 엄숙한 종교는 평범하고 건전(健全)한 음식으로 비유되는 반면에, 우상 종교는 유흥(遊興)을 위한 음식으로 비유된다. 그런 것은 쾌락주의자들이 찾는다"(Hengstenberg).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언약 관계 안에서 택하신 백성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면서 그들에게 지극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택한 백성들이 자꾸 언약 관계 밖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 밖으로 나갔을 때에도 계속 복을 내린다면 그 영혼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아프시지만 그들에게 벌을 내리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하나님의 사랑하라는 명령에 호세아는 고멜을 다시 삽니다. 고멜이 스스로 어디에 팔렸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29-30쪽).
여기 관설된 그 여인의 가격은 너무도 염가(廉價)이다. 그것은 종(奴) 한 사람을 사는 가격의 반액(半額)이다(출 21:32; 슥 11:12). 이와 같은 낮은 가격(價格)으로 지불된 이유는, 그 여자가 지금은 다른 사람의 첩(妾)과 같이 되어 있어서 신분이 아주 종과 같이 천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혹설에 이 가격은 다만 예물(禮物)에 불과하다고 한다.
음란은 자기 가치를 스스로 낮추는 것입니다. 창녀와 합하면 그와 한 몸이라고 했습니다(고전 6:16). 마찬가지로 음란은 종의 가치에도 미치지 못하도록 사람의 가치를 낮춥니다. 우리가 주와 합하여 있으면 주님의 가치고 되지만 우상과 합하면 가증한 자가 됩니다. 무가치한 자, 땅도 그를 토하여 내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호세아는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해 주심은 하나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심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기심을 채운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만큼 택하신 자들을 애타게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무한히 값진 속죄제사로 우리를 속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됩니다.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3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세아는 고멜에게 부드럽게 말합니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따르지 말라라고 할 때 따르다라는 말(היה)은 그 뒤에 전치사 러(לְ)와 함께 나와서 "누구누구의 소유가 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는 말은 다른 남자의 소유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지 말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30쪽).
그는 그 여자에게 부탁하기를,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라고 한다. 그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 여자를 홀로 두고 부부관계(夫婦關係)를 아니하겠다고 한다. 그는 그 여자를 근신시킨다는 셈이다. 이것은 다음 귀절(4절)이 말한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각국에 분산(分散)되어 살면서 우상도 안 섬기고 또한 하나님도 참되이 섬기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살게 될 것을 가리킨다. 이 예언은 후에 그대로 성취되어, 유대 민족은 다른 나라에 사로잡혀 가고 종교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역사가 아타나고 말았다.
하야 동사(היה)가 러(לְ)전치사와 함께 나와서 소유가 되다라는 뜻이라고 할 때에 위와 같은 해석이 가능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위에서 말씀한 대로 이것은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근신시키신다는 뜻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이유는 4-5절에 나오는 말씀 때문입니다.
없고
4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4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뜻의 키(כִּ֣י)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호세아가 3절에서 말한 것의 이유가 4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에게 근신을 말한 이유가 4절이라는 것인데 4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다 없는 상태로 지낸다고 합니다. 실제로 바벨론의 침략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왕이 없어졌습니다. 지도자도 없어졌고 제사도 없어졌습니다. 왕과 지도자와 제사는 그들을 하나님께로 붙드는 것들입니다. 즉, 그들은 남편이신 여호와의 부재를 느끼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에게는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옷인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용할 때 경외함으로가 아니라 마술적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삿 18:18 참조). 그러므로 주상과 에봇과 드라빔은 다 우상과 연관된 것들입니다. 이것들이 없으니 곧, 이스라엘은 우상도 섬기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30-31쪽).
위의 말씀들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분산(分散)되어 외국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재래(在來)의 방식으로 섬기지 않지만, 우상도 안 섬길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왕국이 붕괴(崩壞)된 후 사실상 이 예언과 같이 되었다. 그들은, 포로되어 있는 시대에 우상이 그들을 구원하여 주지 못함을 경험하고 그것을 미워하였다(Delitzsch).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5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그렇게 근신의 기간이 끝난 다음에 이스라엘 자손은 돌아오게 됩니다(5절).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다윗을 찾게 됩니다. 실제로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메시아를 열렬히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다윗과 같은 메시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끝내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내어 죽게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마지막 날에 즉, 주의 성령이 내려오셨을 때 그들에게도 성령을 부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여호와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선하심으로 나아갔습니다(וְאֶל־ טוּב֖וֹ).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라는 말은 직역하면 "그의 선하심"으로 나아가리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됩니다. 이러한 무한한 선하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만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글이 유익하셨다면 구독과 공감(❤️) 부탁드립니다.
'성서유니온 매일성경 > 호세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일성경 | 호세아 6장 1-11절 |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강하게 추구하자 (1) | 2024.11.25 |
---|---|
매일성경 | 호세아 5장 1-15절 | 스스로 속는 자의 비극, 좀과 썩이는 것과 사자 (5) | 2024.11.24 |
매일성경 | 호세아 4장 1-19절 | 이스라엘의 심각한 사회상과 제사장들의 죄, 그리고 우상숭배 (6) | 2024.11.23 |
매일성경 | 호세아 2장 1-13절 | 하나님께서 가시로 길을 막으실 때 (4) | 2024.11.21 |
매일성경 | 호세아 1장 1-11절 |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 이 이름들에 담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1) | 2024.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