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1. 07:00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호세아
목차
호세아 2:1-13
찬송가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1장 문맥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1:2). 그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그 땅이 크게 음란했기 때문이었습니다(1:2 하). 그 땅은 언약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땅입니다. 그 땅에서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 목전에서 우상 숭배를 자행했습니다. 호세아는 그 사실을 원통해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즉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2:3).
세 자녀가 태어났고 하나님께서는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 둘째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 셋째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라고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르엘은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한 것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였습니다(1:4-5). 하나님께서는 호세아가 첫째 아들에게 이스르엘이라고 부를 때마다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을 자꾸 상기시키게 하셨습니다.
둘째 아이인 딸, 로루하마는 그 뜻이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호세아가 자기 딸에게 로루하마라고 부를 때마다 호세아는 그 마음이 많이 아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고 심판하신다고 하는 것은 여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셋째 아이인 아들, 로암미의 뜻은 "내 백성이 아니다"였습니다. 호세아가 자기 아들에게 로암미라고 부를 때에도 같은 심정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 아이는 내 아들인데, 내 아들인데, 이런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것이 메시지로 다가갔을 것입니다.
1장 10-11절에 나오는 회복의 메시지는 호세아의 이런 심정과 함께 터져나오는 메시지입니다. 거기에 보면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1:10)"라고 합니다. 호세아가 로암미의 이름을 부르면서 얼마나 "너는 내 아들이라"라고 하고 싶었을까요?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이 마음은 이스라엘 만이 아니고 모든 이방인들을 향한 마음이기도 했습니다(롬 9:26).
너희 형제에게는
1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하나님의 마음이 1절에 절절하게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고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암미는 "내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로암미, 즉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하셨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신 때에 너희는 서로를 "내 백성"이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서로를 향하여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야, 이렇게 부르라는 것입니다.
"루하마"는 긍휼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호칭은 "너는 긍휼을 입은 사람이야"라는 뜻입니다. 이 호칭은 하나님께서 회복시킨 것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들어있는 호칭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런 호칭에 이방인들이 포함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22쪽).
이 귀절은 앞장 끝에 있는 구원론(救援論) 말씀에 속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므로 성취되었다(롬 9:25, 26). 북국(北國) 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바벨론에 포로되었다가 돌아오지 못하고(유다의 두 지파는 돌아왔지만) 이방인들과 동화(同化)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들이나 이방 사람이나 다를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עַמִּ֑י)이 되는 운동은 이스라엘 열 지파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운동과 마찬가지이다.
이 말씀은 참으로 통찰력 있는 말씀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북쪽의 열 지파와 이방인의 경계가 혈통적으로 무의미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1:11)" 이 말씀 안에는 이방인이 자연스럽게 포함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이렇게 신비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이방인의 구원으로 귀결시키셨습니다.
음행을 제하게 하라
2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 그가 그의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2절은 불화하는 가정에서 있을 법한 말들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너희 어머니와 다투라고 합니다. 이 다툼은 법정적 다툼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이 다툼은 법적인 이혼을 그 이면에 포함합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너희 어머니와 다투라고 하는 가정의 자녀들은 참 비참합니다. 자녀의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버릴 수도 어머니를 버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은 자녀에게 마치 자기가 반으로 갈라지는 것과 같은 고통이 됩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그 안에 속한 백성들을 뜻합니다. 백성들 중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을 배반하여 음행하고 떠난 것에 동참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인데 그 중에는 그것을 심히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속은 깊이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이 시대의 교회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대 교회가 하나님만을 바르게 섬기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에게서 떠난 부분이 있다면 "그의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라고 자꾸 개혁을 선포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교회원들, 즉 자녀들을 잘 양육하면 좋겠지만 역사상 그렇지 않은 교회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럴 때에는 개혁자들이 나와서 교회를 개혁하며 나아갔습니다. 이런 개혁 운동은 역사가 끝날 때까지 일어나야 하는 운동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칼빈을 인용하면서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라는 말을 이혼 선고(離婚宣告)가 내린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그 가저으이 최대 비극이라고 합니다. 이혼은 그 가정에 태어난 자녀들에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23쪽). 교회가 바르지 못해서 갈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성도들이 얼마나 비참한지는 많은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또 보아서 압니다. 그 결과 유리 방황하는 성도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에 신자는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이렇게 유리 방황하던 신자를 교회는 어떻게 다시 잘 양육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이 시대 교회가 풀어야할 시급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그러려면 교회가 정말 바른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그 모습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는 모습이요 주님처럼 양들을 잘 돌보고 양육하는 모습입니다.
나던 날과 같게, 마른 땅 같이 되게
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그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4 내가 그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어머니의 음란을 자식이 그냥 보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음란을 보고 있는 자식은 결국 그들도 음란한 자식들로 판명되게 됩니다(4절). 이것은 비유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말씀인데 백성들이 나라가 우상숭배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2절에 나온 것처럼 다투고 자꾸 음란을 제고 하고 하지 않으면 결국 그 나라는 망한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생수를 얻지 못하는 갈증으로 목말라 죽게 될 것입니다(3절 하). 생수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기 때문입니다(렘 2:13).
3절에서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기 전과 같이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출애굽으로 탄생했는데 그 때로 돌아간다는 것은 다시 노예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죄의 노예 상태로 돌아가게 됨을 의미합니다. 또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이 말씀은 출애굽을 해서 광야 생활을 하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23쪽).
그러면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끝끝내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 중에서 은혜 가운데 장성하지 못하고 자꾸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고 반역을 일삼으면 유아의 상태, 신앙의 초보 상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즉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고전 3:1). 장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점점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생활하여 우리 주님께서 다스리심에 순종함으로 거룩한 나라, 공의로운 나라,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가득한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장성해 나가지 못하면 다시 돌아갑니다. 신자가 성령을 근심하게 하거나(엡 4:30) 심지어 소멸할 수도 있다(살전 5:19)는 것에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들을 붙잡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죄로 인한 고통에 넣으시고 모든 것이 핍절한 광야로 넣으시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5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죄가 무엇인지가 5절에 나옵니다. 그 죄는 음행의 죄인데 음행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에 좋은 것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 죄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생각하는 죄입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언약 관계의 특징입니다. 이 사랑은 독점적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 다른 이의 사랑을 더 크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이 죄의 시작입니다.
하와는 뱀을 아주 매혹적으로 여겼습니다. 뱀이 자기 마음을 알아준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우상을 숭배할 때 이런 일을 자행합니다. 우상 숭배를 더 쉽고 편리하게 느끼고 그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바알 숭배가 그런 것이었는데 성전에서 음행을 하면서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면 물질적인 풍요가 찾아온다고 하니 이것처럼 좋은 교리가 어디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사람을 사랑하는 종교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근래에는 각종 복지제도나 그 제도를 펼치는 나라를 그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자로서 주의할 것은 아무리 좋아보이는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면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를 따라가는 죄는 필연적으로 나에게 오는 좋은 것들을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 즉 자기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들에게 돌립니다.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음행의 죄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때에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더 알아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알면서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깨닫고 분별하고 생활 가운데에서 의를 추구하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삶, 즉 영생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제쳐두고 다른 것에서 좋은 것을 얻었다고 하면서 그것을 강하게 추구해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음행입니다. 신자는 이것이 부끄러운 일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부끄러운 것은 먼저는 신자로서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강하게 추구하고 있다는 것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신자는 이런 측면에서 염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을 막으며
6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신자가 그렇게 잘못 갈 때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으십니다. 근실하게 징계하십니다(히 12:7). 하나님께서는 먼저 가시로 그 길을 막으십니다. 그 다음으로는 담을 쌓으십니다. 그렇게 하셔서 거기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게 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 아닌 것으로 만족을 얻어가고 그것을 강하게 추구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길에 장애물을 놓으십니다. 가시가 생겨서 찌르게 하십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서는 돈을 강하게 추구하며 빨리 부자가 되려고 그 길로 나아가는 자들은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른다고 합니다. 이처럼 찔리게 하십니다. 신앙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몇 번 찔리면 그 길에서 돌이킬 것입니다. 그런데, 찔리면서도 거기를 굳이 계속 찾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앞에는 담을 쌓으신다고 합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담을 쌓아서 이리 저리 빙빙 돌게 하시는 것입니다. 목적이 있으나 그 목적에 이르지 못하게 하시고 빙빙 돌면서 계속 가시에 찔리게 하십니다. 무엇이든지 목적하는 바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이런 일을 겪게 됩니다. 이런 일을 겪을 때 내가 추구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를 자꾸 돌아보아야 합니다. 담을 쌓으신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고 깨닫게 하십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것에 이르지 못하게 하십니다. 맘몬을 하나님보다 높여 섬기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아무리 추구해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겪은 다음에야 사람은 "그제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라고 깨닫습니다(7절).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라고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에서 등장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7)" 이렇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돌아가지 못하면 영원히 잃어버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강하게 추구하는 것을 자꾸 얻게 되고 거기에 빠지게 되면 돌아가는 길이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그 지경까지 이르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참으로 큰 은혜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빼앗으리라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9 그러므로 내가 내 곡식을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며 내가 내 새 포도주를 그것이 맛 들 시기에 도로 찾으며 또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6-7절에 나온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가 8-9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사람들은 바알이 주었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바알은 농경의 신이었기 때문에 바알을 숭배하면서 그것을 바알에게 돌린 것입니다. 이것은 심히 심각한 죄입니다. 그렇게 바알에게 영광을 돌리면서 은과 금을 바알을 위하여 쓴다고 합니다. 이것도 심히 괴악한 죄입니다. 그렇게 죄를 짓는 것은 우상 숭배라는 죄로 눈이 가려져서 정당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적 능력이 심히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둠 가운데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상 숭배는 사람을 어두움으로 떨어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곡식과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특별히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시고 그것이 맛 들 시기에 도로 찾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추수 때에 이렇게 농작물(農作物)들이 파멸되게 하는 재앙은 더욱이 하나님의 징계인 줄 알려진다. 하필(何必) 잘 결실한 농작물들이 못먹게 될 것인가?"라고 주석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런 이상한 현상을 마주할 때에는 하나님의 징계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고도로 발전한 시기라서 모든 것을 돈 주고 쉽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 능력이 많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돈이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은 물건을 사는 가치 지불 수단일 뿐이고 실물인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항상 모든 좋은 것의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10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사랑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그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벌거벗게 되면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또한 사람이 먹지 못하고 파리하게 되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렇게 수치를 당할 때에 아무도 그를 건져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징계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능력 있어 보이는 우상도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실 때에는 다 무용지물이 됩니다. 맘몬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돈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실 때에는 그것을 달게 받을 뿐이지 그 무엇으로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희락과 절기와
11 내가 그의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희락을 주셨습니다. 희락은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과 연관됩니다. 이 모든 절기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참된 희락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얻어집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명절을 패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신다는 의미이고 그 결과 사람은 그 어디에서도 기쁨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제서야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만날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7절 하). 예수님을 다시 진실되게 의지할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를
12 그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에게 먹게 하리라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킬 수 없는 이유는 절기가 추수와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추수한 것이 없기 때문에 절기가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기에 임하는 기쁨은 추수의 기쁨인데 추수가 없으니 그 기쁨도 없습니다(12절).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추수의 기쁨은 곧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대한 기쁨입니다. 그런 복된 소출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교제하면서 영적인 기쁨을 누리는 것이 절기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생각할 것은 내가 받은 모든 물질적인 복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복을 영적인 복,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그에 따르는 기쁨으로 치환하지 않으면 물질적인 복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13 그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가 사랑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그에게 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십니다. 그러므로 혹시 죄에 빠져있었다는 것이 깨달아지면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돌이켜 달라고 진심으로 구해야 합니다. 13절은 특별히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가 사랑하는 자를 따라가서"라고 합니다.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사람 사이에는 이런 장식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워 보입니다. 그런데 언약 관계를 벗어나면 자꾸 자기를 꾸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에게 예뻐 보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게 예뻐 보이려고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그 관계가 조건적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부부관계나 부모자식 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꾸며도 예쁘고 안 꾸며도 예쁩니다. 꾸며도 내 자식이고 안 꾸며도 내 자식입니다. 그러므로 참 자유는 오직 주의 영이 계신 곳에만 있습니다(고후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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