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0. 07:00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호세아
목차
호세아 1:1-11
찬송가 423장 먹보다도 더 검은
호세아 서론
호세아는 저자의 이름을 책 이름으로 사용합니다(참조. 욜 1:1; 욘 1:1; 미 1:1; 습 1:1; 말 1:1). "호세아"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 뜻이고 이것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 이에수스 즉, 예수입니다.
호세아가 사역한 시대
호세아가 사역할 당시 유다의 왕들은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였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은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었습니다(1:1). 보통 여로보암 2세라고 부르는 그 왕입니다. 여로보암의 마지막 해는 주전 753년이고 히스기야의 마지막 해는 주전 687년입니다. 호세아의 사역 기간은 이 사이의 기간으로 추정됩니다. 호세아는 주전 8세기에 사역한 이사야와 미가와 같은 시대에 사역했는데 이들보다 연장자였을 것입니다.
호세아가 사역한 시기는 주전 8세기로 북왕국 이스라엘은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주전 8세기 후반에 앗수르에서는 디글랏빌레셀 3세(745-727년)가 왕이 됩니다. 그리고 그 왕을 이은 앗수르의 왕들은 100년 이상 동안 고대 근동에 앗수르의 지배권을 확장했습니다. 나중에는 애굽까지 앗수르에게 굴복시켰습니다. 그 때 최소한 여섯 번 이상 앗수르의 군대가 가나안 땅을 침공했습니다. 그렇게 외세의 세력이 위협을 가하는 동안 이스라엘은 극도의 정치적 혼란 가운데 있었습니다. 약 30년 동안 여섯 명의 왕이 바뀐 것입니다. 이런 시기를 앞둔 시점에 호세아가 사역을 했습니다.
호세아는 당시 바알 숭배에 빠져있었던 이스라엘을 향해서 거듭 그들의 죄악을 지적했습니다. 그들을 음녀에 비유했습니다. 그렇게 비유한 것은 바알 제의와 상관있습니다. 바알 제의는 매춘을 제의 안에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육체적 쾌락을 채우면 경제적으로도 번영한다는 바알 신앙의 가르침에 정신을 못 차리고 넘어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실제로 각종 음란과 포학을 행했습니다. 호세아는 그것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주님의 은혜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호세아서의 핵심 주제
호세아의 핵심 주제에 대해서는 ESV스터디 바이블을 직접 인용합니다(ESV스터디바이블, 1647-1648쪽).
1. 호세아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 기초인 모세 오경을 자주 언급한다(1:10, 2:9-10, 18, 4:3, 6:7, 9, 7:13, 8:4-6, 9:6-10, 14, 10:9-10, 11:1-4, 8, 12:2-5, 9-10, 12-13, 13:4-6, 15)
2. 호세아는 신적 주권을 강조하며 하나님은 이 책에서 거의 백 번이나 "나"라는 일인칭으로 말씀하신다.
3. 호세아의 개인적 전기는 여호와의 긍휼의 본보기가 된다(1-3장).
4. 이스라엘에 다가올 고립/강제 이주는 회복을 위한 수단이다(1:6-7, 2:!4-23, 3:1-3, 6:5-6:3, 11:8-11, 12:9).
여호와께서 말씀을 선지자에게 주시는 때
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남 왕국 유다의 왕, 웃시야는 주전 791년부터 740년까지 52년간 통치했습니다. 요담은 750년부터 736년(섭정 기간 포함), 아하스는 736년에서 716년, 히스기야는 716년에서 687년까지 통치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은 782년에서 753년까지 통치했습니다. 호세아는 이 시대에 선지자로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호세아의 사역 기간은 길게 잡으면 60-65년, 짧게 잡으면 약 35년 정도입니다.
호세아서는 "여호와의 말씀(דְּבַר־ יְהוָ֣ה)"으로 시작합니다. 사실 맨 앞에 나오는 말이 "말씀"입니다. 말씀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떼바르라고 읽습니다. 선지자가 예언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즉, 그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 정상궤도에서 벗어났을 때에 일어납니다. 평상시에는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 즉, 비상시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비상적 상황이 임하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합니다. 이것은 경고의 메시지로 임하는데 이것으로 우리는 여호와께서 온 세계를 통치하신다는 것을 배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 종 선지자에게 먼저 보이시고 행하시는 것입니다(암 3:7).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2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좀 충격적입니다. 그 말씀은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이유를 알려주시는데(כִּֽי) 그 이유는 그 땅(הָאָ֔רֶץ)이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 "이 나라"라고 번역된 말은 원어로 "그 땅"입니다. 그리고 이 땅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함께 거하시는 땅입니다. 하나님의 땅이고 하나님께서 남편이시고 주인이신 땅입니다. 그 땅에 거하는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크게 음란하기 때문에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에게 음란한 아내를 맞으라는 명령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주석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입장을 소개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17-18쪽).
하나님께서 그의 세우신 선지자에게 실생활(實生活)에 이런 불결한 결혼 생활을 명령하신 것은 아니고, 다만 그 명령의 내용과 같은 가상 생활(假想生活)을 예언으로 나타내는 것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Calvin)은, 이 명령과 및 호세아가 그대로 실천하였다는 이야기를 하나의 비유로 간주하였다. 그의 이론은 이렇다. 곧, 하나님의 사자의 가정이 깨끗하지 못하면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통하여 전파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벤 켈데렌과 키스펜(C. Van Gelderen En W. H. Gispe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음란한 아내"라는 말이, 히브리 원어로 에쉐트 제누님(אֵ֤שֶׁת זְנוּנִים֙)이니 이것은 직업적으로 음행하는 창기가 아니고, 다만 창기가 될 음란한 성질이 있는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면 호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직업적 창기와 결혼하라는 것이 아니고 창기될 성질이 잠재하여 있는 처녀와 결혼하라는 것이다. 그 여자는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아내를 취하라"라고 하신 것은, 그가 음란한 여자와 같은 인생들 중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심과 같은 크신 사랑을 비유한다. 그가 사랑으로 그렇게 택하시기는 하셨을지라도, 그 백성의 죄악을 징치(懲治)해 가시면서 필경은 그들에게 구원의 복을 주시도록 경륜하셨다(10, 11절).
이에 그가 가서
3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4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호세아는 즉각적으로 순종합니다. 그의 즉각적 순종이 히브리어 문법 와우연속법으로 나옵니다. 원어로 보면 "그리고 그는 갔다(וַיֵּ֙לֶךְ֙). 그리고 그는 취했다(וַיֵּ֙לֶךְ֙)." 이렇게 나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께 "어째서 그렇게 명령하십니까?" 또는 "불가합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도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고 통탄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호세아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3절). 그가 아들을 낳자 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그의 이름을 그렇게 지으신 이유(כִּי)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조금 후에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실 것이고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예언과도 같은 이름입니다. 이스르엘에게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그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18-19쪽).
여기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첫째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시고 그를 이스라엘 백성의 징벌 받을 표적으로 세우신다.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은, 그 어음(語音)이 영광스러운 이스라엘과 비슷하면서 뜻은 그것과 정반대의 내용을 가진다. "이스르엘"은 사람을 많이 죽인 지명(地名)이니(삿 4:13, 6:33, 7:1; 삼상 29:1; 왕상 21:16, 19; 왕하 9:10), 특별히 우상 섬기는 데 극단으로 힘쓰다가 징벌을 받은 아합과 그 아들들이 거기서 살륙을 당하였다.
그런데 여기 이상한 말씀은 우상을 섬기던 아합의 왕가(王家)를 징벌한 "예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그런 처벌의 실행자요 사역자였는데, 어찌하여 우리 본문은 그의 집이 역시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문제될 것 없다. 하나님께서 예후를 통하여 아합을 벌하셨으나 예후 자신이 후에 우상 종교를 다시 확립하였으니 만큼, 이제는 그를(예후를) 벌하실 밖에 없다. 하나님은 지공무사(至公無私)하시어 죄 있는 자를 반드시 벌하신다. 예후가 일시 동안만 아합을 징벌하는 도구(道具)로 하나님의 손에 사용되었으나, 후에 그 자신 역시 우상을 섬겼은즉 그는 하나님에게 도적과 같은 자이다. 그가 하나님에게 사용됨을 계기(契機)로 하여 필경은 자기의 사욕을 채우고 말았다. 칼빈(Calvin)은 예후를 영국 왕 헨리(Henry)에 비교하였다. 헨리 왕은 영국의 종교 개혁을 도와주었으나 로마교의 압제하는 세력을 벗어난 뒤에는, 그 자신이 로마의 법황 이상으로 부패한 짓을 하였고 진실한 신자들을 압제하였다고 한다(Minor Prohpets Vol. I, p. 50).
이스르엘에 흘려진 아합 가문의 피는 무고한 피가 아니었습니다. 그 피는 우상숭배의 죄와 나봇의 피를 흘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인 예후 가문도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러므로 예후가 아합을 죽이는 것이 의롭지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같은 우상숭배자가 우상숭배자를 죽인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후의 가문도 똑같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정확하게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는 이유는 우상 숭배 때문입니다(4절 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정확하게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그 일에 도구가 되는 것은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그 어떤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항상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신 32:35-36; 롬 12:19; 히 10:30).
그 날에
5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께서는 다가올 한 날을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크게 패할 것을 내다봅니다. 변변한 싸움 한 번 못하고 굴복하게 될 것을 예언하는데 이 말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왕하 15:19, 29, 16:7).
로루하마라 하라
6 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자 여호와께서는 호세아에게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지어주십니다. 로루하마(לֹ֣א רֻחָ֑מָה)는 두 단어입니다. 로와 루하마인데 로(לֹ֣א)는 "아니다"라는 부정을 의미하고 루하마(רֻחָ֑מָה)는 라함(רָחַם)에서 온 말로 "긍휼히 여기다, 체휼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을 향하여 자비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심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앞에 로가 붙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다짐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들을 향한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언제나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보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만큼 그들의 우상숭배의 죄가 극악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대상은 고멜의 딸 개인이 아닙니다. 그를 표적으로 세워서 호세아가 딸의 이름을 부를 때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마음이 동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그 딸을 얼마나 사랑스럽게 불렀을까요? 그런데 그 이름 뜻이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입니다. 이것은 큰 모순이요 역설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로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 그것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지를 호세아가 그 딸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백성들이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딸 개인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용서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7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족속과는 대조적으로 유다 족속은 긍휼히 여기시겠다(אֲרַחֵ֔ם)고 하십니다.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시겠다고 하시는데 "활이나 칼이나 전쟁이나 말이나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보통 일반적인 법칙 안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께서 세우신 일반 법칙 안에서 유다를 구원하셨다면 유다를 군사적으로 강하게 하셔서 앗수르를 물리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는 굉장히 비상한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동원하셔서 유다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일은 열왕기하 19장과 이사야 37장에서 성취됩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동원하셔서 유다를 구원하신 것은 그 구원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북이스라엘이 멸망 당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얻지 못하고 멸망 당한 것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겠다, 구원하지 않으시겠다, 이렇게 다짐하셔서 일어난 일입니다. 보통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호세아가 자기 딸을 사랑하듯이 여호와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귀하게 보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의를 저버렸습니다. 그만큼 음란하게 우상을 숭배했던 것입니다.
7절에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은 화자(話者)이신 여호와와 다른 여호와를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20쪽).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בַּיהוָ֣ה אֱלֹֽהֵיהֶ֑ם)"라는 말은,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이 본문 중에서 자기와 다른 하나님을 가리키는 듯하다. 곧, 여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자기 본체 중에 인격의 위별(位別)로 자기와 달리 계신 분을 가리킨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 "저희 하나님 여호와"는 메시아를 가리킨다고 한다.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대외적(對外的)으로 일하실 때에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심을 보여준다(요 1:3). 이런 것을 보아도, 여기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은 메시아를 가리켰을 것이다.
일리 있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르게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유다가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고 유다가 구원을 얻은 이유는 그들이 끝까지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고 의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유다가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로암미라 하라
8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고멜은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바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8절). 여호와께서는 그 아들의 이름을 "로암미(לֹ֣א עַמִּ֔י)"라고 하셨습니다. 로암미도 로루하마처럼 두 단어입니다. 로(לֹ֣א)는 "아니다"라는 뜻이고 암미(עַמִּ֔י)는 "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로암미는 나의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로암미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백성이 아니라고 한 그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하시고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2:23; 롬 9:25).
이스라엘의 회복과 이방인의 구원
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11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10절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와우 접속사가 "그러나"로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로암미라고 하셨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주해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26)"라고 호세아서 본문을 인용합니다. 이 본문을 인용한 것은 앞에서 말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진노를 보이시고 당신님의 능력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멸하시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롬 9:22-23). 죄를 범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반역하고 모르는 이방인이 다 진노의 그릇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심으로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역사입니다.
10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다는 것은 그들 중에 남은 자들을 뜻합니다(롬 9:27; 사 10:22). 이 남은 자 안에는 모든 이방인 신자들이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이스라엘 자손은 모든 믿는 자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11절은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것을 예언합니다. 이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잡혀간 땅 바벨론으로부터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두머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모든 믿는 사람들이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받을 때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습니다.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칼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호세아서 주석, 21쪽).
여기서 "이스르엘"은, 아합과 기타 사람들이 살륙(殺戮) 당한 땅인데 이렇게 많이 살육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백성이 각처에서 그리로 돌아오리라는 뜻이다(Calvin).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호세아는 이렇게 심판과 은혜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구원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는지 호세아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호세아가 자기 딸에게 로루하마라고 부를 때의 심정, 그리고 자기 아들에게 로암미라고 부를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렇게 부르면 부를수록 더욱 애타게 그들을 사랑하고 구원하고 싶은 마음이 불타오르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것이 아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그런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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