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2장 중간부,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에 대한 말씀,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은 그들

2023. 8. 18. 08:32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반응형

목차


    예레미야 22:10-19

    찬송가 350장 우리들이 싸울 것은


    죽어서 하나님의 땅에 묻힌 자와 잡혀가서 하나님의 땅에서 떨어져 나간 자 

    유다 왕들에 대한 예언이 이어집니다. 10절에 보면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죽은 자는 요시야를 가리킵니다. 요시야가 애굽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죽었을 때 예레미야는 그를 위해서 애가를 지었고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였습니다(대하 35:2-25). 이렇게 사람들은 요시야의 죽음을 슬퍼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거나 애통하지 말고 잡혀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고 하십니다. 요시야는 선한 왕이었고 이미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는 죽어서 그의 조상들의 묘실에 평안히 장사되었습니다. 죽어서 하나님의 땅에 묻힌 것입니다. 죽었지만 하나님과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 안에서 안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잡혀간 자는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땅에서 유배되어 비참함 가운데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잡혀간 자는 살아있지만 하나님과 단절되는 죽음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잡혀간 자는 요시야의 아들 살룸입니다(11절). 살룸은 여호아하스를 가리킵니다. 여호아하스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인데 애굽 왕 바로 느고가 그를 애굽으로 잡아갔습니다(왕하 23:32, 34). 그는 애굽으로 잡혀가서 거기서 죽었습니다. "잡혀 간 곳에서 그가 거기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12절)" 그는 하나님의 땅에서 쫓겨나서 애굽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비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땅에서 죽어서 조상들의 묘실에 장사된 요시야는 평안에 들어가지만 하나님의 땅에서 쫓겨나서 이방 땅에서 죽는 여호아하스는 평안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것이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죽어도 하나님과 단단히 붙어서 죽는 사람이 있고 살아 있어도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의 사람을 영적으로는 죽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가장 비참한 사람입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고 잡혀간 자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여호야김의 횡포 

    여호아하스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13절에서 19절까지 여호야김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야김의 원래 이름은 엘리야김이었는데 바로 느고가 그를 왕으로 세울 때 그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고쳤습니다(왕하 23:34). 그 때 바로 느고는 유다에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했습니다(왕하 23:33). 은 백 달란트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대충 600억 원 가량 되고 금 한 달란트는 150억 원 정도 됩니다. 그러니가 약 750억 원의 돈을 벌금으로 내게 한 것입니다.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여호야김은 백성들에게 은금을 징수하여 바로 느고에게 바쳤습니다(왕하 23:35). 그렇게 나라의 재정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왕궁을 건축하는데 힘을 썼습니다.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14절)" 나라의 재정이 파탄이 난 지경에 돈이 많이 들어가는 건축사업을 벌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15절 상)" 돈이 없는 상황에서 건축 사업을 벌였기 때문에 그는 일꾼들에게 정당한 품삯을 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서 화를 선포하십니다.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13절)" 

     

    예레미야 22장 중간부,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에 대한 말씀,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은 그들

    왕권은 화려한 왕궁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님,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으로 세워짐 

    왕권은 화려한 왕궁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때에 그가 형통하였느니라(15절)" 여기서 네 아버지는 요시야를 가리킵니다. 요시야는 사치하지 않았고 정의와 공의를 행했습니다. 미슈파트와 체테카를 행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6절). 미슈파트와 체데카를 행해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했습니다. 사치하지 않고 나라의 재정과 행정력을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형통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에 따라서 왕권을 행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바로 형통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형통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브(טוֹב)입니다. 이 말은 선하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뜻에 맞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다라는 뜻입니다.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포함해서 인생이 벼랑 끝에 몰려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요시야는 나라의 재정과 행정력을 잘 사용해서 힘 있는 자들이 횡포를 부리지 못하도록 하여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생기지 않도록 힘썼습니다. 이 시대로 하자면 입법과 사법과 행정이 서로를 잘 견제하고 유기적으로 잘 돌아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언론도 제 역할을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 한 쪽이 권력을 잡고 횡포를 부리지 못하게 하여 의가 잘 시행되도록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권력자는 자기의 끝을 생각해야 함 

    이렇게 한 요시야와는 달리 여호야김은 탐욕을 부렸습니다. 탐욕을 부려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통치하면서 사람들을 압박하고 포악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17절)" 앞에서 나오는 대로 자기 왕궁을 건축한다고 사람들을 동원해서는 정당한 품삯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 가지 예일 뿐이었습니다. 나라가 잘 돌아가지 않으니까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을 가두고 자기에게 아첨하는 사람들로만 주변을 가득하게 하여 행정을 어지럽혔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압박하고 포악을 행하여 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것을 다 보고 있기 때문에 여호야김을 위해서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18절).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이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가 행한 모든 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됩니다. 역사에 기록됩니다. 이것을 생각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호야김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19절)" 왕권을 강화한다고 왕궁을 크게 지으면 뭐합니까? 그는 끌려 예루살렘 성 문 밖에 던져지고 아무도 돌아보는이 없이 짐승 같이 매장함을 당할 것입니다. 

    통치자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함 

    하나님께서 통치자를 세우셔서 다스리게 하실 때에 통치자로 세움 받는 사람은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행동 하나 하나, 자기가 세운 정책 하나 하나가 나라 전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지는 사람들은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교회 안에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교회가 잘 돌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체택하고 있는 민주주의 정치 체계는 거슬러 올라가면 장로교회 정치 체계를 따른 것입니다. 이 체계 안에서 법이 제대로 시행되도록 각 권력 기관들이 맡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나라가 잘 돌아갑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도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