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2장 첫 부분, 유다 왕들의 죄와 그 죄의 결과, 이 시대의 한국 교회

2023. 8. 17. 08:30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목차


    예레미야 22:1-9

    찬송가 516장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22장으로 이어지는 문맥 

    21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레미야는 유다 왕의 집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이 말씀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포위 당하자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장면에 이어서 나옵니다. 문맥으로 보자면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포위 당한 이유는 유다 왕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공의와 정의로 통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가 회개하지 않고 재앙을 면하고자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기적을 바라지 말고(21:2) 유다 왕으로서 왕된 자의 소임을 다해야 할 것(21:12)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22장에 이어집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하라고 하십니다(1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은 유다 왕과 그 신하들과 그 문으로 들어오는 백성들입니다(2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3절)"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는 말은 원어로 미슈파트(מִשְׁפָט)와 체데카(צְדָקָה)를 행하라는 말입니다. 미슈파트는 체데카대로 모든 사안에 잘 적용하는 것을 뜻합니다. 공의로 번역된 체데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대로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의라고 합니다. 논리적으로는 체데카가 미슈파트보다 먼저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미슈파트는 체데카를 구체적인 사안에 적용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미슈파트가 먼저 나왔습니다. 그것은 왕들의 소임이 미슈파트를 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들은 먼저 하나님께서 마땅하게 여기시는 것, 즉 의(체데카)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을 재판을 할 때나 나라를 다스릴 때나 행정을 할 때 잘 적용시켜야 했습니다. 그것이 정의(미슈파트)입니다. 

     

    예레미야 22장 첫 부분, 유다 왕들의 죄와 그 죄의 결과, 이 시대의 한국 교회

    왕들이 행해야 하는 구체적인 정의 목록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질 것 

    왕들이 행해야 하는 구체적인 정의 목록이 이어집니다. 첫 번째는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는 것입니다. 압박하는 자는 높은 자이고 힘이 센 자입니다. 사람이 마음 가는 대로 하면 자연스럽게 높고 힘이 센 자의 편에 서게 됩니다.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권력을 유지하려면 지지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때 힘이 되는 사람들이 높고 힘이 센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압박하는 자에게서 탈취 당하는 자를 건지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를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사명으로 여겨 하나님의 시각으로 판단할 수 있고 동시에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신명기 17장에 보면 왕은 율법책을 항상 곁에 두고 평생 열심히 읽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고 그 율법의 모든 말과 규례를 지켜 행해야 했습니다(신 17:18-19). 이렇게 해야 압박하는 자가 아무리 힘이 세고 유력한 자라고 해도 그를 꾸짖고 그에게 탈취 당한 자를 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을 압제하지 말 것

    두 번째는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명기 10장에 보면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는 분이라고 나옵니다(신 10:18). 두 번째는 첫 번째와 이어기는데 보통 탈취 당하는 자들이 바로 힘 없는 이방인이나 고아나 과부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행정이나 제도를 적용할 때 힘이 약해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는지를 잘 살펴서 혹시 그런 일이 있다면 억울함을 풀어주고 행정과 제도를 보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 것 

    세 번째는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입니다. 여기서 이 곳은 하나님의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땅에서는 무죄한 피가 흐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죄한 피는 힘의 논리가 나라를 지배할 때 흐르게 됩니다. 모든 사안에서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기 보다 권력자가 시키는 것이니 그대로 해라, 이렇게 될 때 억울하게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자기 일을 감당하는 데 권력자가 옳지 못한 일을 시킵니다. 그럴 때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고 심지어 일터에서 쫓겨나고 가정이 망가지고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병이 들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굉장히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정의와 공의가 시행되지 못한 이유, 언약을 버림과 우상을 숭배함 

    왕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서 나라를 통치해야 나라의 기강이 세워집니다. 그래야 신하들과 백성들의 생활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 왕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온 나라가 타락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 왕의 집은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5절). 유다 왕의 집은 하나님께 길르앗 같고 레바논의 머리 같았습니다. 길르앗은 푸른 초장이 펼쳐진 땅이고 레바논은 각종 나무가 잘 자라는 땅인데 특별히 백향목이 많이 나는 땅입니다. 푸른 초장은 양떼에게 유익하고 백향목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큰 유익을 줍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신 유다 왕의 집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쳤습니다. 그랬는데 그 집이 이제 광야와 주민이 없는 성읍이 된다고 하십니다(6절). 그렇게 유다의 집은 파멸될 것인데 그 집을 건축한 자재인 백향목을 찍어 불에 던질 것이라고 하십니다(7절). 여러 민족들이 예루살렘 성읍을 지날 때 서로 말하기를 "여호와가 이 큰 성읍에 이같이 행함은 어찌 됨인고 하겠고 그들이 대답하기는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까닭이라(9절)"라고 말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큰 성읍이라고 지칭되는 이유는 거기에 하나님의 법이 시행되어 하나님의 크심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성읍이 이제 황폐하게 되는데 왜 그렇게 되냐면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기니까 나라에 정의와 공의가 시행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어디에 적용해야 하는가 

    이 말씀을 정치에 바로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나오는 유다 왕들은 하나님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왕이기 때문입니다. 세속 정치와는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가에는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세속 정치 영역에 교회는 각자가 시민으로서 참여합니다. 정치에 참여할 때는 각자의 신앙 양심에 따릅니다. 그럴 때 신앙 양심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바르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져야 한다는 것과 둘째,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셋째,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투표권을 행사하고 일치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래야 세속 정치 체계가 안정될 수 있고 믿는 자들이 평안한 가운데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작금의 실태를 보면 한국 교회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기 보다 우상숭배에 앞장서고 우상숭배를 조장하고 있지는 않나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도 특별히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