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19. 12:43ㆍ성서유니온 매일성경/예레미야
목차
예레미야 22:20-30
찬송가 273장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요시야와 대조되는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
22장 첫 부분에서는 유다 왕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유다가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22:1-9). 그 다음에는 살룸이라고 하는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이 나옵니다(22:10-19). 여호아하스는 요시야와는 달리 하나님의 땅에서 유배되어 포로로 잡혀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요시야는 전쟁에 나갔다가 큰 부상을 당했지만 예루살렘에서 죽었고 조상들의 묘실에 평안히 장사되었습니다. 여호야김도 요시야와 달리 자기 왕권을 강화하려고 궁전을 지었는데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았습니다. 요시야는 먹거나 마시지 않고 정의와 공의를 행해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였습니다. 이렇게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은 요시야와 달랐기 때문에 그 끝도 다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20절부터는 예루살렘에 대한 탄식이 나오고 24절부터는 여호야김에 이어서 왕이 된 여호야긴에 관해서 나옵니다.
레바논과 바산과 아바림
20절에 보면 레바논과 바산과 아바림이 나옵니다. 레바논은 이스라엘 땅 북서쪽에 있는 산입니다. 바산은 북쪽에 있는 산이고 아바림은 유다 땅 동쪽으로 모압 쪽에 있는 산맥입니다. 레바논은 백향목이 많이 나는 비옥한 산이고 바산 지역은 초장이 펼쳐져 있어서 목축을 하기 좋은 곳입니다. 아바림은 산맥인데 그 산맥에 속한 산인 느보 산에서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습니다(민 27:12). 이 산들은 하나님의 땅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로 여기에 오르면 이스라엘 땅이 한 눈에 보입니다. "너는 레바논에 올라 외치며 바산에서 네 소리를 높이며 아바림에서 외치라 이는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음이라(20절)" 여기서 "너"는 여성 2인칭 단수로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 또는 예루살렘이 사랑하는 자들이 다 멸망하였기 때문에 그 땅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에 올라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라는 뜻입니다.
평안할 때 들리는 말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예루살렘 성과 그 안의 사람들이 다 멸망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21절)" 멸망이 임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평안할 때에, 하루 하루가 무사히 잘 지나갈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회개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듣지 않는데 습관적으로 듣지 않았습니다. 잘 듣는 것도 습관이고 잘 듣지 않는 것도 습관입니다. 평안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하나님께 매일 간구하면서 나아가는 것도 습관입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 말씀을 잘 듣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여기서는 개인에 관한 말씀이 아니고 예루살렘 공동체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나중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말씀하시는데도 그 말씀도 듣지 않았습니다. 듣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이 참 무서운 것입니다. 이런 습관은 개인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이것이 공동체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잘 보면 어떤 교회는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습관처럼 잘 되어 있습니다. 반면 어떤 교회는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듣지 않고 그 말씀을 평가합니다. 평가하고 대적하고 급기야 부임하는 목회자를 자꾸 쫓아냅니다. 물론 목회자의 자질이 부족하고 실제로 목사가 이중적이고 이상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보면 목회자를 쫓아내는 교회가 또 다시 쫓아냅니다. 이것도 습관처럼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개인이나 공동체나 습관이 잘못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공동체가 더 조심해야 합니다.
악한 지도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임
그러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다 바람에 삼켜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켜질 것이요(22절 상)" 그들의 지도자들이 심판을 받아서 마치 쭉정이가 바람에 날아가듯이 날아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과 달리 쭉정이는 바람에 날아갑니다. 그렇게 심판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시 1:3-5). 이렇게 볼 때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시편 1편에 나오는 악인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지 않고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 악인들이 예루살렘을 이끄는 목자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로잡혀 가리니 그때에 네가 반드시 네 모든 악 때문에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22절 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악을 행했기 때문에 다 사로잡혀 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그 땅에서 날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인이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을 당할 것임
그런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문제가 있는 사람은 바로 왕입니다. "레바논에 살면서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여인이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랴(23절)" 여기 레바논에 살면서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는 백향목으로 지은 궁에 거하는 왕을 가리킵니다. 왕들은 레바논 산처럼 높은 곳에 거하는데 특별히 백향목으로 지은 왕궁에 거합니다. 그에게 여인의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이 임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고통이 임하는데 그를 돌보아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련함이 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해산하는 고통은 생명을 잉태하는 고통입니다. 의미 있는 의미가 큰 고통입니다. 이런 고통의 역사를 뚫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또한 이런 고통을 통과하여 우리가 영화롭게 되어 부활합니다. 가련함이 심한 고통이지만 혼자 당하는 고통이 아니고 성령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이 함께 당하는 고통입니다(롬 8:22, 23, 26). 이렇게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선포한 후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왕은 여호야긴입니다.
고니야(여호야긴)에 관한 말씀
여호야긴은 여호야김의 아들입니다. 24절에는 고니야라고 나옵니다. 고니야(כָּנְיָהוּ)는 여호야긴(יְהוֹיָכִין)과 같이 세운다, 굳세게 한다는 뜻의 쿤(כּוּן)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여호와께서, 야훼께서 굳세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름을 지은 사람은 그런 소원을 담아서 그 아들 이름을 여호야긴이라고 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의 뜻과 반대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네가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24-25절)" 인장반지는 왕의 통치권을 상징합니다. 인장반지로 여러 가지 사안을 결제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야긴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잡혀가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통치하시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인장 반지마저 빼앗긴 것같은 느낌인데 사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호야긴은 하나님의 땅에서 쫓겨나서 다른 지방으로 잡혀갑니다(26절). 여호야긴과 그와 함께 잡혀간 자들은 하나님의 땅에 돌아오기를 사모하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27절). 그렇게 해서 여호야긴은 천하고 깨진 그릇처럼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갑니다(28절).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29절)" 이렇게 땅이 세 번이나 나오는 것은 그만큼 땅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의 땅입니다. 거기에서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땅에 살 때는 하나님을 배반하면서 하나님의 땅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몰랐지만 쫓겨난 그들은 이제 그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는 말씀의 뜻
예레미야는 30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30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형통하다는 말은 찰라흐(צָלַח)입니다. 이 말의 원 뜻은 "나아가다, 전진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고니야를 끝으로 이제 더 이상 왕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야긴은 자식이 없는 것과 같이 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여호야긴의 아들이 나옵니다. 거기서 여호야긴은 고니야로 나오고 고니야는 스알디엘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알디엘은 간구하다는 뜻의 샤알과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이 합쳐진 말로 내가 하나님께 간구했다는 뜻입니다. 이 이름으로 볼 때 여호야긴은 포로로 잡혀간 후에 회개한 것으로 보입니다. 회개했지만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더 이상 왕조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다윗 왕조가 여고냐에서 끊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평행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로 기록됩니다. 즉 그의 대에서 왕위가 끝나는 자로 기록되는 것입니다.
여호야긴의 이름대로
여기서 여호야긴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야긴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입었을까요? 열왕기하에 보면 나옵니다.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월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목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왕하 25:27-28)" 여호야긴은 이방 땅에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의 지위가 회복되었습니다. 바벨론에 있는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임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여호야긴을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그의 자손 중에서 아무도 왕의 칭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즉 형통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은 입었으나 그의 대에서 왕위가 끊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반면 앞에 나온 왕들은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지 못합니다. 시드기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요시야의 이 세 아들은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지 못하고 요시야의 손자 여호야긴이 요시야 다음에 바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로 재앙을 선포하셨지만 여호야긴은 예레미야의 말대로 항복하고 포로로 잡혀가서 그의 생명을 전리품을 얻듯이 건짐을 받았고(렘 21:9) 그의 지위가 복권되어 이름대로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재앙이 선포될 때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회개하고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은 살고 그렇게 하지 않고 끝까지 말씀과 반대로 하는 사람은 재앙을 다 당하고 죽습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야긴에게 재앙을 선포했고 그 말씀대로 다 이루어졌지만 그는 회개했고 또 말씀대로 그 생명이 건진바 되었고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과연 해산하는 고통의 결실이 맺힌 것입니다. 반면 시드기야와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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