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장 전반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

2023. 6. 6. 07:56성서유니온 매일성경/로마서


로마서 6:1-14

찬송가 436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로마서 5장 마지막 부분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5:20)고 나옵니다. 은혜는 그렇게 왕 노릇합니다. 죄의 지배 범위가 넓고 강력할수록 은혜는 더욱 넘쳐서 죄의 지배를 다 무력화합니다. 그렇게 해서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합니다(5:21). 이러한 진리에 대해서 6장 1절과 같은 반론을 펼 수 있습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즉,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면 은혜를 넘치게 하는 방법은 죄를 더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반론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

이 반론을 제시하면서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죄 가운데 살 수 없다고 답합니다(6:2).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죄는 우리를 지배할 때 값을 치르라는 것으로 지배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5장 21절에서도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다고 합니다. 즉 죄는 우리를 자기에게 빚진 자로 취급합니다. 빚을 갚으라고 계속 독촉함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게 진 빚은 바로 죽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기 전에는 죄에게 빚을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2절). 이 말은 죄가 더 이상 빚을 갚으라고 우리를 독촉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아무 것도 갚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우리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곧 우리가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예수님만의 죽으심이 아니고 우리의 죽음도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예수님 안에서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사되실 때 우리도 함께 장사되었습니다(4절). 그렇게 해서 죄는 우리에게 채무를 독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활 생명을 부여 받은 우리

우리는 죽었으나 살아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한 생명을 부여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죽을 생명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활한 생명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죽을 생명이란 죄의 채무를 벗어나지 못한 생명을 뜻합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상태가 바로 죽을 생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생명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요 이미 죽은 생명을 삽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생명을 삽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완전히 벗어진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전반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

이것은 영적으로 이루어진 일임

그런데 이것은 영적으로 일루어진 일입니다. 12절에 보면 몸은 아직 죽을 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우리는 영적으로 이미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거듭났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6절). 우리 옛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옛 사람은 새 사람과 대비됩니다. 새 사람은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새롭게 창조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옛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8절)" 즉 이미 일어난 일이고 사실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앎이로다, 여길지어다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깨달아 알아야 하는 일입니다. 9절에 보면 "앎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니까 다시 죽지 아니하신다, 그리고 사망이 다시 예수님을 주장하지 못한다, 이것을 우리가 안다고 말합니다. 즉 곰곰히 생각해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다시는 사망이 예수님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깨달아 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깨달은 사람은 이제 그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여길지어다(11절)"가 그 뜻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시니 너희도 너희 자신을 그렇게 여겨라, 즉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아 알아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여기라"고 하는 것은 이 일은 영적으로는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아직 몸에까지 완전히 성취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상으로는 그렇지 못하지만 영적으로는 이미 일어난 일이니 받아들이고 그렇게 여기고 살라는 뜻입니다.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그렇게 여기고 사는 것은 12절에 나오는 대로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몸은 아직 죽을 몸입니다. 부활의 몸이 아닙니다. 부활의 몸을 입는 날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나에게 적용된 것은 영적으로 믿음으로 적용된 것입니다. 이것의 성취는 아직 앞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가 몸과 지체를 자꾸 지배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죽을 몸이요 죽을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는 영적으로 이미 자기가 죽은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죽은 것으로 여기고 그 몸을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영에 속한 싸움입니다. 몸을 두고 죄가 자꾸 지배권을 행사하려고 하는데 거기에 은혜와 성령님께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이미 이긴 싸움입니다. 왜냐하면 14절에 말씀하는 것과 같이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즉 우리는 법으로 정죄 받아서 자꾸 죄가 더해지는 사람이 아니고 은혜가 자꾸 더해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죄가 자꾸 은혜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음

위에서 살펴본 것을 토대로 결론을 내리자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은 심정적으로 죄 안에 그대로 거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죄를 더할 수 없습니다. 이미 영적으로 죄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을 자꾸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지 죄에게 내어주지 않습니다. 이런 싸움에서 죄는 주도권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더하게 하는 법 아래에 우리가 있지 않고 죄를 덮어서 의를 더하게 하는 은혜 아래에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명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