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장 전반부, 율법과 나의 관계, 선한 율법과 악한 죄가 나를 어떻게 죽이는지에 관하여

2023. 6. 8. 17:25성서유니온 매일성경/로마서


로마서 7:1-13

찬송가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사람과 율법의 관계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전반부에서 사람과 법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먼저 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만 그 사람을 주관할 수 있습니다(1절). 그에 대한 예로 남편과 아내에 관한 법을 듭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남편에 매여 있을 때 만약에 남편이 죽는다면 그 여인은 남편에게 매여 있는 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2절). 만약에 어떤 여인이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가 됩니다. 여기서 음녀라는 말은 헬라어로 모이칼리스(μοιχαλίς)입니다. 이 음녀라는 말은 간통을 범한 여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특별히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남편에게 매여 있는 법이 이 여자에게 적용되어서 간통 죄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남편이 죽으면 이 법에서 자유롭게 되고 간통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3절). 이처럼 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만 효력을 발휘합니다. 

죽었기 때문에

이것을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적용합니다.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우리가 죽었다는 것으로 적용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우리가 죽은 것과 같다는 사상을 전제로 합니다. 앞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롬 6:3)고 했는데 그것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죄가 되셔서(고후 5:21) 그 몸에 율법의 모든 정죄를 받고 죽으셨습니다. 죄가 없으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되신 것은 우리가 받을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에 사실은 우리가 죽은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죽은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바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4절 상). 

율법에서 놓여서 예수님께로

이렇게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율법에게서 놓여서 다른 이에게로 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도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율법에 대하여 우리가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매여 있어서 율법 때문에 어떤 선한 일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유롭게 예수님께 가서 사는 자들입니다. 이제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은 율법의 속박 아래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맺는 것입니다. 온전한 자유가 보장된 상태에서 선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4절 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김

우리가 죽기 전에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에 매여 있었습니다. 죄의 정욕은 율법과 만나서 죄를 생산했습니다. 그것은 육신 안에 있는 죄의 정욕이 그것을 금지하는 율법과 만나서 죄에 대한 감각을 더 키운 결과입니다. 율법이 죄를 정하고 정죄함으로 사람이 죄에 더 집중하고 죄를 더 생각함으로 더 죄를 짓게 됩니다. 그렇게 지은 죄는 사망을 위한 열매입니다(5절). 그랬던 우리가 이제는 얽매였던 육신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육신을 얽매고 있었던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깁니다. 이 말은 우리 인격에 자유가 부여되어 우리가 율법에 적혀 있는 문자에 얽매여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6절).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종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 노릇을 하는데 어떤 종이냐면 자발적으로 섬기는 종입니다. 어떻게 자발적으로 섬기는 종이 되었냐면 영의 새로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얽매고 있는 것이 벗어진 영, 인격적으로 자유로워진 영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7장 전반부, 율법과 나의 관계, 선한 율법과 악한 죄가 나를 어떻게 죽이는가

율법은 악한 것이냐

여기까지 들은 사람은 그러면 율법이 나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예상하고 "그런 죽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죄가 아닙니다. 율법은 죄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율법이 죄를 알려주기 때문에 죄가 더 기회를 탑니다. 율법이 죄를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죄가 활성화되지 않았을 것인데 알려줌으로 오히려 죄가 더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안에 있는 죄, 즉 반역성이라는 썩은 상태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게 죄가 살아나면 나는 죽습니다(9절). 

율법은 생명을 위하여 주어진 것임

율법은 본래 생명에 이르게 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10절).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8:5)"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나 자신을 속이고 나를 죽였기 때문입니다(11절). 이것은 8절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죄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잡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계명을 들은 사람은 계명을 들었기 때문에 죄감이 생겨서 죄가 그것을 기회로 잡는다는 뜻입니다. 가령, 분홍 코끼리 생각하지 마라, 이런 말을 들었다고 했을 때 분홍 코끼리를 더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계명이 무엇을 금하면 그것을 탐하는 마음이 발동되는 것입니다(8절, 11절). 이것은 죄의 속임입니다. 속임의 원조는 사탄입니다. 사탄도 하와를 그렇게 속였습니다.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악한 분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죄는 그런 식으로 선한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속여서 죄를 짓게 하고 그 결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11절)"

문제는 죄가 속이는 것임

사도 바울은 율법은 거룩하다,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합니다(12절). 문제는 죄가 속이는 것입니다. 선한 율법이 나에게 사망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율법은 죄가 죄로 더 드러나게 합니다. 그 결과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죄를 정죄했는데 죄와 결부된 내가 죽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가 나를 죽이는 것이니 또한 죄는 심히 죄가 됩니다. 죄가 죄인 것이 더욱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이러한 속임에서 스스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어야만 합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으로 끝나게 하지 않고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로마서 7장 전반부는 이렇게 율법과 나의 관계와 율법은 선한 것이고 죄는 악한 것인데 어떻게 나를 죽음으로 이끄는가를 자세하게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