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장 전반부, 의로우신 하나님의 뜻,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과 복음을 대적하는 유대인들

2023. 6. 13. 06:46성서유니온 매일성경/로마서


로마서 9:1-18

찬송가 75장 주여 우리 무리를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유대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을 마무리하면서 자기 민족이 생각났습니다. 아무도 믿는 자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데(8:39)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유대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사도 바울은 이어지는 9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의 큰 근심이요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1-2절). 그는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에게는 모세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간구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사도 바울은 모세와 같이 자기 민족이 다 구원 얻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약속들이 있는 민족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즉 이스라엘에게서 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야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당신님의 친 백성 삼으셨습니다. 그렇게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습니다(4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조상들도 유대인의 것이요 예수님도 유대인으로 나셨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5절). 하나님께서 한 족보를 취하여 나셨는데 그 족보가 바로 유대인의 족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질 수 있는가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 때 사랑을 받았던 민족이 지금은 버림 받은 것 같은 모양이니 하나님의 약속이 무효가 될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은 무효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왜냐하면 유대인이라고 다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6절). 

육체적 후손이라고 자동적으로 약속 안에 있는 것은 아님

이삭의 예

여기서 이스라엘이라 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 즉 이스라엘의 육체적 후손으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후손으로 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예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예는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난 자식이라고 다 아브라함의 영적 약속을 이어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사람만이 그 약속을 이어받았습니다. 이스마엘이나 후처 그두라에게서 난 아들들은 아브라함의 씨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7절). 아브라함에서 난 모든 육신의 자녀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약속으로 나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8절). 즉, 하나님께서 내년 이 맘 때 네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한 그 약속 대로 난 이삭만이 아브라함의 영적 계보를 잇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9절). 

야곱과 에서의 예

두 번째 예는 야곱과 에서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엄마 리브가의 뱃속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뱃속에서 민족이 갈렸습니다. 한쪽은 이스라엘 민족이요 다른 한쪽은 에돔 족속입니다. 그들이 아직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택하셨습니다(11절).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하셨고 나중에 말라기서에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말 1:2) 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세워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1절 하).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것이 먼저입니다(11절 상). 그 후에 선이나 악을 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부르심으로 세워집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 후반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유대인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시니 어찌 그러하신가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대답합니다(14절). 왜 그럴 수 없는지 모세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3:18-19). 그렇게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데 모세를 반석 틈에 두시고 지나가시면서 손으로 모세를 덮으셔서 등을 보여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출 33:20-23). 여기에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 담겨 있습니다. 부정한 사람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반석으로 가리시고 손으로 덮으셔서 그의 생명을 보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모세가 구하는 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이 일은 모든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일의 예표입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 담긴 우리를 향한 긍휼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빛을 비추셔서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신 것입니다. 

모세와 바로의 예

모세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 보기를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광을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셨고 긍휼히 여기기를 원하셨다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모세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16절).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는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였습니다. 

바로

야곱의 반대편에 에서가 있었던 것같이 모세의 반대편에는 바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셔서 당시 온 땅에 하나님의 이름이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17절).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뜻하신 대로 사람을 택하시고 알맞게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바로를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적을 베푸시는데도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알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긍휼히 여김 받기를 철저하게 거절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음

이 말씀이 지금 유대인이 믿지 않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그 내용은 9장 후반부에서 이어집니다. 다만 여기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는 주도권이 없다는 것입니다.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택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 안에서 은밀하게 작동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고 의로움

하나님의 이러한 뜻은 완전하고 의롭습니다. 왜냐하면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15절).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되는 것인데 그 모든 되는 것을 보면 아, 긍휼히 여길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았구나를 알게 됩니다. 저 사람은 참으로 받을 만한 것을 받았구나 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예로 든 이삭, 야곱, 모세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셨는데 그들의 삶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께 받을 만한 것을 받았습니다. 에서와 바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납니다. 그렇게 보면 사도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어떻습니까? 복음을 끝까지 거역하고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었습니다. 유대인은 그에 따라서 받을 만한 처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에 얼마나 마음에 근심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도 철저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